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1 06:32
사회

[ART] 질주하는 젊음을 남긴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

기사입력 2011.02.24 02:41 / 기사수정 2011.02.24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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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K Vol.2) 미국 미술계사상 처음으로 주류가 된 흑인 아티스트, 장 미셸 바스키아가 연주한 환상곡 속으로. Editor 양지원


 
우리는 누구나 어릴 적부터 손에 크레파스만 쥐어지면, 벽이든 장판 위든 상관없이 색깔이 잘 드러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흔적을 남기곤 했다. ‘가나다라’도 떼기 전부터 낙서를 시작했던 걸 보면,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낙서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어떤 표면에 문자 혹은 그림을 그리는 이 행위가 정치적,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거나, 혹은 더 많은 대중과 소통을 하기 위해 존재하면 그것은 예술의 한 장르로서‘Graffiti Art'가 된다. 바로 여기, 도시의 골칫거리인 거리의 낙서화가로 시작해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미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가 있다.
 

천재 흑인 화가의 판타지아
 “열일곱 살 때부터 나는 언젠가 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미술관 안을 잘 살펴봐. 흑인이 하나도 없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흑인이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바스키아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17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오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가출한 뒤, 훗날 낙서 미술가가 된 알 디아즈와 친구가 되면서 뉴욕 전역을 낙서로 도배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바스키아의 그림 속에는 죽음과 인종,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재즈 음악가들이었다.
 
초기의 수많은 재즈 음악가들은 연주하기 위해서 호텔이나 클럽을 들어갈 때 정문이 아닌 뒷문이나 부엌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했는데, 바스키아는 이들이 백인 예술 세계에서 자신이 처한 지위와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하지만 흑인 재즈 연구가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흑인 권투선수는 사회적인 영웅이 되고 있었다.
 



여전히 흑인으로서 살아가기엔 쉽지 않은 시대에서 점차 영웅으로 칭송되는 그들을 보며, 바스키아 역시 ‘스타’가 되는 꿈을 키웠다. 그래서 그들을 영웅이라 말하며 작품 속에 담았고, 흑인 영웅들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언젠가는 그 스스로에게도 왕관을 씌워줄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바스키아는 그렇게 흑인으로서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뉴욕 번화가의 벽면이나 지하철 내부에 자신만의 파격적인 미술 언어로 그려냈다.

 
 길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던 그는 뉴욕 현대 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파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우연히 바스키아의 작품을 본 미술 평론가 르네 리처드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아티스트로 키워줄 것을 약속한다. 이를 계기로 타임스퀘어 전시회에 참가하게 된 바스키아는 화랑업자 브루노 비숍벨거와 전속계약을 맺고, 단숨에 떠오르는 신예 미술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고가 브랜드의 옷을 입고 퍼스트 클래스 좌석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그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를 즐기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작업실 입구에는 아직 채 물감이 마르지 않은 그의 그림을 가져가려고 화상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흑인도 결코 하지 못했던 백인 예술계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이 예언했듯이 스타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에게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바스키아의 스캔들: 키스 해링과 앤디 워홀
바스키아의 곁에는 늘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바로 키스 해링과 앤디 워홀이었다. 이 유명한 팝 아티스트들과 바스키아는 너무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이들의 사이는 동성애 스캔들로 불거지기 일쑤였다. 바스키아가 알 디아즈와 헤어지고 낙서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뒤, 바스키아는 소호 곳곳에 스프레이로 “SAMO는 죽었다.”라는 글을 쓰고 다녔다.
 
1979년 가을, 케니 스카프를 통해 바스키아와 처음 만나게 된 키스 해링은 ‘SAMO를 위한 추모식’을 열어주며 바스키아와 함께 유명 클럽들을 다녔다. 평소 낙서미술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키스 해링은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바스키아의 키스 해링에 대한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친구였다 아니었다가 오락가락 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키스 해링이 소호 화랑가에 낙서화가 전시될 수 있게 만든 사람이라는 것과 낙서화를 대중적으로 알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주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해링의 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느끼며 ‘교과서적인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주류 미술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낙서화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했지만, 키스 해링은 게이였으며 백인이었기 때문에 낙서화를 낭만적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다. 자신이 이룰 수 없는 영역에서 키스 해링이 영향력이 더 큰 존재라는 사실은 바스키아의 마음을 복잡하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서로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바스키아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앤디 워홀이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만남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다. 앤디 워홀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간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에게 자신이 그린 엽서를 내밀며10달러에 사라고 한다. 엽서들을 훑어본 워홀은 손이 많이 가지 않은 그림이라 말하지만 한 장을 산다. 이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 바스키아가 미술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을 때였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을 다시 만나 그의 소개로 미국의 유명한 화상과 거부들을 소개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지고 싶은 그의 소원을 이루어 갔다. 바스키아는 평소 워홀의 명성이 높았으며, 흥미로운 삶을 살았고 많은 유명인사와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그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고 다른 누구보다도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바스키아의 노력으로 둘은 마음속 얘기들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당시 작품이 고가로 팔려 들어오는 돈 대부분을 마약에 썼다. 마약과 여자는 바스키아에게 있어서 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워홀은 그런 바스키아를 걱정하고 다독이며 함께 공동 작품을 하고자 했고,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찍거나 붓으로 그리면 바스키아도 역시 옆에서 함께 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작품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전시 포스터에서 개성 넘치는 두 작가의 모습에서 오는 매력과 다르게 그 둘의 공동 전시는 혹평을 받고 말았다.
 
전시의 실패를 계기로 워홀과 바스키아의 사이는 멀어졌고 각자의 영역에서 방황했다. 특히 사람들은 더 는 바스키아의 작품을 주문하지도 주목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사실은 바스키아를 점점 더 마약에 의지하게 했다. 그러던 중1987년, 59세의 나이로 워홀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팝아트 거장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바스키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불꽃이 마약으로 꺼져가고 있던 바스키아는 워홀의 죽음 이후 더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결국 그다음 해 여름, 바스키아는 약물과용으로 사망하였다. 서른 살도 채 안 된 젊은 예술가,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뉴욕 화단에 일대 바람을 일으켰던 바스키아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다.
 





꺼져버린 불꽃의 잔해, 질주하는 젊음
바스키아는 미국 뒷골목의 대변자로서 자전적인 이야기에서부터 만화책, 해부학적 낙서 및 상징적 기호나 형상, 인종주의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주제까지 즉흥적이고 역동적이며 유희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어느 미술 사조나 예술가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흑인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그가 거칠게 뿌려댔던 것은 물감이 아니라 자유라 불리는 영혼이었고, 그의 콜라주는 강박 관념과 회화로 덧댄 자아의 분출이었다. 이러한 바스키아의 태도와 표현은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애정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가 꿈꿔오던 스타가 되는 길과 자신이 현실에서 추구한 자유로운 영혼은 공존할 수 없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질수록 미디어와 주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견디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가 되고자 했던 그의 판타지는 질주하는 젊음을 남기고 한 줌의 재가 되었다.하루하루 지루한 삶을 형벌처럼 살아가고 있는 당신이라면, 뉴욕의 밤거리처럼 화려한 삶을 살아가다 한순간 사라져 버린 그의 젊음을 만나보라. 당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던 거침없는 자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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