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삼성 라이온즈 선발투수 원태인과 이승현. 인터뷰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원영 기자
(엑스포츠뉴스 최원영 기자) 별안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됐다. 기꺼이 받아들였다.
삼성 라이온즈 선발 에이스 원태인(24)은 최근 후배 투수 이승현(22)과 한 가지 내기를 했다. 올해 프로 4년 차로 첫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이승현이 규정이닝(144이닝)을 달성하면 명품 가방을 사주기로 했다. 이후 이승현의 마음이 바뀌어 품목이 겨울 패딩이 됐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두 사람을 함께 만났다.
이승현은 "내가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았다"며 "(원)태인이 형이 돈을 많이 벌지 않나. 선한 영향력이라 생각한다"고 미소 지었다. 올 시즌 원태인의 연봉은 4억3000만원, 이승현은 7000만원이다.
원태인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알고 보니 이승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내야수 김영웅(21), 이재현(21) 등도 줄을 섰다. 원태인은 "애들이 나만 보면 '형 저는 왜 내기 안 해줘요?', '저한텐 왜 안 걸어줘요?'라고 한다. (김)영웅이에겐 이미 현금을 뜯겼다. (이)재현이도 곧 조건을 달성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이종열) 단장님께서 나무 대신 숲을 보라고 하셨다. 팀이 잘하면 좋은 것 아닌가"라며 "큰손으로서 삼성 라이온즈라는 팀에 투자하고 있다. 사실 애들이 잘하면 나도 정말 기쁘다. 그래서 웬만하면 해달라는 것 다 해주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후배들의 보답은 없을까. 이승현에게 본인이 선물하는 것으로 내기를 하나 걸어보라고 권유하자 "태인이 형은 뭘 걸든 다 해낼 것 같다. 그래서 말을 못 하겠다"며 딴청을 피웠다.
다음은 원태인, 이승현과의 일문일답.
-둘이 내기를 시작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이승현: 내가 하자고 했다. 하나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형이 돈을 많이 벌지 않나. 후배들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 좋을 듯해 말한 것이다.
-규정이닝을 채우면 명품 가방을 받기로 했는데, 다시 겨울 패딩으로 바꿨다고 들었다.
▲이승현: (시즌을 마치면) 겨울이라 패딩으로 정했다. 물론 겨울옷은 있지만 예쁜 패딩이 있으면 하나 사달라고 할 것이다.
▲원태인: 요즘 다른 애들이 나만 보면 '형 저는 왜 내기 안 해줘요?', '저한텐 왜 선물 안 걸어줘요?'라고 물어본다. 단장님께서 나무 대신 숲을 보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삼성 라이온즈라는 팀에 투자를 하고 있다. 팀이 잘하면 좋은 것 아닌가. 큰손으로서 투자하면 다 내게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또, 애들이 잘하면 나도 정말 기쁘다. 웬만하면 해달라는 것 다 해주고 있다.
왼쪽부터 삼성 라이온즈 선발투수 원태인과 이승현. 인터뷰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원영 기자
-이승현 외에 다른 선수들은 어떤 조건을 걸었나.
▲원태인: 영웅이가 130타수 안에 홈런 3개를 친다고 했다. 그런데 한 50타수 만에 해내더라(20일 기준 170타수 11홈런 기록 중). 그래서 현금을 뜯겼다. 재현이는 130타수 내에 홈런 5개를 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112타수인데) 4홈런이라 1개 남았다. 얘는 비싼 헤드셋을 사달라고 하더라.
-이재현도 억대 연봉자인데(1억4000만원).
▲원태인: 내 말이 그 말이다. 작년 겨울부터 뜬금없이 '뭐 안 사줘요?'라고 하더라. 갑자기 '형 저 신발 안 사줘요?'라며 명품 신발을 사달라고 했다. 내가 '오잉?', '엥?' 등의 반응을 보이자 올해 스프링캠프 때 헤드셋으로 바꿨다. 그러더니 혼자 '오케이, 한 발 물러날게요. 내기 걸어줘요'라고 하길래 그냥 알았다고 했다.
(이)승현이는 라커룸에서 바로 옆자리를 쓰는데 '형 저도 내기 걸어주세요'라고 해서 그냥 규정이닝으로 정해준 것이다.
