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4.09 10:51 / 기사수정 2009.04.09 10:51
얼마 전 이호진 선수의 핀란드리그 진출 소식을 접했다. 팀 개편으로 인하여 인천 유나이티드(이하 인천)에서 떠나야만 했던 그가 새로운 도전을 위한 닻을 핀란드의 한 도시에 내리게 된 것이다.
작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1순위로 인천에 지명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준 인천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고, 감바 오사카와의 친선경기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다시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지만 늘 따라붙었던 부상의 굴레를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이호진 선수를 생각할 때, 그와 함께 또 한명의 선수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올해 인천에서 떠나야만 했던 조원광 선수로 오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심기일전하여 국내 프로리그에서 비상하려 했지만 미쳐 그 날개를 펴지 못한 채. K-리그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셔널리그로 무대를 옮긴 그는 천안시청이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꺾이지 않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펼쳐 나아가고 있다. 아직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축구를 할 날이 많다며 늘 긍정적이고,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던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고 있다.
조금 지난 이야기이지만, 작년 여름 두 선수와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남는다. 그들은 언제나 지칠 줄 모르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가득한 축구선수이자 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그 때의 기억을 다시 한번 꺼내어 그들이 축구인생에서 그려왔던 꿈을 계속 이어 나아가며, 반드시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며 본 기사로써 두 선수를 응원하려 합니다.
[리얼 스토리] 이제는 행복한 '스타'라 불러주세요 (2008년 7월의 어느날 인터뷰에서)
누구나 어릴 적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 풀더미 속을 샅샅이 뒤졌을 때가 있다. 어린 마음에 ‘행운’을 뜻하는 네잎클로버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양 순수한 동심 안으로 파고 들곤 했다.
세상의 많은 시련, 아픔을 겪지 못했던 그 시절은 그랬다. 눈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였고, 오직 ‘행운’이라는 말이 전부인 양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이 ‘행운’ 인 것은 그 존재가 그만큼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행여 한 잎이 떨어질까봐 조심스럽게 유난을 떨던 그 모습이 ‘행운’만 오기를 바라는 과욕은 아니었나 생각해봄직 한 때도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이다.
흔히 찾을 수 있는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네잎 중 한 잎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슬프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네 개의 잎으로 채워진 행운에서 하나의 잎이 떨어지더라도 그것이 행복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행복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 ‘행운’의 네잎클로버에서 하나의 잎을 떨어트린 후 ‘행복’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보려 한다. 그들은 어떤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이호진의 Real Story - 나는‥
내가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기회는 초등학교 육상대회 때 찾아왔다. 그 때는 달리기가 좀 빨랐다 싶으면 으레 축구부에서 제의가 들어오곤 했었다. 나에게도 축구부 감독님의 제의가 있었고, 축구화를 신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을 되돌아 보면 단지 볼을 차는 즐거움만 가득했었던 것 같다. 여느 아이처럼 그저 그렇게 축구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나의 평범한 축구생활 중 고교시절에 혼란도 있었다. 광운정보고 시절, 감독이셨던 김평석 선생님께서 감독직을 그만 두시는 바람에 팀이 어수선해졌었다. 개인적으로 심적인 어려움도 많았고, 제대로 나의 길을 찾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강릉농고 신동철 선생님께서 같이 축구를 해 보자 하셨다. 분위기도 바꾸고, 새로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전학을 결정했다.
정말로 뛰어난 실력을 가져 많은 분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지 않는다면 고교시절까지는 눈에 띄기 쉽지 않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실제 경기 출전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유망주라 하지만 난 그저 평범한 축구선수였다. 대표라는 이름표는 대학에 와서야 처음으로 달 수 있었고, 많은 분들이 나를 기억해 주시는 19세 이하 대표팀 경력이 전부였다. 그래서 유망주란 단어는 내게 어울리지 않다. 그야말로 유망주는 (조)원광이가 아닌가?
