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2011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다가오고 있다. F1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며 경기 안팎으로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즌은 F1계의 ‘FC바르셀로나’(축구) 혹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야구) 라고 불리는 레드불 레이싱이 싹쓸이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세바스티안 페텔과 마크 웨버의 천재적인 드라이빙 능력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머신RB7을 설계한 테크니컬 디렉터 아드리안 뉴이(Adrian Newey, 영국, 53세)를 찬양한다. 공기역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뉴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출처: 레드불 레이싱 공식 홈페이지>
우주개발 예산 축소 천재는 레이싱의 길로
뉴이는 1958년 영국 스트랫포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물리학, 수학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향후 영국의 우주탐사 개발에 앞장설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뉴이는 사우스햄튼 대학 항공우주공학을4년 수석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뉴이가 대학을 졸업하던1980년은 냉전시대로 강대국들의 우주개발이 한창이던 때였다. 하지만 영국은 적은 예산과 경제난으로 왕립과학기술원의 계획에서 우주개발 예산이 축소되었다(영국은 현재까지도 공학(Engineering)보다 순수과학(Science)에 초점을 두고 있다). 뉴이는 왕립과학기술원 입사가 예정됐으나 취소 후 레이싱에 입문하게 된다. 이유는 교수의 추천 때문이었다. 유체역학에 포함되는 공기역학 수업을 듣다 앞으로는 자동차에 공기역학이 쓰일 것이라는 강력추천이 따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왕립과학기술원의 예산 축소는 F1을 비롯, 자동차 디자인의 큰 변화를 불러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조언을 수식으로 바꾼 사나이
1981년 3월 피티팔디(Fittifaldi) 산하 유럽F2레이싱팀인 하비 레이싱(
Harvey Postlethwaite)에서 막내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뉴이는 팀 드라이버인 알베르토 조니 세코토(베네주엘라 출신의 2륜과 4륜 레이스 출전 경험이 있는 레이서)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2륜과 4륜 레이스 모두 경험한 세코토의 조언은 뉴이를 한층 더 성장시키게 했다. 세코토와 뉴이는 절친한 사이로 서로에 대해 조언해주곤 했다.
여기서 뉴이의 천재성이 나타나게 된다. 세코토가 연습주행을 하고 나면 “어떤 코너에서 바람을 더 받는다는 느낌이랄까?”라는 말 한마디면 뉴이는 디자인을 주시하며 역학적 공식을 대입해봤다.
<사진설명: 뉴이가 첫 디자인 하였던 월GTP 스포츠카, 출처: F-1공식홈페이지>
말을 수학적 수식으로 바꾸는 뉴이의 정확도는 뛰어났고 이 시기 둘은 유럽F2 12라운드 중 8번이나 싹쓸이하는 진가를 드러낸다. 뉴이는1986년 당시 엔진 성능에만 목숨을 걸었던 인디카500(인디에나폴리스500 레이스F1과 달리 섀시, 타이어, 엔진등 개발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의 대회 테크니컬 디렉터로 진출하게 된다. 뉴이는 추후 개발 제한이 덜했기 때문에 진출했다고 밝혔다. 인디카에서 바비 라할(인디카500출신 드라이버 전 재규어F1레이싱 회장)과 함께 인디카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이전 디자인과는 다른 혁신적인 디자인이 등장하였고 1980년대 인디카의 인기는 F1과 비등하였다. 실제 머신 스펙 도F1과 동등한 위치를 가졌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당시 세계 자동차 분위기는 안정감과 승차감을 추구하는 바람이 일어 비판도 많이 받게 되었다. 1980년대는 레이싱 기술이 짧은 시간 내 상용차에 적용됐는데, 뉴이의 인디카 디자인에 적용했던 기술은 스피드만 생각할 뿐 안정성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때문에 전체적인 인디카 레이스 머신들의 성능을 F1과 동급으로 향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시장의 흐름에 뉴이는 해고를 당하게 된다.
본격적 F1 디자이너의 길 그리고 아일톤 세냐
1990년 뉴이의 나이는32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F1 윌리암스 레이싱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파격 임명됐다. 당시 윌리암스에는 브라질의 F1 ‘펠레’라고 불리는 아일톤 세냐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1992년 윌리암스는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오르고 머신 디자인의 중점은 차체를 낮게 하여 지면에 거의 닿는듯한 외관이었다.
