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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준의 은반 위의 무도] 5년 후의 한국피겨를 생각하다 - 상

기사입력 2009.08.11 16:49 / 기사수정 2009.08.11 16:49

조영준 기자



[위클리엑츠=조영준 기자] "10세 전후의 어린 선수 몇 명이 트리플 점프 5개를 다 뛰고 있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된 선수가 이 정도인데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어요"

최근 일본에 다녀온 한 피겨 지도자의 말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이 지도자의 입에서만 나온 의견이 아니었다. 근래 들어 일본이 진행하고 있는 '얼음 폭풍' 프로젝트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에서 이토 미도리가 은메달을 획득한 이후, 일본은 피겨 스케이팅을 '전략 종목'으로 키워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일본의 피겨 저변은 탄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원로인 이인숙 국민생활전국스케이팅연합회 회장은 "일반적으로 이토 미도리의 선전 이후, 일본의 피겨 육성 프로젝트가 시작된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수를 키워나가는 체계적인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축돼 있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선수들이 훈련에 전념할 수 있는 전용 아이스링크가 전국 곳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항상 세계무대에 목표를 두고 철저하게 훈련에 임하는 모습은 치밀할 정도였다"고 오래전부터 기틀이 잡힌 일본 피겨의 환경에 대해 설명했다.

'현역 최고의 스케이터'에 자존심이 추락한 일본 피겨스케이팅, 독기를 품다

이토 미도리의 등장 이전부터 일본은 피겨 스케이팅 '세계 제패'를 꿈꾸어왔다. 이토 미도리의 가능성을 '최고'로 승화시키고 말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2006 토리노 올림픽에서 결실을 맺었다. 현재는 '갈라 쇼의 여왕'으로 등극한 아라카와 시즈카(28)가 일본 피겨스케이팅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함으로써 일본 피겨의 목표는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라카와 시즈카는 일본 피겨 시스템이 배출한 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1세 때,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소녀가 나타나자 일본 언론은 '피겨 천재'가 나타났다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사다 마오(19, 일본 츄코대)를 가리켜 일본 언론들은 '일본 피겨 역사상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트리플 악셀 완성'에 매달린 아사다 마오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우기 위해 '부등식'을 건너뛴 학생과도 같았다. 주니어 시절, 피겨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아사다 마오의 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19, 고려대)의 등장은 일본에 충격적으로 다가갔다. 그토록 대대적인 투자와 장기적인 시스템 속에서 배출한 자국의 선수들이 '피겨의 변방'에서 나타난 김연아에게 번번이 패하자 허탈감은 더욱 짙어져 갔다.

2008~2009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는 큰 점수 차이로 세계정상에 우뚝 섰다. 김연아가 가진 점프력과 기술, 여기에 표현력과 프로그램 수행 능력 등의 우수성은 이 대회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 구도는 식상한 주제로 전락했다.

신 채점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의 정확성'이다. 김연아는 피겨 역사상 가장 정확하고 교과서적인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신 채점제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견에 자극을 받기 시작한 일본은 기술의 정확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피겨가 생각하는 '5년' 뒤의 현실은?

국내 골수 피겨 팬들은 1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에게 큰 관심이 있다. 국제무대에 도전해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선수들이 이 연령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국내 대회를 휩쓴 박소연(12, 나주초)를 비롯해 서채연(13, 가동초), 김해진(12, 관문초) 이호정(12, 남성초) 등의 발전 속도는 괄목할만한 수준이다.

체계적인 시스템과 대대적인 지원 아래에서 성장한 일본 유망주들과 비교해 이들 선수들의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체계적인 '지원'과 '투자'는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국내 선수들은 항상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현장에 있는 피겨 지도자와 전문가들은 재능만 놓고 보면 일본선수들과 비교해 국내 유망주들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과 국내의 피겨환경과 저변은 여전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이다. 국가대표 김민석(17)과 곽민정(16, 이상 군포수리고)을 지도하고 있는 김세열 코치는 "동일한 기술과 자세를 고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피겨 선수의 앞날을 평생 동안 좌우하는 시기는 바로 '초기'이다. 이 시점에서 잘못된 자세와 부정확한 점프를 익힌다면 '불치의 병'으로 남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일부 재능이 많은 선수는 빠른 시간 안에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니어 때로 접어들면 한번 몸에 습득된 습관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뛰어난 스케이터로 성장하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선수생명이 짧은 피겨 스케이팅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정확한 기본기를 탄탄하게 익힌 뒤, 체구와 골격이 커지기 전에 고난도의 점프기술과 유연한 스케이팅을 습득해야만 성장세에 탄력이 붙는다.

국내 피겨의 현실을 볼 때, 기술위주로 평가의 등급이 매겨지는 급수제도도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단기간 성과를 내야만 하는 국내 시스템을 고려할 때, 승급 시험의 통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현역 선수들의 대부분은 4급에서 5급을 넘어갈 때가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5급 승급 시험의 과제는 '더블 악셀'의 성공이다. 이 기술을 심사위원들이 보는 앞에서 성공시켜야만 승급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특정한 기술이 승급 시험의 한 요소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기술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겨 전용링크가 하나도 없는 국내에서 대여시간의 1분 1초는 '금쪽'같은 시간이다. 아이스링크를 대여하는 시간은 매우 한정돼 있기 때문에 소화할 수 있는 훈련량은 극히 제한돼 있다.

이 시간 동안, 국내 유망주들은 승급 시험의 과제인 특정기술 훈련에만 연연하게 된다. 또한, 단기간에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점프'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점프는 대회의 성적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점프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소홀히 하게 된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한국 피겨가 살아나갈 수 있는 돌파구는 김연아의 사례에서 나타났다. 물론, 김연아가 지닌 재능과 피눈물나는 노력은 차원이 다른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국내 훈련 시스템이 주는 한계점에 김연아는 순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연아는 점프 연습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또한, 고난도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중요한 것을 건너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김연아가 걸어온 모범적인 훈련방식은 일본보다는 국내 선수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발 빠르게 '기술의 정확성'에 열을 올리며 더욱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김연아가 알려준 교훈은 국내에선 공허한 메아리로만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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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엑스포츠뉴스 김혜미 기자]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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