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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틸] 난 한국인이었다

기사입력 2007.08.13 21:42 / 기사수정 2007.08.13 21:42

편집부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 오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모든 한국인이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남을 기뻐한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모든 한국인이 누린 것만은 아닙니다. 일본열도의 재일교포들은 광복 이후에도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번 글은 일본 프로야구계의 한국계 선수들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고 그들이 남겨 준 과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광복 전 무고한 희생, 광복 후에는 멸시와 천대로

1923년 9월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라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유언비어로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히 학살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한 사망자 2만여 명 중 한국인 사망자는 7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열도의 한국인들은 일본에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연합군의 맹폭격에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일본야구계의 타격의 달인으로 불리는 장훈 또한 원폭피해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되어 왼손타자가 된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사실입니다. 광복 이후에도 열도의 한국인들은 멸시와 천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광복 이후 한반도가 둘로 나뉘어 각각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중에도 재일교포들은 일본 식민 통치 시절과 다름없는 따돌림을 받으며 쓰라린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재일교포 2,3세대들 중 상당수가 야구에 매진했던 이유입니다.

'타격의 신' 장훈이나 히로시마 카프 시절 후쿠시 히로아키라는 이름으로 한 시즌 15승을 따내기도 했던 '너구리' 장명부 등 '한 가락' 하던 재일교포들은 많은 일본인의 극심한 견제와 모함 속에서 야구인생을 살았습니다.

난 한국인이었다

2003' 시즌 후 두 명의 타자가 '난 한국인이었다.'라고 밝히며 일본야구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주인공은 히로시마의 주포 아라이 다카히로와 한신 타이거스의 베테랑 외야수 히야마 신지로, 이 둘입니다.

2002년 28홈런을 때려내는 등 당시 히로시마가 자랑했던 대형 내야수 유망주였던 아라이는 '나는 민단 소속의 한국인 박귀호였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재 국적은 일본입니다. 지난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신에서 통산 154홈런을 때려낸 히야마 신지로 또한 '황진환'이라는 자신의 한국이름을 밝히며 한국계임을 뒤늦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히야마의 국적도 한국이 아닌 일본입니다.

왜 '한국인이다.' 가 아닌 '한국인이었다.' 가 되어야 했을까요? 이는 한국인들에게 어려운 숙제를 안겨줍니다. 만약 한국이 경제력의 증대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나라로 발전했더라면, 재일교포들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보냈더라면 그들이 일본 귀화를 쉽사리 선택했을까요?

한국의 자기안위, 재일교포 천대

스즈키 이치로의 '30년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도 일본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언제든지 꼬나볼 수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라이와 히야마는 '조센진'이라는 극심한 견제와 따돌림에 프로 입문 이후 자신의 존재를 숨기다가 어느 정도 지명도가 쌓인 연후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거를 현재로 이어가진 못했습니다. 이는 히로시마를 거쳐 한신의 주포로 활약 중인 가네모토 도모아키(한국명:김지헌), 요코하마의 교타자 긴조 다쓰히코(한국명:김용언),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에이스 사이토 가즈미(한국명:최영희)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일본인이 됐으니 상관없는 선수 아닌가?'라는 생각 이전에 '기적적이고 수직적인 경제 성장 이후 한국이 얼마만큼 대내, 외적인 성장을 했는가?'라는 자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의 '귀화 후 과거 고백'은 비단 야구 면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 야구계가 재일교포들에 얼마나 호의적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때 전국 봉황대기 고교야구 대회에는 고시엔 예선에서 탈락한 재일교포 선수들로 구성된 '재일교포 야구단'이 참여해 한국의 고교 선수들과 자웅을 겨뤘습니다. 또한,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 많은 재일교포 선수가 각 팀의 기동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의 이름으로 국내 무대에서 활약한 야구인들이 오랫동안 한국 야구계에 머물렀는가를 생각하면 그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고 대다수가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전 재일교포 출신의 SK 김성근 감독은 '자신은 한국 야구인도 일본 야구인도 아니었다.'라고 밝히며 씁쓸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성근 감독은 선수 시절 일본 내에서의 멸시는 받았지만 한국 무대에서 정신적인 보상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습니다.


광복절은 나라의 자주권을 되찾은 뜻 깊은 날입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1세대들은 대한해협 건너 조국의 광복에 기뻐하면서도 일본인들의 괄시에 무릎 꿇기 일쑤였습니다. 

단순하게 선인들의 업적만을 기리기보다 강점기 시절 쫓겨나듯 타지로 떠난 재외동포들의 '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광복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한국계 였음을 밝혔던 아라이 다카히로, 히로시마 카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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