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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버리고 ‘인기’ 얻은 日롯데 역사

기사입력 2012.05.15 10:38 / 기사수정 2012.05.15 10:38

서영원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장훈(張本勲), 김경홍(金田正一), 백인천(白仁天), 김성근, 이승엽까지 한국 야구 역사에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점이 있다. 바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지바 롯데 마린스(전신 포함)에 몸 담았던 것. 이들은 선수, 지도자로 족적을 남기며 한국인에게 친근함을 남겼다.

한국 선수를 통해 자주 알려진 동시에 독특한 응원까지 유명세를 타게 된 지바 롯데는 70년이 넘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팬을 보유했다. 조용하고 격식을 차리는 일본인들은 지바 롯데의 응원을 가르켜 ‘일본제일 응원’으로 칭하고 있다. 경기 내내 점핑과 구장이 울리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12개 구단 중 단연 최고봉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바 롯데가 많은 인기와 팬들을 얻은 건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팀 창단 후 절반 이상의 시간을 욕심으로 허비하며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한 기업이 오랜 시간 운영해 왔지만 명칭이 가장 많이 바뀐 팀, 그리고 떠돌이 구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 않다.

4번의 연고 이전, 떠돌며 홈경기를 치러본 구장만 두 자릿수인 지바 롯데는 ‘집시 구단’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 만큼 인기도, 정착지도 없었다. 야구단 보다 ‘유랑단’에 가까웠던 지바 롯데는 지금은 도쿄 남서부 지바(千葉)현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지바의 혼을 담은 구단이라는 평까지 받고 있는 그들의 성공 스토리는 무엇일까.




- 40년간 이어온 도쿄 진입의 꿈


지바 롯데의 전신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창단한 ‘마이니치 오리온스’다.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창단 초 모기업의 라이벌 관계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신문)와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신문)의 반발이 심해 태평양리그 창설(현 퍼시픽리그) 주체로 프로야구에 뛰어 들었다.

특히, 요미우리가 가장 반대했다. 내막은 모기업 경쟁사인 점도 있지만 마이니치가 도쿄 연고 진입을 목표로 해 연고권 침해를 이유로 들었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은 도쿄인근 수도권 구독률에서 요미우리에 밀려 시장 확장을 위해 야구단 창단으로 인지도 상승을 노렸다.

태평양리그로 야구단 운영을 시작했지만 성과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당시 도쿄에는 고라쿠엔(현 도쿄돔)과 메이지신궁(야쿠르트 사용) 구장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기존 요미우리와, 프로야구에 진입한 세네타스 도큐(현 니혼햄 파이터즈)까지 한 지붕 세 가족으로 공동 연고를 꾸리게 된다.

요미우리를 제외한 두 팀의 흥행은 처참했다. 특히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요미우리의 입김에 많은 불리함을 떠안았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도 요미우리의 힘은 막강했다. 일본프로야구 기구를 좌지우지하는 요미우리는 경기 일정에 우대를 받았다.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2군 경기가 아님에도 주중 낮 경기를 펼쳐야 했고 주말엔 아침 혹은 늦은 밤에 경기를 소화했다.

이렇게 1950년부터 12년간 불편한 동거 생활이 지속되던 도중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1964 도쿄올림픽 개최가 확정돼 신축 구장을 얻게 됐다. 마이니치 역시 자본금을 투입해 구장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명칭은 도쿄 스타디움으로 현재는 사회인 야구, 고교야구 경기가 열리는 곳으로 남도쿄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한 지붕 다가족’을 벗어난 마이니치에게 한줄기 희망이 생기는 듯 했지만 너무 섣부른 정책이 화를 불렀다.

당시 팀명에 연고지를 기입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마이니치는 도쿄 오리온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대다수 지역색이 강한 일본은 특성상 지역 대표를 언급 하는 것을 삼가는 편이다. 지역 대표란 예선전을 뚫은 고교 야구, 축구 팀에게만 허락된 자부심으로 인기 없고 성적 나쁜 마이니치 오리온스가 함부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도쿄 사람들은 정작 가만히 있는데 인기 없고 욕심 부리는 마이니치가 “우리가 도쿄 대표구단”으로 북치는 모습으로 그나마 있던 팬들도 발길을 끊었다. 관중 수는 평균 3천~4천명대로 3만에 가까운 인원을 수용하는 홈구장이 무안할 정도로 텅텅 비었다. 게다가 요미우리의 저격 보도, 성적 하락과 맞물려 마이니치는 구단 매각을 선언했다.

입찰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기업은 롯데다. 팀명은 ‘롯데 오리온스’로 변경됐다. 하지만 프로야구단 경영에 무지한 롯데는 인수와 함께 경영진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운영 모체는 바뀌었지만 끝까지 겉절이 지역 연고 정책이 먹힐 리는 없었다. 지역민에게 다가가는 손길 없는 구단의 ‘무’인기는 여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운영진이 고심 끝에 뽑은 카드는 연고 이전이었다.





