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10.08 17:12 / 기사수정 2009.10.08 17:12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정규리그는 월드컵이나 FA컵 같은 단기전 토너먼트와 달리 하나의 마라톤과 같다. 마라톤 경기에서 초반 10, 20km 지점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과 마지막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찬가지로 어떤 팀이 정규리그 초반 '반짝' 성적을 거두며 상위권에 오를 순 있어도, 장기 레이스를 제대로 소화할 만큼 충분한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종국에 가선 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난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헐 시티가 그러했고, 올 시즌 K-리그에선 광주 상무가 그런 모습이다.
시즌 개막전 K-리그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한 만년 꼴찌이자 K-리그의 '필요악' 취급을 받아온 광주를 주목하던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최성국, 최원권 등 강팀에서 주전급으로 뛰던 선수가 합류하긴 했으나 전체적인 전력의 완성도는 여전히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전은 거기서 시작됐다. 광주가 5월까지 거둔 성적은 무려 7승 2무 1패. 이 과정에서 FC서울, 수원 삼성, 인천 유나이티드 등 리그의 강팀들을 차례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광주 돌풍'의 희생양이 됐던 서울의 세뇰 귀네슈 감독마저 "아주 마음에 드는 팀이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광주는 전술적 완성도와 효율성이 높은 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정점을 찍었던 광주의 행보가 최근 꾸준히 내리막길이다. 아니,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하다. 광주는 얼마 전 울산 현대와의 26라운드에서 0-2로 패배하며 11경기 연속 무승(1무 10패)을 이어갔다. 벌어놨던 승점이 많아 그나마 버텼지만 울산전 패배로 이제 9위까지 추락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승점 자판기'로의 회귀다.
광주 부진의 원인 - 이미 예견된 추락
광주의 부진은 시즌 초반 '반짝' 성공을 거두던 약팀이 몰락하는 전형적인 코스를 밟고 있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광주가 이토록 무력해진 이유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장기레이스를 치르기엔 부족한 그들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부상과 얇은 선수층,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시즌 말미 전역으로 인한 의욕 상실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부진을 '주전이 다쳐서', '의욕이 없어서'란 말로 단순화시키기엔 광주의 초반 성적은 너무도 눈부셨다. 그렇기에 무엇이 광주를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고, 갑작스럽게 무너져버린 최근의 모습에선 무엇이 광주를 갑자기 약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그렇기에 전술적 측면에서 광주가 초반 잘 나갔던 이유와 최근 급격히 무너진 이유를 분석해보는 것은 꽤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다.
잘 나가던 시절, 광주는 달랐다
시즌 초반 광주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 광주의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 한편 기자석에서 가장 많이 나오던 말은 "야, 왜 저걸 못 막지?"였다. 그만큼 광주의 공격은 알고도 당하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단지 김명중의 슛이 유난히 잘 들어가서였을까? 최성국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었을까?
광주의 전술적 분석을 위해선 광주의 군 팀이라는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광주는 일반적인 프로팀과는 달리 해당연도에 입대하는 선수들로만 꾸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 다시 말해 계획적인 리빌딩이나 전술보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한된 선수 자원과 팀 내 전력 불균형으로 광주는 여타 K-리그 팀들에 비해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정공법으로 상대와 맞대결을 펼칠 경우 승산이 없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가 '선수비-후역습'의 전술을 선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광주와 가장 닮은 팀을 꼽으라면 최근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북한대표팀을 들 수 있다. 북한은 허리 라인부터 최전방까지 수비를 두텁게 형성하면서 최전방의 정대세와 홍영조를 내세운 예리한 역습을 펼치는 효율 높은 축구를 구사한다.
북한의 이런 전술은 겉보기엔 지지부진해 보이지만 전력이 특출나지 않은 상황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월드컵 3차 예선에서 북한은 3승 3무에 실점이 '0'이었고, 최종예선에서도 대한민국, 사우디, 이란 등의 강팀을 상대로 8경기 7득점 5실점이란 고효율의 축구를 구사하며 당당히 월드컵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선수비-후역습'의 전술은 자칫 '뻥 축구'로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상대 공격을 밀집 수비로 어떻게든 막아내더라도 이후 공격으로의 전환이 원활하지 못해 결국 공을 멀리 걷어내는 것으로 끝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전술은 쉽게 지진 않을지 몰라도 이기는 것은 훨씬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광주는 어떻게 이런 점을 극복했을까. 광주의 전술을 볼 때 특이한 점은 그들의 역습이 항상 측면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측면을 뚫어라!
