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6.05.13 07:41 / 기사수정 2006.05.13 07:41
한국, 월드컵 도전사-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을 앞둔 선수들의 자신감과 국민의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를 통틀어도 월드컵에 2회 연속으로 진출한 나라는 한국뿐이었고 지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강팀들을 상대로 보여준 저력은 강한 자신감으로 축적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86년 월드컵 본선 출전 선수 중 최순호 김주성 변병주 등이 건재했고, 혜성처럼 등장한 두 명의 '슈퍼 루키' 황선홍과 홍명보가 대표팀의 최전방과 최후방을 지원하고 있어 대표팀의 전력은 1986년 대회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또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경기력도 기대를 하게 하는데 한 몫했다. 대표팀은 1차 예선과 최종 예선을 치르는 동안 9승 2무 29득점 1실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예선을 가볍게 통과했다. 국민의 기대는 높았고, 가능성 또한 충분해 보였다. 당시 우리와 같이 E조에 속한 나라는 스페인을 비롯해 벨기에와 우루과이였다. 물론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축구 강국들이지만 지난 1986년 대회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과 한 조였던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희망적인 조편성이었다. 본선 조별 리그를 예상하던 현지 언론들도 아시아 맹주인 한국의 '황색돌풍'을 기대하며 한국 대표팀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터라 월드컵 본선 첫 승은 물론이고 16강 진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기대도 무척이나 뜨거웠다. 희망으로 가득 찬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되었다. 경기 다시 보기 △1990년 6월 12일(이하 한국 시각), 베로나 벤테고디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벨기에 브레이크 없는 고속질주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라왔지만 역시 첫 경기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전반 슈팅 수 0-8이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전반에 한국 대표팀은 벨기에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월드컵 경험이 없던 황선홍, 구상범, 이영진 같은 선수들은 물론이고 최순호, 노수진 같은 노장들도 과도한 긴장감에 몸이 굳어 제 기량의 반도 보이지 못했다. 원조 '붉은 악마'인 유럽의 강호 벨기에의 공격은 매서웠다. 초반부터 한국을 강하게 밀어붙인 벨기에는 전반 6분 베르사블의 헤딩슛이 한국의 왼쪽 골포스트를 맞고 흘러나갔고, 이후에도 골과 다름없는 공격을 수차례 퍼부었다. 그러나 한국 대표팀의 육탄 방어로 득점하지는 못했다. 비록 일방적인 경기긴 했지만 전반을 0-0으로 마친 대표팀이 후반에도 잘 버텨 준다면 당초 목표로 삼은 승점을 획득할 수 있었던 터라 대표팀은 벨기에의 맹공에 맞섰다. 하지만 후반 8분 경 최인영의 판단 실수로 벨기에에 첫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최인영이 벨기에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공격수 엔조 시포의 로빙 볼을 쳐내려고 골문을 비운 사이 드 그리세가 텅 빈 골문으로 슬쩍 차넣어 손쉽게 선취골을 허용한 것이다.
이렇듯 공격에 치중하던 대표팀의 허점을 벨기에는 놓치지 않았다. 한국대표팀은 후반 19분 벨기에 수비수인 데 울프에게 25m짜리 중거리 슈팅을 득점으로 허용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한국을 경계했던 벨기에 언론들은 자국의 승리에 기뻐하며 무기력했던 한국을 항해 '카메룬 같은 패기나 코스타리카의 기술이 없는 팀이다'라고 보도하며 '우리가 정보가 부족해 한국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희망을 안고 힘차게 출발했던 벨기에와의 본선 첫 경기는 그렇게 수치스럽게 끝났고 선수들은 물론이고 많은 축구팬도 깊은 한숨만을 내쉬어야 했다. △1990년 6월 17일, 우디네 델프리홀리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스페인 쓰디 쓴 패배를 맛본 대표팀은 두 번째 상대인 스페인전에서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어린 황선홍 대신 발 빠른 변병주를 최순호와 함께 최전방에 포진시키고 정해원, 구상범, 황보관, 김주성 등을 미드필더로 배치해 공격적으로 스페인에 맞섰다. 한국은 전반 시작과 동시에 변병주가 스페인 골키퍼인 주비자레타와 1:1로 맞서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으나 변병주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넘어가면서 아쉽게 득점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대표팀은 전반 20분까지 스페인을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반 22분 스페인의 골잡이인 미첼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면서 대표팀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국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에서 살리나스가 크로스한 공을 미첼이 지체없이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해 깨끗한 선제골을 뽑아낸 것이다. 이후에도 스페인의 공격수인 부트라게뇨에게 연거푸 실점과 다름없는 슈팅을 허용하면서 대표팀은 흔들렸다.
하지만 대표팀은 후반 16분과 36분에 미첼에게 두 골을 더 허용해 1-3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고 2연패라는 기록으로 사실상 16강 진출이 어려워졌다. △1990년 6월 21일, 우디네 델프리홀리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우루과이 실낱같은 16강 진출의 희망을 잡기 위해서 우루과이는 꼭 격파해야 할 대상이었다.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자신했던 월드컵 첫 승을 4년 뒤로 미룰 수 없었던 대표팀은 우루과이를 경기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며 경기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당시에는 6개로 나뉜 조에서 각 조 3위 중 가장 성적이 좋은 4개국이 16강에 올랐는데 한국이 만약 우루과이를 3골 차 이상으로 이긴다면 조 3위를 기록해 16강에 진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희망 역시 깨지고 말았다. 대표팀은 경기 초반 황보관이 스페인전을 연상케 하는 위력적인 프리킥 슈팅을 날렸지만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했고 최순호와 김주성이 득점 기회를 잡았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전반에만 세 차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득점에 실패해 초조함만 더해갔다. 여기에 경기 주심을 맡은 툴리오 라네세 이탈리아 심판도 한국의 페널티킥을 외면하는 등 편파판정을 해 한국은 더 힘든 경기를 치러야 했다.
비록 첫 승은 힘들어졌지만 본선에서 얻은 두 번째 승점에 만족하려 하던 후반 45분. 한국은 교체 선수로 들어온 우루과이의 폰세카에게 통한의 헤딩 결승골을 허용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후반 윤덕여가 퇴장당하는 등 무려 40개에 가까운 파울을 기록하며 거칠게 달려들던 대표팀은 마지막 1분을 버티지 못해 본선 3전 전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만 것이었다. 지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같은 세계적 강호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자신감을 얻은 한국 축구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철저히 무너져 뼈아픈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우리의 장점과 단점은 물론이고 상대의 전술과 전략을 파악하는 것에도 실패해 그야말로 무지한 축구를 보여주었다. 아시아 지역 예선의 결과를 너무 맹신했고 빠르게 발전하며 변하는 세계 축구의 흐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였다. 비록 3전 전패로 수치스러웠지만 이탈리아 월드컵은 1990년대 한국 축구가 한 번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계기로 선진 축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크라머와 비쇼베츠 같은 외국인 축구 지도자를 불러들여 축구의 세계화에 발맞추려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힘차게 출발했던 시작과 달리 끝은 무척이나 초라했지만 한국 축구에는 소중한 교훈을 준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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