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5.18 13:26 / 기사수정 2009.05.18 13:26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클럽'을 가리는 FA컵에 관련된 잡음은 올해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09 하나은행 FA컵 32강전 다음날 새벽, 스페인과 이탈리아 FA컵 결승의 뜨거운 열기를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것은 기자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해까지 FA컵은 저조한 흥행실적과 한겨울에 결승전을 개최하는 등 대한축구협회의 졸속행정으로 비판 여론에 시달렸다. 올해 역시 대한축구협회가 32강전을 평균적으로 2천만 원 정도가 소요되는 K-리그 클럽의 홈경기로 개최하면서 고작 200만 원의 지원금을 준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FA컵의 문제점은 낮은 대회 권위, 팬과 언론의 무관심, 홍보의 부족, 대회 운영 자금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대한축구협회가 다른 사안에 비해 FA컵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점을 꼽으라면 FA컵의 대회 운영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는 FA컵이 갖는 수많은 문제점 중 가장 근본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경기 방식의 문제점
지난해까지 FA컵은 8강 이전까지 전·후반 90분 만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할 경우 연장전 없이 곧바로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애초에 이 제도는 연장전으로 인한 체력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과 동시에 약팀이 강팀을 꺾는 빈도를 증가시켜 FA컵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자 함이 목표였을 것이다. 2006년과 2008년에 FA컵 4강에 오른 N-리그의 고양KB가 이러한 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팀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약팀의 반란'이 과연 FA컵을 흥미롭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2000년 프랑스 '칼레의 기적'이나 지난해 잉글랜드 2부리그의 반슬리가 FA컵에서 리버풀과 첼시를 연파했던 것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들이 강팀들과의 진검승부를 통해 기적의 승리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당시 칼레와 반슬리는 강팀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자세로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했고, 그건 상대였던 강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렸을 때 우리는 축구가 줄 수 있는 큰 감동을 FA컵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장전 없는 승부차기를 통한 인위적인 '약팀의 반란'은 오히려 FA컵의 재미를 반감시키고 대회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등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약팀이나 하위리그 팀들이 극단적인 수비 전술과 의도적인 시간 지체로 어떻게든 승부를 '러시안 룰렛'으로 끌고 가려는 경기 운영을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FA컵은 약팀이 소극적인 자세로 재미없는 90분을 보내고 복권 긁는 마음으로 승부차기에 임하는 전략이 판치는 이상한 대회가 되고 말았다.
이는 지난해 32강에서 K-리그 팀과 아마추어 팀 간 중 무려 4경기가, 올해는 3경기가 승부차기로 이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런 뻔하고 별볼일없는 경기내용에 주목할 축구팬은 아무도 없다. 평균 2만 명 내외가 들어오는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에 각각 1천 명과 3천 명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한, 그렇게 해서 N-리그나 아마추어 팀이 K-리그 팀을 이긴다면 언론에 약간의 기삿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은 K-리그의 '망신'을 유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뻔한 경기에 대해 사람들은 내용엔 상관없이 오직 드러난 결과에만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며, 결국 K-리그 팀의 패배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다시 말해 FA컵의 핵심인 약팀의 드라마틱한 반란의 감동은 없고 강팀에 대한 조롱만이 남을 뿐이다. 더 나아가 K-리그의 권위까지 짓밟게 된다.
이러한 비판 여론 때문인지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FA컵부터는 32강까지만 연장전 없이 운영하고 16강 이후부터는 연장전을 거쳐 승부차기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FA컵 대회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이 제도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 아예 예선부터 정통 방식으로 경기를 치러 축구 본래의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위적인 측면과 힘있는 자의 논리가 사라진, 온전한 축구의 원시성과 선수들의 열정만으로 치러질 수 있는 대회가 FA컵이어야 한다.
연장까지 치르는 방식이 매주 경기를 치러야 하는 프로팀에겐 부담일 수 있다고? FA컵은 일 년에 겨우 다섯 번만 이기면 우승할 수 있는 대회다. 겨우 다섯 번.
FA컵 운영 방식의 문제점 - 참가 팀의 숫자
'대한민국 최고의 클럽'을 가린다는 FA컵이지만, 실제로 FA컵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축구팀이 참가할 수 없다. 현행 FA컵은 한정된 수의 K3리그와 대학팀, 2종(일반, 동호인) 팀이 일단 예선을 거치고, 여기서 살아남은 3팀이 K-리그 15팀, N-리그 14팀과 함께 32강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예선 라운드는 3월에 한꺼번에 치러지고, 32강은 5월에 열리는데, 문제는 아마추어팀이 들러리처럼 참가하는 이런 대회 방식 자체가 팬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다는데 있다.
FA컵이 K-리그 정규리그나 리그컵과는 다른 존재 가치를 가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FA컵의 태생적 장점을 비교우위에 놓는 것이다.
FA컵은 대한축구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회다. 원론적으로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팀이라면 어느 팀도 참가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FA컵의 가장 큰 수혜자는 아마추어팀이 돼야 한다. 평소에는 만나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축구를 구사하는 팀을 상대하는 '꿈의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FA컵 예선에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세미프로와 아마추어 팀은 30여 개 팀밖에 되지 않는다.
축구 선진국의 FA컵은 엄청난 숫자의 세미프로팀과 아마추어팀의 참가를 허락하기에, 프로팀이 본격적으로 가세하는 본선 토너먼트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험난한 예선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만큼 가치도, 재미도 있다. 반면, 아마추어와 세미프로팀 출전에 제한을 많이 둔 우리의 FA컵은 예선 관문도 너무 짧고 '축구 축제'를 향유할 수 있는 혜택도 한정되어 있다.