- ‘연고이전’, ‘전국구 구단’ 표방

롯데 오리온스는 기존 도쿄스타디움이 재계발로 폐쇄되는 것을 빌미로 구장을 도쿄도 관할로 완전히 넘겼다. 또, 1972년 새로운 연고지 도호쿠(東北) 지역 거점인 센다이로 옮겼다. 하지만 운영진의 ‘기발한 상상’이 시작됐는데 바로 ‘전국구 구단’이었다. 센다이를 미야기 구장(현 라쿠텐 골든 이글스 홈구장)을 홈으로 하지만 경기는 1년 20회 내외였다. 전 연고지 도쿄와 수도권 팬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메이지 신궁, 고라쿠엔, 가와사키에서도 각각 30회 가량의 경기를 치뤘다. ‘집시 구단’이라는 별명도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롯데 오리온스 경기엔 원정 팬만 가득 찼고 그들을 응원하는 홈팬들은 찾기 힘들었다. 롯데 오리온스는 현재 축구의 ‘갈락티코’라 불리는 스타군단 구축에 목을 메며 팀이 아닌 특정 선수만 응원하는 팬들만 다수 존재했다.

연고지인 센다이는 초반엔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유지되진 않았다. 구단 숙소, 사무실, 훈련장 등을 도쿄에 둔 채 홈경기를 위해 ‘출장’ 오는 팀을 곱게 볼리는 없었다. 선수들 역시 홈경기 같지 않은 홈경기를 치르다 보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에이스 투수던 나리타 후미오는 “유랑단인지 야구단인지 구분 할 수 없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일본프로야구 기구는 구단으로 애매한 입지와 비즈니스적 가치가 없다고 느낀 구단간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여러 차례 구단 합병을 요구했지만 롯데 오리온스 운영진의 전국구 구단 표방은 계속됐다.

기이한 행보 도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이다. 당시 일본시리즈 진출한 롯데 오리온스는 일본프로야구 기구의 홈에서 개최하라는 지시를 교묘히 피해 도쿄에서 시리즈를 치렀다. 그들의 변명은 ‘가급적 일본시리즈는 3만이상의 구장에서 치러야한다’는 촉구사항을 내세운 것. 센다이 구장은 2만 8천명 수용의 규모로 롯데 오리온스는 도쿄에서 개최를 결정했다. 센다이 시민들은 ‘배신 롯데’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롯데 오리온스는 우승퍼레이드, 파티를 도쿄에서 진행하며 철저히 연고지역을 무시했다. 1974년 약 80만명 관중 동원한 롯데 오리온스는 1975년 약 60만명으로 큰 폭 관중 감소가 찾아왔다. 이는 더블헤더를 이용해 교묘히 ‘뻥튀기’한 수치이며 실 관중 수는 더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 분산 개최를 지속적으로 이어온 롯데 오리온스는 1977년 다시 도쿄인근 수도권 진입을 노렸다. ‘다이요 웨일즈’(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가 기존 구장에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하는 것을 빌미로 빈구장을 사용하겠다는 롯데 오리온즈는 결국 가나가와현 가와사키(도쿄남서부 위성도시)로 연고이전을 결정했다. 센다이 시민은 소소한 볼거리를 뺏는다는 명목 하 반대 운동도 일어났다. (현재 센다이는 라쿠텐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소수의 지바롯데 팬과 다수의 안티 지바롯데 팬이 존재한다.) 롯데 오리온스의 센다이 마지막 홈경기에서는 물병, 욕설이 난무해 당시 팀 내 기둥 김경홍이 직접 팬에게 사과하지만 운영진은 “도쿄로 돌아갈 수 있어 좋다”며 그들의 이별은 좋지 않게 끝났다.





- 수도권 재진입 실패 운영진 교체

가와사키로 이전한 롯데 오리온스는 센다이에서 행했던 행태와 크게 다를게 없었다 연고지 구장에선 20-30번의 경기가 전부였고 도쿄일대에서 계속 경기를 치렀다. 간혹 센다이도 포함됐다. 지지층은 높지 않았지만 구단의 정체성, 발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선수들도 구단을 신뢰하지 못했고 팬 역시 “우리 팀은 뭘까”라는 혼란이 오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또 다시 연고 이전을 추진해 도쿄 북부 사이타마로 계획하지만 모기업의 롯데 오리온스 완전 인수(이전은 마이니치와 주식분할 소유로 공동운영)와 더불어, 운영진 무능을 이유로 전격 교체했다. 그리고 1991년 롯데 오리온스는 지바로 완전 연고 이전을 실시했다. 또 그간 집시 오명을 씻고자 지역 연고 정착 선언을 한다.

