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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P] 2003 vs 2013, 한국축구 도약과 성장통

기사입력 2013.05.30 17:46 / 기사수정 2013.05.31 09:55

서영원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훗날, 한국축구의 역사를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과 이후로 나눌 듯싶다. 그만큼 2002년 6월은 강렬했고 의미도 크다. 국민적 축제이면서 한국축구 도약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월드컵을 뒤로 한 2003년 한국축구는 다사다난했다. K리그의 확장, 유럽파의 증가 그리고 유난히 심했던 대표팀의 성장통까지. 그래도 한국축구 시스템이 틀을 갖췄다는 점에서 2003년 한 해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10년 전을 되돌아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2003년을 회상하며 한국축구의 8회 연속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원한다.[편집자주]

2003년 K리그, 성남의 독주와 신생팀

2003년은 차경복 감독이 이끄는 성남 일화가 독주한 시즌이었다. 중심에는 신태용, 김도훈, 샤샤가 포진해 있었다. 당시 성남은 아시안클럽챔피언십과 아시안컵위너스컵이 통합된 AFC 챔피언스리그에 도전했으며 모기업의 주도로 창설된 피스컵에 참가도 예정돼 있었다. K리그 또한 경기수가 기존 184경기서 264경기로 증가해, 두꺼운 선수층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K리그판 ‘갈락티코’ 정책이 시작됐다.

성남의 위력은 막강했다. 김도훈이 40경기 28골을 터뜨리며 토종 공격수의 자존심을 살렸다. 성남은 27승10무7패(승점91, 득실+35)의 성적으로 일찌감치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2위 울산 현대와 승점은 18점 차. 당시 K리그는 외국인 공격수에 대한 의존이 컸는데 득점 10위권 안의 한국 선수는 김도훈, 신병호(전남), 우성용(포항) 뿐이었다. 마그노, 도도, 이따마르, 뚜따, 나드손 등 브라질 용병 전성기였다.

한편 K리그는 새 식구를 맞이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대구FC가 창단했으며 당시 박감독은 "3골 먹으면 4골 넣는다"며 화끈한 공격축구를 선보였다. 하지만 대구는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11위에 머물렀다. 광주 상무(현 상주)도 리그에 뛰어들었다. 이동국이 광주의 축구인기를 책임졌다. 아쉽게도 2003시즌에는 월드컵 붐을 이어가진 못했다. 2002시즌 평균관중수 14,367명과 견줘 9,064명으로 감소했다. 

히딩크 떠난 축구대표팀 '쇼크의 연속'

거스 히딩크 감독 체제 이후 오랜 공백기를 가졌던 축구대표팀은 포르투갈 출신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을 영입했다. 코엘류호는 그해 3월 26일 부산에서 이반 코르도바가 버티는 콜롬비아와 첫 A매치를 치렀다. 4월과 5월에는 '영원한 라이벌' 일본과 정기전을 가졌다. 박충균, 김도근, 김두현 등 당시 K리그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이 합류한 만큼 기대가 컸다. 4월 홈에서는 0-1로 패했으나 5월 원정 리턴매치에서 안정환의 골로 1-0으로 승리했다. 

6월에는 월드컵 1주년을 맞이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등과 평가전을 치렀다. 우루과이전은 슈팅수 17-7로 앞섰으나 알바로 레코바의 노련미를 막지 못해 0-2로 패했다. 아르헨티나전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신예 공격수 조재진이 콜로치니, 가브리엘 에인세와 대등한 공중볼 경합을 했고 이천수는 하비에르 사네티를 위협했다. 하지만 에스테반 캄비아소, 파블로 아이마르에 밀린 중원 열세를 극복하진 못했다. 압박과 체력을 강조한 히딩크와 달리 패스플레이를 강조한 코엘류에 대한 팬들의 의구심이 커져갔다.

곪았던 문제가 터졌다. 2004 아시안컵 예선에 나선 대표팀은 오만에서 연거푸 패배를 당했다. 이른바 '오만 쇼크'다. 코엘류 감독 경질론이 본격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로 코엘류 감독은 이듬해 몰디브와 졸전 끝에 0-0으로 비기자 아시안컵 본선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경질됐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후임 사령탑이었으나 월드컵 4강으로 눈이 높아진 팬과 언론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2003년 축구계 이슈 그리고 그 이후

당시 축구계 이슈 중 하나는 어린 유망주들의 '3중' 대표팀 생활이었다. 정조국 등을 비롯한 일부 20세 이하의 청소년대표선수들은 올림픽대표팀과 국가대표팀까지 소화해야 했던 고통 아닌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부상 등의 후유증이 커지자 지금은 자제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여러 대표팀에 속한 선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연령별 대표팀에 대한 관심도 컸고 실제 인기도 많았다. 

2002년 월드컵 멤버였던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김남일 등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로 진출했다. 이영표는 '선 임대 후 이적'의 형태였으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완전이적에 '골인'했다. 박지성은 이적 초반 아인트호벤 홈팬들에게 비난 세례를 받았으나 훌륭하게 극복했다. 최근 최강희호에 승선한 김남일도 엑셀시오르에 진출해 정교한 침투패스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이밖에 설기현은 벨기에 명문 안더레흐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뒤 잉글랜드 울버햄튼으로 이적해 프리미어리그 승격를 겨냥했다.

유럽 클럽들이 잇달아 방한했던 피스컵은 그 성격이 어떻든, 축구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했다. 박지성, 이영표가 속한 아인트호벤을 비롯해 올림피크 리옹(프랑스) 등 유럽의 쟁쟁한 팀들이 초청됐다. 필립 코쿠, 아르옌 로벤, 데니스 롬메달 등이 박지성의 팀 동료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밖에 김호곤 체제로 출발한 올림픽대표팀은 이듬해 아시아 예선서 전승을 기록하며 아테네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았다. 

서영원 기자 sports@xportsnews.com

[사진=축구대표팀 ⓒ 엑스포츠뉴스 권태완,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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