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이태승 기자)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토트넘 홋스퍼에서 이름을 떨치며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인정받은 미드필더가 있었다.
'그라운드의 모차르트', '발칸의 보석'으로 불린 루카 모드리치였다. 모드리치는 '빅리그'에서 검증받은 적은 없지만 2008년 여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스타로 떠올랐다.
토트넘은 그런 모드리치에게 2250만 유로(320억원)를 그의 전소속팀 디나모 자그레브에 주고 영입했다. 같은 시기 토트넘이 팀의 간판 공격수 로비 킨을 리버풀에게 보내며 2400만 유로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유망주에게 꽤나 거액을 쏟은 셈이다. 킨을 판 돈으로 모드리치에 투자했다.
모드리치는 토트넘에서 총 4개 시즌을 뛰며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미드필더가 됐다. 160경기를 소화하면서 17골 25도움을 기록한 그는 2010/11시즌 구단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는 등 토트넘의 빛나는 선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는 토트넘에 오래 남을 생각이 없었다. 스페인 거함 레알 마드리드가 손짓하자 그는 곧바로 토트넘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2011/12시즌이 끝난 후 모드리치가 토트넘에 있던 시절,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드리치가 전화를 받으니 에이전트는 "지금 앉아 있나"는 질문을 던지며 모드리치가 '벌떡' 일어설만한 소식을 전했다.
레알 마드리드 구단과 당시 레알을 지휘하고 있던 조세 무리뉴가 모드리치를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모드리치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모드리치는 해당 소식을 듣자마자 레알의 흰 유니폼을 입고 뛰는 상상을 하게 됐다.
레알과 토트넘 모두 흰색 유니폼이지만, 두 팀의 위상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상을 휩쓸며 역사상 최고의 구단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긴 레알과 1961년 이후 리그 우승이 없던 토트넘의 격차는 매우 컸다. 모드리치 또한 이를 잘 아는 듯 했다.
게다가 레알은 '스페셜 원' 무리뉴가 지휘하는 구단이기도 했다. 가는 팀마다 우승을 들어올리며 '우승 청부사'로 이름을 드높이던 무리뉴가 직접 모드리치를 원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드리치에 따르면 무리뉴는 직접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루카, 안녕. 훈련 끝나고 전화할게"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무리뉴는 모드리치에게 유선으로 달콤한 말을 전했다. 무리뉴는 "난 네가 좋다. 난 널 믿는다. 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대단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걸 안다"며 모드리치를 회유했다.
그러나 토트넘의 악명 높은 다니엘 레비 회장은 모드리치를 쉽게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전에도 이적을 원했지만 레비가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드리치는 최근 자국 크로아티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토트넘을 떠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며 험난한 이적 사가를 예측했다고 밝혔다. 모드리치는 "레알이 제의한다면 레비가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레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의 예견처럼 레비와 토트넘은 2012/13시즌을 앞두고 미국행 프리시즌 투어 명단에 모드리치를 올렸다. 모드리치를 순순히 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살얼음판 같은 모드리치와 토트넘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레비와 모드리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모드리치는 "협상 과정은 어려웠다"며 "레비는 내게 프로답게 굴라고 지시했지만 나는 미국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을 명확하게 전했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떠난 토트넘을 뒤로하고 모국인 크로아티아에서 시간을 보내기까지 이르렀다. 명백한 스캔들이자 항명이었다.
모드리치의 항명파동 이후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받게 됐다. 미국에서 팀원들과 합류하라는 토트넘 구단의 압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티켓을 곧장 쓰레기통에 찢어 넣었다.
모드리치는 "티켓을 버리는 것이 레비에게 내 뜻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레비는 모드리치와의 대화를 단절했다.
다만 레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여름 내내 혼자서 훈련하던 모드리치에게 연락한 레알의 CEO 호세 앙헬 산체스와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토트넘과의 협상이 진행중"이라며 "참고 기다리라"고 응원했다. 모드리치는 "두 사람의 연락이 당시 내게 큰 힘이 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결국 레비도 모드리치에게서 손을 뗐다. 모드리치는 8월 말 들어 레비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해 8월29일 열릴 2012/13시즌 레알과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슈퍼컵 2차전 참전 의사도 함께 전했다.
레비는 결국 그를 슈퍼컵 이틀 앞둔 8월27일 레알로 보내며 두 사람의 관계는 일단락이 났다. 모드리치는 레알에 합류하자마자 슈퍼컵 2차전 후반 38분 그라운드를 밟으며 레알 데뷔에 성공했다. 레알은 해당 대회서 우승을 거뒀고 모드리치는 스페인에 도착한지 이틀 만에 트로피를 자신의 커리어에 추가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모드리치는 올 시즌까지 레알에서 12시즌을 뛰며 503경기 37골 78도움을 기록하고 있다. 레알과 함께하며 5회의 빅이어와 3회의 라리가 우승, 그리고 2018년에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년간 양분하던 발롱도르마저 수상하며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사진출처=연합뉴스, 매니징 마드리드
이태승 기자 taseaung@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