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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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팬이 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기사입력 2019.12.19 20:25 / 기사수정 2019.12.19 20:31



사람이 옛날이야기 자주하면 나이 먹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미 어느 정도 먹을 만큼은 먹은 것도 사실이기에 이스포츠업계 옛날이야기 하나 하려고 한다.

때는 2006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모 스타크래프트 게임단은 팬들한테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가 활발히 펼쳐질 당시 양대 리그라 불렸던 스타리그-MSL 예선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선수별로 둘 중 하나만 내보내겠다고 한 것.

불참 자체는 자유이긴 한데, 예선 일정을 코앞에 두고 내린 결정이기도 하고, 팬들 입장에선 선수들의 개인리그 활약도 보고 싶은 게 사실인지라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당시에 ‘양대리거’라는 수식어는 개인전 능력이 강한 대세 선수를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였는데, 양대리거 탄생 자체를 막는 결정이었던 것.

선수 개개인이 예선 불참을 원해서 그런 결정이 나온 것도 아니다.(그랬다면 그렇게 비판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프로리그 집중하겠다고 게임단 차원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 이 결정의 명분은 ‘선택과 집중’으로, 프로리그 성적을 위해 개인리그를 버리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게임단은 이 예선전 불참선언 시기 전후에 프로리그에서 엄청나게 부진했다. 그 게임단이 단체전에서 그 정도로 부진했던 경우는 ‘2004스카이프로리그 2-3라운드’ 시절 밖에 없었다.

스타리그 올드팬인 분들이라면 이 정도 설명으로도 어떤 게임단을 말하는지 아실 것이다. 그 게임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게임단 SKT1이다.
(참고 기사 : SK텔레콤, 사상 초유의 예선 불참 선언! / 2006-11-14. 포모스)

당시 ‘선택과 집중’이라는 표현은 ‘선택과 실신’이라고 불렸다. 개인리그도 못하고 프로리그도 못하니 당연히 그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

제목에 언급된 문장인 “우리 팬이 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는 이 암흑기에 SKT1 프런트였던 어떤 분이 여론을 진화하려고 인터넷커뮤니티에 썼던 글에 들어있던 문장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여론 진화를 위해 쓴 글에 왜 저런 문장이 들어가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선택과 집중’ 사건은 단순히 한 게임단의 결정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SKT1을 운영하는 SK텔레콤이 이 시기 한국e스포츠협회 협회장사였기 때문이다.(참고 기사 : SK텔레콤, 'e스포츠협회' 2기 회장사로 선정 / 2005-03-18. 게임동아)


SKT1 ‘선택과 집중’ 사건을 빼놓고 봐도 당시 한국e스포츠협회와 주요 게임단들이 팬들에게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 분명했다.

‘프로리그 쪽에 집중하고 싶고 개인리그 비중을 줄이고 싶다’

프로리그 연습을 집중적으로 시키고 개인리그 연습은 짜투리 시간에 하도록 만든 게임단이 있었다는 건 올드 스타팬들에게 유명한 이야기. 게임단 운영사의 입김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시기기도 해서, 주요 게임단의 결정은 곧 협회의 결정이라 봐도 됐다. 팬들과 협회-게임단의 생각 차이가 꽤나 심했고, 소통도 잘 되지 않았다는 것.

스타크래프트리그는 기본적으로 개인리그의 흥행을 바탕으로 성장한 이스포츠리그였다. 평생의 라이벌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가 명승부를 펼친 ‘코카콜라배 스타리그’가 그 대표적인 예다.

‘광안리 10만명’이 프로리그를 대표하는 수식어이긴 했지만, 결국 그 숫자가 모인 건 ‘개인리그 스타들로 구성된 게임단’이 프로리그 결승전에 올라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리그 스타들로 구성된 게임단’ 중에는 당연히 SKT1도 있다. 임요환, 최연성, 박태민, 박용욱과 같은 개인리그 우승자들이 한 팀으로 뛰었던 게임단이었으니까.

그런 게임단이 개인리그 약화에 앞장섰으니 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앞서 언급했듯이 팬들 입장에서는 우리 선수가 개인리그에서 잘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안팎으로 정말 많은 말을 들었다. “우리 팬이 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라는 문장에 당시 SKT1팬들은 “우리가 선수 팬했지 언제 프런트 팬을 했었냐”고 받아쳤다.