FA컵의 규모를 획기적으로 키우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K3리그, 대학, 동호인 팀 일부로 한정되어 있는 참가 기준을 고등학교까지 낮추고, 참가 팀 숫자도 확대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2001년과 2002년에 한시적으로 시행됐던 고교 랭킹 1~3위 팀의 참가는 그래서 다시 한번 고려해 볼만 하다. 고교 최고의 더비전인 강릉제일고와 강릉농고의 경기가 FA컵에서 성사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전국적인 FA컵의 축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각 시도 단위에서 랭킹 3위에 드는 고교 팀들과 동호인 팀이 1차 예선 토너먼트를 거치고, 여기서 살아남은 팀들이 K3리그, 대학리그의 모든 구단 그리고 경찰청 등의 군팀을 상대로 2차 예선 토너먼트를 치른다. 이럴 경우 참가팀 숫자는 100팀을 가뿐히 넘긴다. 특히 동호인 팀의 참가 확대는 FA컵에 대한 관심 증대는 물론이고, 일반인에게도 수준 높은 축구의 장에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FA컵 예선 출전권을 통해 자발적인 하부리그 운영도 유도될 수 있다.
현재는 본선을 32강부터 시작하는데, K-리그와 N-리그 팀만 합쳐도 29팀이어서 본선진출의 문은 매우 좁은 상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예선통과팀의 본선 참가를 확대하는 것이다. K-리그 15개 팀과 N-리그 우승팀 1개 팀은 32강에서 기다리고, 나머지 N-리그 13개 팀과 예선을 통과한 19팀이 먼저 토너먼트 48강전을 치르는 것이다. 48강에서 승리한 팀이 상위 16개 프로팀과 결전을 벌이는 것이다.
혹은 64강부터 K-리그와 N-리그 팀을 모두 참가시키고 35개에 달하는 세미프로와 아마추어팀이 그야말로 프로와 아마의 대격돌을 벌이는 방법도 괜찮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현행 FA컵에선 본선에서 겨우 다섯 번만 이기면 우승컵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할 수 있다. 월드컵도 본선에서 7경기를 이겨야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데 비하면 그 관문이 너무 짧다. 따라서 64강부터 치르는 것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차라리 존재가치가 약한 리그컵 경기를 줄이는 게 낫다.
그렇게 되면 3월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FA컵 경기가 열리고, 전국은 FA컵을 통해 매년 축구 열기에 휩싸일 수 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경기 개최 규모의 위용과 화려함이 더해지는 것은 참가 선수들은 물론 응원하는 이들에게도 큰 의의와 동기를 부여가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아마추어 팀이 FA컵에 진출하는 것이 과연 대회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될까? 오히려 지금의 기형적인 대회 구조가 대회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아닐까? 아마추어 팀들이 K-리그 팀들과 직접 접촉하는 계기를 늘려 프로축구를 몸소 체험케 해주고, 그로 인해 FA컵이 얼마나 쉽지 않은 타이틀이란 인식은 물론 K-리그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진검승부를 통해 아마추어 팀이 K-리그 팀을 꺾을 때 진정한 '돌풍'과 '기적'이 연출되며 FA컵이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개최 시기와 장소의 문제점
FA컵 결승전이 한겨울에 열리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FA컵 4강과 결승전은 K-리그 챔피언 결정전이 끝난 12월 중반에 추위를 피해 중립지역이나 다름없는 제주도에서 열렸다. 협회는 관중 1만 5천 명대의 흥행을 자신했지만 실제 관중은 고작 1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올해는 11월까지 모든 일정을 끝낸다고 하지만, 과연 문제가 추운 날씨 탓일까? 지난 해 성탄절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홍명보 자선 축구 경기에 1만 6천여 명이 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중립경기에도 관중동원력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FA컵의 상징성까지 충족시키는 경기장에서 FA컵 결승이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 FA컵은 전통적으로 '축구의 성지' 웸블리 구장에서 열리고, 일본의 FA컵 격인 일왕배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코파 이탈리아는 로마 올림피크에서 열린다. 안타깝게도 한국 축구의 '구(舊)성지'인 동대문 운동장이 어이없이 사라져버린 현재, '새로운 성지'로서 2002월드컵 개막전을 치렀던 서울월드컵경기장이나 1988올림픽을 치른 잠실 종합운동장을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대회 시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 사실 FA컵이 언제 열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축구팬은 거의 없다. 대한축구협회가 8강 이후의 일정은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임의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일에 반드시 FA컵 경기를 개최해 하나의 전통처럼 만드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2002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었던 5월 31일에 32강, 현충일에 16강, 광복절에 8강, 대한축구협회의 전신인 조선 축구협회가 정식으로 창립된 9월 19일에 4강, 그리고 개천절에 결승을 치르게 하는 등 대회 날짜를 '대한축구협회가 개최하는 대회'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날로 정하고 K-리그를 포함한 각 리그 일정도 이를 범접할 수 없게 하는 것은 FA컵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장치다.
매년 행해지는 개천절 오전 공식행사와 연계되어 FA컵 결승에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축구협회장이 참관하고, 평소에는 트레이닝복을 입는 감독이라도 이날만큼은 정장을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채 경기에 임하는 것은 FA컵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FA컵의 권위는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주거나 대한축구협회가 개최한다는 사실만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FA컵의 재미는 단순히 약팀이 강팀을 이긴다고만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대회의 진정성과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행이 없는 한 FA컵의 표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발맞춰 749억 원(2009년 기준)의 천문학적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축구협회의 예산에서 FA컵을 위한 몫이 조금만 더 늘어날 수 있다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고민과 아이디어가 현실화되어 FA컵을 더 즐거운,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축제로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전성호의 스카이박스] 대한민국 축구를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축구를 위한 촌철살인
[스카이박스] K-리거들이여,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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