어린마음에 대표팀은 새 유니폼, 축구화 등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대학에 와서 정말 열심히 하다 보니 남들이 못하는 걸(대표 발탁) 선택받아 갔다는 사실이 좋았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흔히 잘 한다는 친구들만이 모인 곳이기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엇보다 그 친구들 보다 잘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 끝까지 남아보려고 열심히 했다. 늘 훈련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대표팀에 들어가서부터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그때가 내 축구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결국 세계대회까지 출전했고 첫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날의 부상으로 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축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건 이때였던 것 같다.
부상과 도전, 그 공존 속에서
부상은 다쳤다는 아픔보다 경기를 뛸 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더 크게 다가왔다. 더욱이 세계대회 이후 대학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경기를 뛰지 못했고 나를 보는 이들은 없었다. 프로선수였다면 그동안의 보인 활동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다시 회복될 때까지의 시간이 주어지겠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니 안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해 프로로 전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어려웠다. 학교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다. 물론 학교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절박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몇몇 프로구단에서 입단 제안을 해 왔었지만 학교의 반대로 프로에 올 수 없었다.
그 후로 학교를 그만 두고 프로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다 높은 곳에 가고 싶고, 새라면 높이 날고 싶어 한다. 다 똑같은 거 아닌가? 그 때는 나름 꿈도 있고 해서 해외 리그에 도전하게 되었다. 남들이 못 가는 데 가고 싶었고, 그런 곳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물론 빅리그로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거라 생각해 중간리그(벨기에 등)에 도전했다.
입단테스트를 받으면서 남들이 받지 못함을 누리고, 스스로 도전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대표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행여 나라에 대한 흉이라도 잡히면 내 탓이라 할까봐 더 잘 하려고 했었다. 그럼에도 입단테스트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이 나를 봐 오지 못해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대하는 선수들과의 낯설음과 말이 통하지 않음 또한 어려움이었다. 그들은 약간 경계를 하는 듯 하면서도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보일 때도 있었다. 처음엔 공도 잘 주지 않았다. 그러다 좋은 장면을 연출하면 패스도 해주고, 말도 조금씩 걸어왔다.
라싱에서 처음 경기를 뛰게 되었을 때 무조건 잘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경기는 원정이었는데 경기 중 볼아웃이 되었을 때, 응원석에서 인종차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잘 하고, 열심히 하고 싶었으면 평소 성격 같지 않게 조용히 공만 줍고 바로 들어와 경기에 계속 임했는지…….
지금은 그 경기가 데뷔전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꿈만 같다. 다시 가고 싶기도 하고, TV에서 중계되는 스페인리그를 볼 때마다 나도 저기 나오고 있었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갖기도 한다.
K-리그, 도약을 위한 발돋움
국내 복귀를 결정했음에도 유럽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은 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좋지 않았고, 팀에 만족을 심어주지 못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선수들처럼 남고 싶었지만 몸이 아팠고, 다른 팀으로 가려고 기다렸는데 또 다시 다치는 바람에 그도 여의치 않았다. 수술 후 쉬면서 지금 상태로 해외로 간다는 것은 힘들 것 같았고, 그래서 국내로 복귀하기로 다짐했다.
부상으로 인해 해외진출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실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군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잘 하는 사람은 다치지 않는다고, 못 하는 사람만 늘 다치기 마련이다.
국내에 드래프트를 신청하고 큰 욕심은 없었다. 1순위, 2순위는 내게 의미가 없었다. 오직 잘 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드래프트가 있던 날, 집에서 자고 있다 에이전트로부터 연락받고 그제서야 결과를 알게 되었으니까. 물론 집이랑 가까운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다행히 인천에 오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편안하게 훈련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 인천에 왔을 때 부상 중이었다가 몸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다시 다쳤다. 빨리 회복해 팀에 보탬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팀에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 때 처음 1군 경기에 출전하여 스스로 기대를 많이 하기도 했는데, 영광 전지훈련 때 다시 부상을 당했다. 지금은 회복 중에 있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후기리그 때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국내 리그 2군에 머물고 있지만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금 열심히 훈련하고, 높은 곳을 바라보고 매 순간 최선을 다 한다면 언젠가 그 꿈을 다시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늘 낮은 마음으로 잘 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다. 나에게 축구는 아직까지 진행형이다.