<사진설명: 뉴이가 설계했던 AUG-10의 사고장면 출처: 유투브 캡쳐>
뉴이의 디자인에 뒤따라 타 팀들도 납작한 머신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운명의 1994년을 맞이하게 된다. 아일톤 세냐는 산마리노 그랑프리 본선 도중 사망하게 이르렀고 뉴이 역시 책임을 면치 못했다. 뉴이는 자체 팀 징계로 2년간 백수 상태로 돌입했고 이 시기 세냐에 대한 죄책감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가시밭길 디자이너 활동 그리고 레드불과의 만남
세냐의 죽음 이후 맥라렌으로 옮긴 뉴이는 미카 하키이넨(맥라렌 소속1998,1999 연속3위)와 당시 하위권이던 맥라렌을 순위권으로 올리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잦은 리타이어와 복권과 같이 오락가락하는 순위는 맥라렌 수뇌부를 불쾌하게 하였고 또다시 해고를 당하게 된다. 전문가들로부터 “뉴이에게 믿음을 줄 팀과 그의 앞서가는 머신을 소화할 드라이버가 필요하다”라는 평가를 받던 뉴이는 세계적 음료 회사인 레드불로부터 파격적인 제안을 받게 된다.
레드불의 회장 디트리히 마테쉬츠는 F1의 광팬으로 F1 출전을 꾸준히 노렸다. 단기적으로 빠른 향상을 시킬수 있는 대안으로 뉴이를 선택하게 된다. 연간 1000만달러, 당시 환율로 130억을 제시하고 “당신 하고 싶은데로 하시오”라는 말과 함께 레드불에 입성하게 된 뉴이는 레드불 창단 디렉터로 시작했다. 그가 이전부터 생각해오던 하향식 배기, 리어윙 움직임, DRS시스템의 고안으로 이어지며 F1의 중흥기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레드불은 뉴이를 중심으로 엔진 선택, 디자인 등 모든 것을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점차 그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06년 컨스트럭터 포인트 16점을 얻는데 그친 레드불은 2007년 24점, 2008년 29점 그리고 페텔과 함께한 2009년에는153점을 얻는 폭발적인 성능 개선을 만들어 냈다. 2010년498점으로 압도적 우승을 자치한 레드불은 2011년 현재 451점을 얻고 있다.
<사진설명: 비디오게임 런칭행사에 참여한 뉴이, 출처: 레드불 공식홈페이지>
레드불과 함께한 이후 뉴이는 자신의 컨스트럭쳐 포인트를 매년 초과 경신하고 있으며 그가 초창기부터 추구하던 드라이버의 조언을 듣는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인 활동으로 게임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비디오게임인 ‘그란투리스모’와 ‘F1’시리즈에 직접적인 개발에 참여하며 게임의 현실성을 높이고 있다.
2010년 미 항공우주국(NASA)와 레드불 레이싱의 역학 부문 교류에 의해 뉴이는 NASA의 특별강연을 벌이기도 한다. 뉴이의 디자인은 현재 다른 사람은 따라 갈수 없는 디자인이라는 평을 듣고 있으며 공기역학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할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아드리안 뉴이의 전문 분야 – 전산 유체역학F1 머신 개발에 있어서 공기의 흐름 제어하고 접지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뉴이가 적용할 당시 타 머신에 비해 공기저항을19% 가까이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이가 설계한 챔피언에 오른 머신
•1992- 윌리엄스 FW14B– 전산유체역학 적용
•1993- Williams FW15C1993- 윌리엄스 FW15C–
•1994- Williams FW161994- 윌리엄스 FW16-
•1996- Williams FW181996- 윌리엄스 FW18- 브레이크 냉각 시스템
•1997- Williams FW191997- 윌리엄스 FW19– 프론트 윙 양력 개선
•1998- McLaren MP4/131998- 매클래런 MP4/13–
•2010- Red Bull RB62010- 레드불 RB6– 하향식배기, 리어윙 개선, 카본 리버 디뷰져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