사실 측면은 수비수와 공격수 모두에게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제공하는 공간이다. 측면에서 공격수는 사이드 라인을 옆에 끼고 달려야 하기 때문에 공격진행방향이 정면과 경기장 안쪽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수비수는 측면을 공략하는 공격수의 대각선 앞쪽에 서서 볼을 가진 선수의 진행 방향이 경기장 안쪽으로 꺾이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이렇게 공격 방향이 꺾인 공격수에겐 전진과 후퇴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문제는 경기장은 드넓은 벌판이 아니라 언젠간 끝이 있다는 점. 앞으로만 나아가다간 사이드 라인과 골 라인, 수비수가 만드는 삼각형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측면은 공격수에게 또 다른 기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공격수가 수비수보다 월등한 스피드나 돌파능력이 있다면 전방으로 치고 나가는 플레이나 개인기를 통해 수비수를 따돌리며 자유로운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중앙을 향한 대각선의 돌파로까지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더군다나 바꿔 생각하면 경기장 중앙과는 달리 측면은 한쪽에 사이드 라인을 끼고 있어 수비수가 돌파를 저지해도 스로인을 얻어 공격권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일면 안정적이기도 하다.
또한, 측면은 경기장 전 지역에서 가장 수비의 압박이 적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골키퍼를 제외한 20명의 필드플레이어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측면까지 커버하기에 축구장은 너무 넓은데다 중앙은 사방에서 상대 수비의 압박을 받을 수 있지만 측면은 최소한 사이드라인 때문에라도 그 자유도가 중앙에 비해 훨씬 높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광주의 최전방 공격수들이 좌우 폭을 크게 벌리며 측면에서 공을 받아 역습을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광주는 돌파능력이라면 리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성국을 비롯해 김명중, 고슬기 등의 공격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수비 시 볼보다 위쪽에 위치해 있다가 동료가 볼을 뺏어내면 일단 재빠르게 측면으로 이동해 공을 이어받아 역습을 전개한다. 빠른 발과 개인기를 갖춘 이들에게 상대가 공격에 치중하느라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며 만들어낸 넓은 뒷공간은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
동시에 측면의 동료가 공을 이어받는 순간 전방에 남아있던 공격수는 물론 미드필드의 최원권, 전광한 등이 빠른 속도로 공격에 가담한다. 이렇게 되면 순간적인 역습 장면에서 광주는 상대 수비 숫자와 같거나 혹은 더 많은 공격수가 있는 상황을 연출해 내고, 공격의 성공률도 높이게 된다.
비록 역습에 실패하더라도 공격에 가담한 선수는 3~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6~7명은 여전히 수비 위치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격에서 수비로의 전환도 크게 어렵지 않다.
상대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다
또한, 전반기 초반 광주는 예상외로 탄탄한 수비를 자랑했다. '철벽 수문장' 김용대 외에 올 시즌 장현규, 황선필, 박병규 등 K-리그 강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던 수비수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광주의 수비가 전에 없이 단단해진 것이다. 송한복, 배효성 등 미드필드 라인 역시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최후방 라인 바로 앞쪽에서 상대 공격에 압박을 가하며 수비수들이 상대 공격의 방향을 예측하기 훨씬 쉽게 만들어줬다.
광주의 초반 돌풍을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은 최원권이다. 광주 공격의 핵심은 역습시 미드필드를 생략한 채 한 번에 전방의 김명중, 최성국 등에 길게 연결해주고, 다른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것인데 최원권은 이 두 가지를 가장 잘 수행한 존재였다.
최원권의 원래 포지션은 포백의 오른쪽 풀백 혹은 스리백의 오른쪽 윙백이다. 수비시에는 측면을 안정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하지만, 일단 공을 뺏어내면 최전방 공격수에게 정확하게 공을 연결해주고, 혹은 적극적인 오버 래핑을 통해 공격수 그 이상의 몫을 해내기도 했다.
특히 광주의 역습이 시작될 때 최원권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적극적인 자세로 공격에 나서 상대 공간을 파고든다. 최원권의 움직임에 수비진은 또 다른 공간을 내줄 수밖에 없고, 이 공간은 최전방 최성국-김명중에게 결정적 찬스를 제공한다.
