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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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리의 부귀영화] '설국열차' 봉준호의 뚝심은 건재했다

기사입력 2013.07.24 16:52 / 기사수정 2013.10.24 16:11

나유리 기자


[엑스포츠뉴스=나유리 기자] 드디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정체를 드러냈다. 원작 만화를 감명깊게 읽은 봉준호 감독의 머릿속에서 출발한지 꼬박 10년만의 일이다.

시인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가 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일상의 작은 일들에 히스테릭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는 이의 심경을 담백하게 읊은 작품이다.

지난 22일에 있었던 언론시사회에서 '설국열차'를 처음 감상할때 내내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머릿속을 거칠게 휘젓는 느낌이였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유명 시인의 유명작이라는 다소 우연한 요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설국열차'가 던지는 노골적인 주제와 이 시가 묘하게 통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국열차'를 보는 내내 '내가 꼬리칸 승객이라면 혁명에 참가했을까', '머리칸 승객이라면 변화를 두려워했을까', '현실에서 나는 어느 편에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부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같이 전 인류적으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봉준호 감독은 영화 초반부터 일직선으로 주제의식을 발포한다.



지구 온난화를 막아보려고 선진국들이 모여 앉아 기온을 낮춰주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려던 인류의 오만은 제 2의 빙하기라는 처절한 답변으로 되돌아왔다. 마포대교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혹한 앞에 모조리 얼어버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최후의 생존지인 열차에 올라탄다.

서로 부둥켜 안고 지구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는지, 열차 탑승과 동시에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사람들의 신분이 나뉘었고 어떤 이유로도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그렇게 17년이 흐른 뒤 꼬리칸 승객들이 반란을 준비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용감한 사내다. 혼란스러운 꼬리칸에서 인간 이하의 삶으로 17년을 버티면서도 사람들을 독려하고, 리더십을 발휘해 머리칸에 있는 절대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에게 거침없이 달려간다.




'설국열차'는 철저히 커티스를 중심으로 한 꼬리칸 사람들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꼬리칸 사람들이 어떤 핍박을 받고있는가에 온전히 시간을 쏟는다. 관객들로 하여금 꼬리칸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고 싶었다면 거의 성공이다.

부작용이 있다면 가학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머리칸 사람들을 현실세계 주변에 있는 악당같은 인간들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즐겁자고 보러간 상영관 내에서 짙은 한숨을 쉬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상영시간 한참이 지나도록 도무지 그 머리칸 사람들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아 '혹시 머리칸은 애시당초 없는게 아닐까.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가'라는 나름의 대반전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머리칸은 실존했다.(물론 이건 스포일러 여부와 관계없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 감독을 치켜세워 주고픈 부분은 자신의 상상을 거의 완벽히 구현 해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만화가이자 화가인 장 마르크 로셰트의 원작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거대한 열차, 빙하기, 꼬리칸과 머리칸의 분류, 남자 주인공 등의 소재를 제외하면 거의 연관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원작에서 열차는 목적지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달려가지만, 봉준호의 열차는 순환선을 채택했다. 매년 매시 같은 장소를 일정하게 통과하는 설국열차의 설정은 적재적소에 드러나 감칠맛나는 장치가 됐다.

수족관, 초밥집, 미용실, 스파, 교실, 클럽 등 다양한 열차 내 시설들도 '꼬리칸의 혁명'을 지켜보느라 심난한 관객들의 마음에 일말의 휴식을 주는 재미난 볼거리다.



미국물 좀 먹은걸로는 명함도 못내미는 캐스팅 명단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상류층의 총리 메이슨으로 나오는 틸다 스윈튼이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할 것처럼 감각 넘치는 외모지만 '설국열차'에서 그녀는 러브레터에 뿔난 B사감스러운 비주얼도 완벽히 소화해낸다. 특이한 시선처리 때문인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조니 뎁 여성화 버전 같더라도 존재감만은 확실하다.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 역시 묵직하다. 과거 '어벤저스'에서 성조기로 도배된 쫄쫄이를 입고 육감적인 근육을 은근히 과시하던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만 떠올리면 곤란하다. 리더십있고, 인간적인 '커티스'에 적역이다.

연기력 하나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배우 송강호도 제 몫을 한다. 열차 보안 설계자인 남궁민수를 꼭 송강호만 해야하는지는 물음표다. 그러나 송강호가 잘해낸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서도 남궁민수의 부성애는 돋보였다.



봉준호 감독은 다양한 국적의 배우, SF에 가까운 소재,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원작의 한계 등 흔들릴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달했다.

'마더'나 '살인의 추억' 같은 전작과 비교해 봉준호의 색깔이 옅어졌다는 실망의 목소리도 있지만, 봉준호니까 이만큼 해냈다고 박수를 치고 싶다. 오히려 '괴물'에 비교하면 진화한 모습이 여실히 보인다.

봉 감독이 누차 "블록버스터, 대작 같은 '설국열차'앞에 붙어있는 수식어들을 모조리 떼고싶다"고 언급하는것 역시 자기 중심을 지키려는 노력이라 생각한다.

'화차'의 변영주 감독은 '설국열차' 관람후 자신의 SNS에 "감독의 야망과 능력이 일치하는 경우"라고 평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다.

벌써, 감독 봉준호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나유리 기자 NYR@xportsnews.com

[사진 = 설국열차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나유리 기자 NYR@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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