한국 e스포츠협회 대표 흑역사라고 한다면 “스타크래프트는 공공재다” 발언(검색창에 ‘케스파 지재권 사태’를 검색해보세요)이겠지만, ‘불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개인리그 약화 정책도 만만치 않게 흑역사다.

이 옛날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 이스포츠업계 최고의 대세인 ‘리그 오브 레전드’ 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보고 있자니 이때 생각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한국e스포츠협회가 옛날 블리자드에게 했던 것처럼 라이엇게임즈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는 공공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팬들과 소통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하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변함이 없다 싶어 그 시절이 떠올랐다.



특히 국회에서 진행된 제도개선을 위한 이스포츠 토론회는 그 때 생각이 안 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파이터포럼에서 기사 보고, 스플래시이미지에서 선수 사진 수집하고, 전적 검색 사이트 뒤져가면서 어떤 선수 성적이 더 뛰어났는지 치열하게 토론하던 꼬맹이들이 이제 머리숱 걱정해야할 나이가 됐다. 스타리그 초창기 ‘PC방 애국가’였던 브라운아이즈 ‘벌써 1년’(2001.06.07.)이 발매된 게 근 20년 전 일이다. 그리고 SKT1 ‘선택과 집중’ 사태가 일어난 2006년은 브라운아이드걸스가 ‘데뷔’(1집 ‘Your story’)를 했던 해다.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데 아직도 시스템의 부족을 이야기하고, 아직도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다니. 적어도 선수 및 코칭스태프 보호 제도는 지금쯤이면 완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업계인 보호라는 게 종목을 타는 일도 아니고 말이다.

리그 간 선수 트레이드 문제의 경우에는 스타크래프트리그 때 크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으니 이 부분은 좀 이해를 한다고 해도, 국내팀이 한국 선수한테 갑질한 것도 보호하지 못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금 한국e스포츠협회, 라이엇게임즈코리아, 각 게임단 소속으로 활동 중인 사람들 가운데 스타크래프트 때 코칭스태프였거나 선수였던 사람들이 많은데, 예전 경험을 좋게 활용했다면 (모자람이 있을지언정) 그 시절보다 제도(시스템)가 훨씬 더 괜찮지 않았을까.

조규남 전 그리핀 대표, 스틸에잇 서경종 대표가 비판 받는 이유도 사실 같은 맥락이다. 슈마지오 시절, 노 스폰서 지오 시절에 배 곯아가면서 게임단 운영해도 유니폼 하나는 멋있는 거 입혔던 사람과 S급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게임하던 시절에 그중에서도 열악하기로 유명했던 MBC게임(구 POS) 선수로 활동하며 전략 연구하고 컨트롤 개발(뮤탈 뭉치기)했던 사람이 그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선수계약서를 2019년에 미성년자인 프로게이머한테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그리핀 카나비 사건’이 촉발된 이후 공개된 카나비 선수 노예계약서는 ‘스타리그가 리그 오브 레전드 리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그 시절 겜돌이로서 진심으로 창피했다.



한국 e스포츠협회 결성일이 1999년 7월이고, 카나비 서진혁 선수가 2000년 11월생이다. 협회보다 어린 선수 하나 보호 못해 국회 토론회 나왔으면서 ‘아직 과정에 있다 보니 좀 부족합니다. 앞으로는 좀 잘할게요’ 소리밖에 못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글이 길었다. 라이엇게임즈코리아-한국e스포츠협회-LCK위원회 관계자들, 특히 스타크래프트리그로 밥 먹고 살았던 관계자들 제발 소통 좀 잘하고, 일도 좀 더 잘하길 바란다. 여기서 소통을 잘하고 일을 잘한다는 건 ‘팬들이 원하는 것’을 잘하는 걸 의미한다.

물론 지금도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 잘하는 관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나쁜 사건이 발생한 상태이기에 이러한 촉구를 한번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e스포츠협회는 이번 ‘그리핀 카나비 사건’으로 인해 신뢰에 금이 가서 ‘깨진 유리창’ 상태가 된 게 아니라, 이미 박살이 나 있던 것을 새삼 재확인 받은 상태임을 자각해야 한다.











현재 집중해야할 이슈가 따로 있어서 그렇지, 이스포츠팬들이 옛날일 기억을 못해서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tvX 이정범 기자 leejb@xportsnews.com / 사진 = 픽사베이-한국 이스포츠 협회 홈페이지-‘김성회의 G식백과’ 영상 캡처-청와대 국민청원-이스포츠팬 제보-롤 인벤-PG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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