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독수리' 최용수가 은퇴해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참이다. 많은 이들에게 영광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보다 '미국전의 어이 없는 슈팅'으로 기억되는 최용수.
미국전 이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누군가와 이런 얘기를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온 국민이 2006독일월드컵개최로 시끄러울때 즈음 한 인터넷 뉴스에서의 월드컵 특집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선 이회택-최순호-김주성-황선홍으로 이어지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과연 누가 이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가슴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황선홍의 은퇴이후 2년도 채 안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은 그이기에 이해해야 한다해도 황선홍의 이름뒤에 그의 이름 석자가 없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최용수...
언제부턴가 잊혀져야 했던 이름, 언제부턴가 공공의 적이 되어야 했던 이름...
1996년 이탈리아의 프로리그 양대산맥 AC밀란, 유벤투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98월드컵까지 달려나갈 것만 같았던 박종환 사단은 이듬해 UAE두바이 아시안컵에서 잇단 참패를 당한다. 게임메이커 부재, 선수와 감독간의 불화등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기는 했으나 세계대회도 아닌 아시아대회에서의 참패는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자처하던 우리에겐 크나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벌어진 98월드컵 아시아예선...사상 최악의 대표팀이라는 비아냥을 일순에 없애준 영웅이 나타났으니 바로 '아시아의 독수리' 최용수였다. 지금 이 얘기를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이들이 많은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스트라이커는 곧 최용수였다. 일본이 사상 최초로 월드컵 진출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을때 '일본! 프랑스에 같이 가자.'라며 온갖 거만함을 떨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모든 국민들의 불안감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었던 프랑스 월드컵 예선이 끝나고 황선홍이 돌아왔다. 포스트플레이 뿐만 아닌 다방면에서의 재능을 가진 황선홍과 문전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최용수의 조합은 당시 한국 언론으로 부터 역대 최강의 투톱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대최강 투톱은 프랑스에 가기 직전 벌어진 중국전에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황선홍의 부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상 월드컵에서 뛸 수 없게 되어 버린 황선홍으로 인해 대표팀은 대대적인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맞이한 월드컵...아직도 논란거리인 멕시코戰에서의 비출장, 네덜란드에 당한 참패,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이른바 전봇대 헤딩슛으로 많은 찬스를 날려버린 인물...처음 맞이한 월드컵은 그에게 아픔만을 남겨둔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번의 대활약을 펼치며 역시 최용수란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 이면엔 '최용수=아시아용'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갖게 되었고 이후 허정무 사단은 최용수보다 황선홍-이동국 투톱을 중용하며 그가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져 갔다. 급기야 프리미어리그 진출 실패로 슬럼프까지 찾아온다.
2001년 월드컵 16강 프로젝트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오랫만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그는 나이지리아 크로아티아戰의 활약을 통해 월드컵 명단에 포함되었고, 많은 국민들이 한층 농익은 기량으로 K리그에서 팀을 정상으로 올려놓고 J리그에서 연일 득점포를 가동하던 그에게 다시금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2002월드컵은 그에게 있어 축구선수로서 쌓아온 모든 공적을 무너뜨린 대회였다. 월드컵이 끝나고 다분히 호의적이었던 그에 대한 팬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해갔고, 코엘류호의 출범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그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최용수를 위한 변명...(?)
그의 플레이를 회상해보면 그는 한국식 뻥축구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인물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윤정환과 함께 히딩크의 등장이후 네덜란드식 토탈싸커가 유입되면서 부터 이미 그의 설 자리는 상당히 좁아졌었다. 그래도 그가 국가대표 23인 엔트리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골결정력에 대한 믿음이 히딩크에게도 컸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면에서 이동국을 엔트리에서 탈락시킨 것은 황선홍이 아닌 최용수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히딩크에게 있어 최용수는 입맛에 딱 맞는 플레이어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힘으로 밀어부치는 미국에 유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선수였을지 모른다. 결과론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은 틀렸으나 월드컵 직전 프랑스 전에서의 부상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탈리아 전에서는 한 번 정도 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황선홍은 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최용수는 자신이 팀의 중심에 있어야 제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이다.'라고 말이다. 98월드컵 예선이 그랬고, 안양에서의 모습이 그랬으며 제프 이치하라에서의 모습이 그랬다. 2003년 코엘류호의 출범 초기의 부진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는데 과연 그에게 코엘류호의 부징을 덧씌울 수 있었을까? 그 당시 한국팀은 더 이상 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팀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역시 부진했던 선수들 중 한 선수이지 않았을까?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어느덧 최용수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98월드컵 예선때의 모습보다 미국戰에서의 홈런슛이 더 기억에 남게 되었다. 굳이 이을용의 패스가 강했네, 타이밍을 잘못 잡아 줬네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월드컵에서 뛸 선수였다면 반드시 골문안에 넣어줬어야 하는 공이었으니깐 물론 그 상황에서 골을 못 넣을 선수는 최용수 외에도 많을 것이라는것이 본인의 생각이긴 하다.
어쩌면 축구팬으로서가 아닌 애국자로서 그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동남아 중앙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골을 넣고 과격한 파울을 당하면 어김없이 보복을 가하며, 일본 벤치에 신경질적으로 공을 차고, 가와구치의 물을 빼앗아 마셨던 그는 어쩌면 나에게 있어 이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의 독립군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고 볼품없는 체격'인 한국축구에 홀연히 나타나 싸움닭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준 그는 수비수들의 진땀을 빼게 만들었고, 월드컵 예선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의 모습속에서 어쩌면 내 마음속의 인정하진 않았으나 무의식 중에 배어버린 또 하나의 영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보았다. 2003년 봄...그가 교체되어 나올때 TV에서 보인 것은 상무시절 그가 하던 절도있는 경례도 아니었고, 관중을 향해 손을 들고 머리위로 박수를 유도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고개를 떨군 그의 모습과 홈경기에서 자국의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던 이 시대의 진정한 축구팬이라고 불리던 붉은 악마들이었다. 96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예선을 통과하게 해준 우리들의 영웅에게...98월드컵예선내내 많은 골을 넣으며 우리의 월드컵 진출을 이끈 일등공신이 떠나가는 그 장면에서, 기립박수는 못 쳐줄 망정 야유를 퍼붓고 있다니...그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세계언론의 찬사를 받았던 2002월드컵때 길거리를 가득 메운 700만의 길거리 응원단의 존재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한국엔 애국자는 많으나 축구팬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으며 말로만 듣던 냄비근성이란 것을 혹독히 깨닫게 해준 계기였다.
홈경기에서 자국팬들의 야유를 듣는 기분이과연 어땠을까? 그날 경기에서의 그의 모습은 과거 터프하고 강인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마치 관중의 야유에 쫒겨 황급히 찬 홈런볼과 잔뜩 주눅든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2002월드컵에서의 한국팀만이 머리속에 남아있는 자랑스런 붉은 악마들에겐 그는 도마위에 올려놓고 맘껏 내리칠 수 있는 좋은 고기였을 것이다. 모두들 잊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 꺼야...라고 이해하고 싶다...
이제 최용수가 국가대표 붉은 유니폼을 입는 모습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대표팀에 들어올 이유도 없다. 이동국이 있고, 접기 하나로 아주리를 농락한 안정환이 있고, 그리고 떠오르는 신예 박주영도 있다. 물론, 자랑스런 개티즌도 여전히 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접고 마지막 금의환향했던 황선홍의 그 모습을 재현할 길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하지만 떠나는 그길...그래도 그의 골에 웃었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만이리도 그에게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당신을 기억할게요...영원히...'
송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