#2 조원광의 Real Story - 나는‥
축구, 험난한 프로의 세계로 향하다
10살 때로 기억한다. 볼 차는 걸 좋아했는데, 집에서는 내가 축구를 하는 것에 반대를 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축구를 하셨던 터라 그 길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아시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축구를 하기 위해 전학을 가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축구선수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운 좋게 형들 경기에 같이 뛰게 되었는데 그때는 선배들이랑 같이 뛸 기회가 적었다. 공식 대회는 주로 3학년들만 나갔고, 난 연습 경기만 뛸 수 있었다. 아마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이 시기의 축구 실력은 학년대로 수준차이가 났었는데, 내가 그 안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당시 고등학교에 갔다면 아마 부평고에 진학했을 거다. 그러나 그보다는 일본고교나 프로로 가기로 정했었다. 아버지께서 권유하신 것도 있지만 친구들보다 빨리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고교 보다는 프로가 나의 바람을 더 이루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프로행을 결정하였다. 그 후에는 아버지께서 나의 진로를 주도하셨다. 안양(현 FC서울), 수원, 포항 등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결국 안양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은 중학교 중퇴한 프로선수들이 몇 명 있지만, 그 때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러니 시작은 나부터인 셈이다.
어린 나이에 당장 1군에서 뛸 수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실력있는 선배들이 많았다. 거의 2군에서 생활했지만, 한창 성장기였던 탓인지 1, 2년 사이에 많은 걸 배워나갔다. 또래 친구들 보다 훨씬 많은 걸 배울 수가 있었다. 1군에 갈 생각보다는 형들(이영표, 최태욱, 박용호 등) 따라가겠단 생각만 했다.
새로운 무대로의 도전
나 또한 해외무대에 대한 꿈을 꾸지 않은 건 아니다. 안양에서 유학을 보내주기로 약속했었지만 이행이 잘 되지 않았다. 당시 감독이셨던 조광래 감독님께 허락을 받아 해외 리그로 테스트를 받으러 다닐 수가 있었다. 몇 번의 이적 기회가 있었지만 구단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적료 문제도 있었고, 그 외의 다른 문제도 있었지만 내가 (이적 반대 문제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FC소쇼에서 축구협회로 초청 공문을 보내왔는데 협회 직원의 실수로 한달 간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우연히 협회에 가셨다가 초청장을 발견했고 초청장을 들고 안양에 찾아갔다. FC소쇼에서 내 이적료를 전부 부담하여, 마침내 해외 리그의 진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FC소쇼에 입단하기 전까지 많은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다니면서 유럽 무대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유럽인이 아니기에 유럽의 습관을 빨리 터득했고, 아시아와 문화가 다르기에 매 상황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은지 나쁜지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유럽의 잘 이루어진 체계 덕에 축구에 대한 많은 방면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로서 활동했다. 프로보다도 대표팀에서의 훈련은 정말 힘들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은 탓에 평소 알고 지낸 친구들도 없었다. 유소년 대표 시절 알던 친구 몇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함께 훈련을 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또래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표팀을 한번 갔다오면 실력이 향상됨을 알았고, 이 점이 대표생활에서 가장 좋았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낯설었지만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께서 함께 와 계셨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안정된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축구에 임할 수 있었다.
가족, 나를 지켜주는 힘
나는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지냈기에 음식, 대화 등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 나보다 부모님께서 더 힘드셨을 것 같다. 잠깐 휴식을 취하러 온 여행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같이 오신 것이었기에. 더욱이 내가 있던 곳은 교민이 20명 내외로 적은 지역이었다. 나는 팀에 가 축구만 하면 되었지만, 낯선 곳에서 아는 이들 없이 말도 통하지 않았으니 많이 심심해 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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