▲이승현: 나도 영웅이에게 소고기 한 번 사주기로 했다. 요즘 너무 잘하고, 내가 등판한 날도 잘 쳐줘 고마워서다.
▲원태인: 장어를 사줬는데 홈런을 쳐주니 기분 좋더라. 그래서 자꾸 해주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애들이 내가 등판한 날 평범한 안타 하나 치고도 '뭐 안 사줘요?'라고 한다. 무난한 내야 땅볼을 처리하고도 그런다. 진짜 물주가 돼버렸다. 나도 형들에게 정말 많이 얻어먹었기 때문에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쓰고 있다.
-이승현은 원태인에게 내기를 걸어 해주고 싶은 것 없나.
▲이승현: 뭘 걸든 다 해낼 것 같다. 그래서 말을 못 하겠다. 솔직히 형은 너무 잘한다.
-평소 원태인의 투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이승현: 진짜 멋지다. 타자들에게 맞을 것 같지 않다. 위기 상황도 잘 막아낸다. 솔직히 정말 잘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원태인: 영혼 없는 거 다 보인다.
▲이승현: 진짜 진심이다.
-원태인에게 배우거나 물어보고 싶은 것은.
▲이승현: 많다. 난 1~2회에 늘 투구 수가 많은데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형을 보고 배워야 할 것 같다. 형이 운동하는 것도 옆에서 관찰하는 중이다. 예전에 체인지업에 관해 열심히 물어봤는데, 그때 형이 알려준 것을 바탕으로 요즘 체인지업을 계속 구사하고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바꿔가며 던지니 좋더라.
왼쪽부터 삼성 라이온즈 선발투수 원태인과 이승현. 인터뷰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원영 기자
-원태인은 올해 발전한 이승현의 투구를 보면 어떤가.
▲원태인: 엄청 기특하다. 선발투수가 하고 싶어 스스로 보직을 바꿨는데 그만큼 준비를 잘한 것 같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많이 아쉬웠다. 중학교 때부터 봐온 결과 좋은 재목인데 능력을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옆에서 잔소리를 많이 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하는 듯하다. 자리 뺏기지 않게 잘했으면 좋겠다.
-이승현이 등판한 경기 도중 원태인이 조언해 주는 모습도 봤다.
▲원태인: 맞다. 귀담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벤치에서 보며 느낀 점들을 한 번씩 말해준다. 경기가 팽팽하게 이어지다 타선의 득점 지원으로 점수 차가 벌어지면, 투수의 집중력은 다소 떨어진다. 타자들이 점수를 내준 뒤 다음 이닝에 흔들리곤 한다. 그래서 홈런 맞더라도 스트라이크 던질 수 있는 공, 자신 있는 공으로 피하지 말고 공격적으로 승부하라고 했다. 하지만 바로 볼넷을 허용하더라.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것이다. 실망했다.
▲이승현: 아니다. 잘 들었는데 스트라이크가 안 들어간 것이다.
-지금의 이승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궁금하다.
▲원태인: 생각보다, 기대했던 것보다 성장하는 데 오래 걸린 것 같다. 데뷔 시즌 첫 등판의 강렬함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는데 이제 선발투수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까지 왔다. 욕심내지 말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첫 두 시즌은 성적이 안 좋았지만 부상 없이 꾸준히 로테이션을 돌다 보니 그 시간이 밑거름이 됐다.
지금 승현이는 정말 잘 던지고 있다. 더 잘하려 하지 말고, 부담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늘 말했듯 부담감은 내가 안겠다. 승현이나 (이)호성이 등 후배들은 그냥 편하게 투구했으면 한다.
▲이승현: 잘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이승현: 아, 이런 거 잘 못한다. 진짜 못한다. 솔직히 형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언제 밥 한 번 사주셨으면 한다.
▲원태인: 무엇이든 물어보면 다 말해줄 것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왔으면 한다. 근데 내 자리 뺏기면 안 되는데.
▲이승현: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 하지만 형에게 닿기엔 너무 멀다. 형은 저 위에 있다.
사진=최원영 기자
최원영 기자 yeong@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