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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P]'전설이 된 0-122 패배'…그 후 15년의 이야기

기사입력 2013.05.02 17:06 / 기사수정 2013.05.03 20:33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야구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경기가 있다. 바로 0-122 패배라는 경이적인 스코어가 나온 일본 고교야구 경기다. 대패의 주인공은 후카하라 고교다.  

마쓰자카가 등장한 1998년 그 해

1998년 일본은 떠들썩했다. 록그룹 '엑스재팬'의 멤버 히데가 사망했고 축구에서는 첫 월드컵 진출, 야구에서는 마쓰자카가 등장하며 일본 열도는 유난히 들썩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98년 그 해에는 고교야구서 0-122라는 믿을 수 없는 스코어가 나왔다. 당시 경기는 여름 고시엔으로 불리는 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 아오모리현 예선 1차전이었다. 후카하라 고교의 상대는 히가시오쿠 고교였다. 히가시오쿠는 고시엔 진출 경험이 있으며 꾸준히 야구부를 운영했던 학교다. 사회인야구, 독립리그 선수 등을 배출했다.

패전의 주인공 후카하라 고교는 전교생이 100여명을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작은 학교였다. 1998년 당시 야구부원은 10여명 남짓이었고 부원 전부가 야구를 거의 해본적 없는 '초짜'들이었다. 현격한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경기는 시작됐다.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지 못한 후카하라 고교 선수들이 번갈아가며 투수로 올라왔고 끝내 0-122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패했다. 여기까지는 왠만한 야구 팬이며 아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0-122 패배 이후 후카하라 고교는 어떻게 됐을까.

경기 후 쏟아진 다양한 논란

이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언론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후카하라 고교에 박수를’과 같은 동정의 시선이 있었던 반면 ‘대회 참가 제한을 둬서 약팀의 출전을 배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상대인 히가시오쿠 고교에 대해서는 ‘상대를 조롱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칭찬도 이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전력이 약한 고교의 참가 제한은 아니지만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5회 15점, 7회 10점'이라는 콜드 규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경기는 히가시오쿠 고교의 1회 공격에만 57분이 소요됐으며 타자들은 한 이닝에 4타석이나 나서는 진기록도 썼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지역방송은 예정된 2시간 동안 2회를 다 채우지 못하고 정규방송으로 전환했다.

지난 2001년에는 일본 중학교의 한 교과서에 이 경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학교를 칭찬하는 내용이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하지만 기록적인 대패를 당한 후카하라 고교에는 경기가 끝난 이후 수 년이 지나도록 조롱과 격려의 양반된 내용을 담은 편지가 배달됐다. 야구부 폐지의 목소리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더 뭉쳐야 한다는 의견이 양립했다.

시대의 흐름 그리고 위기

일본 수필가 카와이 류스케는 1998년부터 후카하라 고교를 주목했다. 후카하라 고교의 성장 과정을 담았고 역사적인 첫 승의 순간을 지켜봤다. 그는 이후 ‘0-122, 후카하라 고교의 청춘들’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썼다. 후카하라 고교는 2003년에서야 첫승을 거뒀다. 상대는 5년 전 후카하라 고교와 별 차이없는 팀. 류스케는 “누가 덜 못하나의 대결”이라며 경기 수준이 낮았다고 말했다.


2007년 후카하라 고교는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저출산 흐름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정원이 적은 학교는 통폐합됐다. 이와 함께 과거와 견줘 고교 클럽활동 자체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후카하라 고교는 전교생 100명을 채우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근처 모쿠조쿠 고교의 분교가 됐다.

2007년 야구판 '슬램덩크'

야구부 폐지가 논의됐으나 도노사키 타다히코 교장의 노력으로 간신히 무마됐다. 신입부원 유치가 가능했고 제자를 야구부 감독으로 직접 스카우트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도노사키 교장은 과거 히로사키 실업고교를 고시엔으로 이끈 감독 출신 교사다. 당시 제자 후니스케를 야구부 감독으로 영입했다. 투타 겸업했으며 1996년 고시엔에서 주목받던 스타였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각본이 써지고 있었다.

엘리트 출신 감독에 형편없는 실력의 선수들이 모였다. 야구부 인원은 10여년 전 10명에서 13명으로 소폭 증가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한시간 동안 특훈을 실시했다. 후카하라 고교는 그동안 0-122 급의 대패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20점차 수준의 패배는 밥먹듯이 했다.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공격력이 뒷받침되면서 부터다. 수필 ‘후카하라 고교의 청춘들’에 의하면 후니스케 감독은 “야구팀에게 첫 득점, 첫승은 매우 중요하다. 첫 득점은 내게 큰 감동을 줬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지역대회에서 여전히 패배를 되풀이하기는 했지만 눈에 띄게 점수 차가 줄어들었다. 기적의 시작은 고교야구의 강호 아오모리 공고를 꺾으면서부터. 아오모리 공고는 지역을 대표하는 스타군단이었다. 야구부원이 34명이나 됐고 응원단도 밴드를 포함해 800명 규모의 강팀이었다. 후카하라 고교의 후니스케 감독은 당시 경기 시작 전 한마디를 남겼다. “열심히 해 왔다. 즐기고 와라. 자멸하지 않으면 이긴다.”

야구부원 13명이 고작인 야구부 감독의 당돌한 발언이었다. 이변은 그렇게 시작됐다. 1회 1점, 2회 2점을 내며 이상기류가 형성됐다. 6회 2실점하며 3-2로 따라잡혔지만 7회 쐐기를 박는 2루타를 터뜨리며 다시 5-2로 달아났다. 9회 5-4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위기였다. 원아웃 만루 상황. 안타를 내주면 역전패, 외야 플라이면 동점을 허용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후카하라 고교의 투수 마스토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죽을 뻔했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변화구가 외야 플라이로 연결됐다. 3루 주자가 자연스레 태그업을 강행했지만 후카하라 고교의 중계플레이로 홈에서 아웃이 됐다. 그대로 경기 종료. 후카하라 고교는 2007년 7월 11일 공식전 첫 승리의 감격을 누렸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와 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후카하라 고교는 다음 라운드에서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전 사카모토 하야토를 배출한 코세이 학원을 만나 5회 0-11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그들은 여전히 달린다

아오모리 공고를 꺾은 1라운드 승리 소식이 0-122 패배를 당했던 선배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후카하라 고교의 한 선배는 “사실입니까?”를 연발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담은 ‘후카하라 고교의 청춘들’은 일본에서 2,3년 주기로 새로운 소식을 더해 출간되고 있다.  

2011년에는 일본의 한 가수가 0-122 패배를 당한 후카하라 고교 선수들을 뮤직비디오로 제작해 화제가 됐다. 이들은 회사원, 일식 요리사 등의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후카하라 고교 야구부에서 2007년의 영광을 찾을 수는 없다. 학생 수는 더욱 줄었고 야구부 운영이 쉽지 않다. 대회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근처 학교들도 폐교되는 빈도가 높다. 0-122 패배의 주인공들은 결과만 기억됐을 뿐 그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기억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쿠하라 고교 야부부원은 지금도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영원 기자 sports@xportsnews.com

[사진=고시엔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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