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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장항준 "박흥숙 사건, 철거 참사의 시작" 장현성 눈물 [종합]

기사입력 2020.11.06 00:10

나금주 기자
[엑스포츠뉴스 나금주 기자] '꼬꼬무' 장트리오가 박흥숙 사건의 진실을 밝혔다.

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장트리오는 장현성, 김동현, 김기혁에게 희대의 살인마들을 언급했다. 장트리오는 다른 살인범에 관해 밝혔다. 1977년 4월, 대낮에 쇠망치로 4명을 죽인 박흥숙이었다. 장트리오는 "우리가 알던 살인범과는 좀 다르다. 그들은 밤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죽였는데, 대낮에 야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범행을 계획하지 않았고, 시신을 은닉할 시도조차하지 않았다. 범행 대상이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다"라고 밝혔다. 박흥숙의 나이는 23세, 별명은 무등산 이소룡, 무등산 타잔이었고, 범행 장소는 무당촌이었다고.


장트리오는 박흥숙이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였다고 밝혔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지만,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진학을 포기했다고. 박흥숙의 여섯 식구는 고향을 떠나 광주로 왔고, 살 집이 없어서 무등산 덕산골로 들어갔다. 움막에서도 쫓겨난 박흥숙은 직접 움막집을 지었다.

박흥숙은 힘든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장항준은 "박흥숙은 국가 정의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지만, 곧 합격할 수 있단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1977년 4월 20일, 박흥숙은 땅굴을 파고 있었다. 장트리오는 "그때 구청 직원 7명이 망치를 들고 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망치 부대라고 불렀다. 흔히 말하는 철거반원이었다"라고 했다. 박흥숙의 집을 철거하러 온 거였다고. 장트리오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케이블카를 설치할 계획이었다"라며 "그리고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 예정이었다"라며 당시 하루라도 빨리 철거를 해야 하는 압박이 있었다고 했다.


장트리오는 "박흥숙은 너무 절박하고 답답해서 철거반원에게 '도대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서 살아야 하냐'라고 물었다. 철거반원은 밖에서 안 보이게 땅 밑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그래서 박흥숙은 땅굴을 파고 있었다"라고 밝혔다.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움막집을 철거했고, 박흥숙은 담담하게 물건을 정리했다. 하지만 철거반원은 불을 지르라고 소리쳤고, 박흥숙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철거반원은 불을 지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때 박흥숙 어머니가 움막 천장에 있는 돈을 가지러 들어가려다 철거반원에게 막혀 실신했다.

장성규는 "그 움막은 집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온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야 했다. 13살 여동생은 식모살이를 했다. 박흥숙은 가족들과 같이 살기 위해 집을 지으려고 한 거다"라고 밝혔다. 김동현은 "집을 불태운 게 아니고, 사실 가족을 불태운 거랑 똑같은 거다. 잘 곳 없으면 어차피 얼어죽는다"라고 했다.

하지만 박흥숙은 오히려 동생을 달랬다. 항준은 "박흥숙은 괴로웠지만 참았다고 한다.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서 동생을 달랬다. 대신 박흥숙은 다른 집들은 불지르지 말라고 또 한번 사정했다. 환자들이 많다고. 그런데 이후 노인들의 움막이 불탔고, 총성이 들렸다. 박흥숙은 총을 들고 '누가 불 지르라고 했어'라고 외쳤다"라고 밝혔다. 산짐승 때문에 쇠파이프로 만든 총이었다고. 


철거반원 5명이 박흥숙을 말리려고 했지만, 박흥숙이 철거반원들을 제압했다. 장트리오는 "도로 흥분한 박흥순이 망치를 휘둘렀고, 4명은 목숨을 잃고 1명은 겨우 살아났다"라고 했다. 장항준은 "우리가 개돼지만도 못하냐고 소리칠 때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게 아닐까"라고 했다.

장성규는 "피해자들은 대부분 구청에서 고용한 일용직이었다. 그분들도 생계를 위해 무등산에 오른 거다. 불까지 지른 이유는 상부의 지시였다"라며 "생존의 최전선에 놓여있는 힘없는 사람들끼리 비극적인 참사를 만들게 된 거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사건 후 신문사에 시청 간부들이 몰려와 '불'이란 단어를 쓰지 말라고 압박했고, 언론에선 박흥숙을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힌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장항준은 "명백한 가짜뉴스"라고 밝혔다. 장트리오는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판잣집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특히 서울에"라고 했다.

사람들은 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을까. 100억 달러 수출이 나라의 목표였던 상황.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판자촌이 형성됐다. 그러던 중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왔는데, 생중계를 할 때 남산 판자촌이 카메라에 잡혔다. 장항준은 "사실 수출이 늘어난 건 그 사람들 덕분이다. 판자촌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해서 수출이 늘고 먹고 살만해졌는데, 좀 먹고 살만해지니까 창피한 거다. 그때부터 도시경관 미화가 시작되고, 재개발이 본격화됐다. 무허가 빈민촌을 철거했다"라고 밝혔다.


강남 개발 초기엔 청와대 경호실이 땅장사를 했다고. 장트리오는 "시세 차익이 당시 20억, 지금 가치로 6,000억 원이었다"라고 밝혔다. 평당 400원이었던 땅은 개발 후 평당 40만 원이 되었다. 16년 만에 1,000배가 상승했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용역 깡패를 동원된다. 

이어 장트리오는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각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를 준비 중에 집이 철거된 사람들의 숫자였다. 인구비율로 보면 서울이 1위였다. 이주민들의 임시천막마저 강제로 철거됐다. 그 옆으로 성화 봉송 주자들이 자나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장도연은 "쫓겨난 사람들은 땅속에 두더지처럼 굴을 파고 살았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당시 영상이 공개됐다. 폭력이 난무했고, 사람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장항준은 "그날의 박흥숙 사건은 한국 현대사를 피로 물들여온 철거 참사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라고 했다. 장트리오는 "박흥숙을 변호하거나 동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박흥숙은 정당화될 수 없는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가 분노해서 외쳤던 말, '어떻게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할 수 있냐. 우리는 국민이 아니냐' 이 말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장현성은 박흥숙의 자필 최후진술서를 읽으며 눈물을 쏟았다.

enter@xportsnews.com / 사진 = SBS 방송화면

나금주 기자 nkj@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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