- 지바 정착 그리고 성공

지바에 정착한 롯데 오리온즈는 그간의 떠돌이를 통해 얻은 것은 ‘12구단 최저 인기팀’, ‘정체성 없는팀’ 등이었다. 교체된 운영진과 모기업은 상승 발판을 마련하고자 일반 팬에게 팀명을 공모 지금의 이름인 지바 롯데 마린스로 변경하게 된다. 마스코트, 유니폼, 구단 휘장등을 전면 교체하며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지바 롯데는 관중 수 130만명을 유도하며 화려한 출발을 시작했다.

성적 부진에 따라 관중수가 오르락 내리락 했으나 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매직과 함께 일본 시리즈 우승과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성적이 제대로 받쳐주기까지 하니 관중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같은 원인에는 교체한 운영진도 있었다. 프로야구기구에 비협조적이고 고집이 강했던 운영진이 물러나고 구단 운영에 정통한 관계자, 각 분야 마케터들을 끌어 모아 재도약을 꿈꿨다. 기존 홈구장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행태도 버렸다. 연간 3연전 정도 센다이, 도쿄돔, 가와사키 등 구장에서 실시했지만 2005년, 지바현 밖 지역에선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도쿄돔 경기만 남겨둔 채 모두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개최하고 있다.(지바와 도쿄돔을 출퇴근 하는 팬들을 위해 ‘도쿄돔 직장인 데이’라는 이름으로 개최중이다.)

00년대 진입 후 ‘야구장의 공원화’라는 이름으로 지역 연고 마케팅을 실시했다. 지바현 내 모든 철도에는 지바 롯데의 응원가로 전철의 도착을 알렸고, 소규모 점포 업자와 협력을 통해 지역 연고 정착을 강화 했다. 팬클럽 이름도 1군 등록 선수 25명 다음의 선수라는 의미로 TEAM26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년에 2차례씩 ‘360도 좌석’이라는 이벤트를 실시해 전좌석 자유석을 실시했다.

처음 지바현 관계자들은 또 어디론가 떠날 것이라는 판단으로 지원에 소홀했지만 차츰 지원의 강도를 높여 지바현-지바롯데는 파트너의 관계가 됐다. 현재 지바롯데는 “12개 구단 중 가장 열정적인 팀”, “지역연고에 성공적인 팀”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지바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 지바 롯데 유랑史의 교훈

지바 롯데는 지바 연고지 이전 4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다른 팀에 ‘흡수되라’는 권고를 받았었다. 하지만 지바 연고지 정착 후에는 2004년 야구리그 재편성 문제(킨테츠 버팔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가 발생했을 땐 지바 롯데가 부실 팀을 ‘흡수해라’라는 추천을 받을 정도로 구단 운영이 튼실해졌다.

일본 유명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의 수필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를 통해 “지바 롯데의 집시 놀이는 눈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며 거친 문장으로 비난했었다. 또 그는 “지금은 11개 구단이 모두 부러워하는 문화를 가졌다”며 지바 롯데가 ‘갱생’하였음을 언급했다.

지바 롯데의 성공 사례는 2000년대 중반까지 도쿄돔 ‘샛방 살이’를 하며 평균 관중 1만명도 모으지 못하는 니혼햄에 큰 영감을 주었다. 니혼햄은 직간접적으로 지바롯데의 자문을 활용해 삿포로 연고이전을 단행했고 도쿄 욕심을 버리고 성공한 두 번째 구단이 됐다.

70년이 넘는 일본프로야구는 구단의 욕심, 이해관계, 연고지 개념 등으로 진통을 겪어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됐다. 지바 롯데의 욕심을 내려놓고 성공한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줬다. (1) 스포츠는 지역 연고에 충실해야한다 (2) 팬서비스는 밖으로 뻗는게 아닌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3) 구단간 동업자 정신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애시 당초 지바롯데가 꿈꿨던 ‘전국구 구단’이라는 것은 다양한 지역에서 경기를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었다. ‘전국구 구단’은 꾸준한 실력과 오랜 시간 묶어야 나오는 결과물이다. 지금 지바 롯데는 밖으로 뻗는 정책 없이 지바팬을 위한 서비스만 실시하고 있다.

‘전국구 구단’을 지향하는 요미우리(모기업을 활용한 전국중계활성화, 홈경기 분산 개최)는 反요미우리 전선을 형성 시키며 인기 못지않은 질투를 겪고 있다. 결과론 적으론 요미우리의 정책은 성공이지만 ‘독재’, ‘악마’라는 이미지도 적잖게 얻고 있다. ‘전국구 구단’이라는 것은 요미우리처럼 확실한 지원 체제 없이는 달성하기 어렵다.

애매한 욕심을 부렸던 지바 롯데는 ‘흑역사’에서 ‘전성기’로 전환 됐다. 또, 일본 내 스포츠 마케팅에 크게 활용 되고 있다. 이는 일본만의 사례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 내수 시장 확대로 인한 리그 팽창 땐 참고할 좋은 사례가 될 듯하다. 이기심, 욕심을 버리고 우리 지역, 우리 팬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지바 롯데는 역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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