이렇게 되자 광주를 상대하는 팀은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예리한 공격력을 가진 팀이라도 자기 진영에서 촘촘하게 방어막을 쌓은 수비를 뚫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를 뚫어내기 위해 수비라인을 끌어올리거나 공격 숫자를 늘리는 등 지나치게 공격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리다 보면 광주의 기습적인 한방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이는 올 시즌 광주의 가장 전형적인 승리 방정식이었고, 결국 광주는 실점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위력적인 역습으로 득점은 쉽게 올리는 고효율의 축구를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술 완성도가 무너지다: 얇은 선수층, 그리고 태생적 한계
그런데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광주가 가진 태생적 약점이 그들이 보여줬던 전술적 강점을 무너뜨렸다. 주전 미드필더와 수비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진 것. 앞서 지적했듯이 광주는 군팀이란 특성상 주전-비주전 간 격차가 크다. 따라서 한두 명의 주전 공백에도 기존의 전술 수행 능력에선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비수 박병규를 시작으로 미드필더 송한복, 배효성, 고슬기 등 주전들이 줄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드필드와 수비라인이 촘촘하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짜임새 있는 수비를 구사하던 것과 달리 상대 공격에 쉽게 휘둘리며 두 라인이 하나로 뭉치는 일이 잦아졌다. 이렇게 되자 리그 최소실점을 다투던 짠물수비는 간데없이 어느덧 매 경기 골을 허용하는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수비의 불안은 공격의 약화로 이어졌다. 수비라인이 깊숙이 내려와 있는 광주는 공격권의 탈취점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개인 기량이나 볼 점유 능력이 떨어지는 광주의 미드필더진을 고려할 때 공격 전개 거리가 너무 길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역습에서 최전방의 김명중, 최성국 등 돌파능력이 좋은 전방의 공격수에게 최대한 빨리 공이 연결돼야 한다. 이후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2선에서의 공격가담도 필수다. 전반기엔 최성국이나 김명중이 측면에서 롱패스를 이어받은 뒤 돌파를 해나갈 때 주변에 최원권, 고슬기 등이 그 주변에서 움직이며 공격의 실마리를 찾아나갔다.
반면 후반기엔 2선의 공격가담이 원활하지 못해 최성국과 김명중이 공을 이어받은 뒤 고립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체적인 수비가 약해지다 보니 미드필더나 수비진이 역습에 가담했다가 되려 위험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후반기 광주는 역습을 나갔다가 오히려 상대에 빈틈을 내줘 실점을 허용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미드필드나 수비에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이 줄어들었고, 전방의 최성국과 김명중만으로 이뤄지는 역습은 그 위력이 크게 반감되고 말았다.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던 최성국과 김명중의 득점포는 현재 4개월째 침묵하고 있는 상황.
역습이 실패할 경우엔 볼 점유율을 높이면서 공을 돌리며 다양한 공격을 시도해야 하는데, 부상 등으로 엷어진 광주의 미드필드는 차근차근히 빌드업(Build-up)을 해나가지 못한 채 상대의 강한 압박에 공을 쉽게 뺏기고 말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최성국이나 김명중이 아래로 내려오면 전방의 공격력이 무뎌졌다.
이처럼 수비도 무너지고, 공격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니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설상가상으로 김명중과 최성국마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되는 경우까지 생기면서 총체적 난국을 겪어야만 했다.
여기에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말년 병장들'이 제대를 앞둔 상황에서 동기부여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말로는 팀을 6강 플레이오프 진출시키고 전역하고 싶다고 했지만 정규리그가 끝나기 직전 원소속팀으로 복귀하는 마당에 목표의식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
이에 대해 주전 공격수 김명중조차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사리는 플레이를 했었다."라며 솔직히 고백하기도 한 것을 보면 시즌 초반의 의욕적이던 모습과 어딘가 모르게 다른 최근 광주에 대한 인상이 그저 '기분 탓'은 아닌 듯하다.
결국, 광주의 초반 선전이 약팀의 '선수비-후역습'이란 전술적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얻어낸 성과라 한다면, 후반기 급격한 몰락은 군팀 광주가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이 전술적 수행 능력에까지 악영향을 끼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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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 김현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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