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2.15 15:06 / 기사수정 2008.12.15 15:06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미국은 짧은 역사에 비해 자국에 갖는 국민의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세계 경제질서를 이끄는 것도, 세계 국방을 책임지는 것도 자국민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며, 워싱턴을 비롯하여 링컨, 케네디, 윌슨 대통령 등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많은 지도자를 모셨다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고요.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민주적인 국가라고는 하나 이렇게 한 국가의 수상에게 큰 존경을 보이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 종목 모두 분야별로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목 가운데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깊은 역사만큼 자신들이 전 세계 야구계의 1%를 차지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오죽하면 ‘미 프로야구’라고 칭하지 않고 1류를 뜻하는 '메이저리그'라고 하겠는지요.
메이저리그는 분명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따라서 많은 마니아층이 오래전부터 팬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박찬호, 김병현의 등장은 일반 팬들에게도 메이저리그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에 따라 더욱 많은 야구팬이 야구 보는 안목을 키워 준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IMF 구제금융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던 1990년도 후반, 박찬호의 호투는 전 국민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하였죠.
이런 메이저리그의 등장은 분명 많은 야구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니아 일변도의 메이저리그 문화가 일반 야구팬들에게까지 널리 전파된 것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메이저리그가 '마니아층 문화'로써 '타킷 유저(target user)'들에게 더 많은 호감을 갖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국내 프로야구의 질적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굳이 메이저리그를 안 보고도 야구장에서 수준 높은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진 것도 '메이저리그의 일반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저리그가 대중 속으로 다시 빠져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메이저리그의 깊은 세계를 쉽게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이에 따라 '엑스포츠뉴스'에서는 메이저리그 담당 유진 기자를 통해 메이저리그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섯 가지 주제로 나가는 시리즈물, 'MLB야 놀자'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1편 '메이저리그의 탄생과 그들만의 프라이드'
2편 '마이너리그의 눈물 젖은 빵'
3편 '박찬호라는 존재의 의미'
4편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투수편)'
5편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타자편)'
6편 '메이저리그의 리그(?)'등의 주제가 예정에 있습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메이저리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나 readers@xportsnews.com으로 편하게 문의를 해주세요. 성심성의껏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주]
‘코리안 특급’은 선배들과 라이벌이 있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
박찬호는 한국 프로스포츠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선수다. 박지성 선수가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100경기 이상 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찬호는 야구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선수이기 때문이다. 야구의 '야'자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동양, 그것도 한국인이 종주국에서 각종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역경을 딛고 1류로 거듭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박찬호는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여러 기록을 남긴 것을 넘어서 동양에서도 몇 안 되는 기록이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동양인으로써는 최초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많은 화자가 되고 있다. 8,000명이 넘는 마이너리거들을 단숨에 제치고 루키 자격으로 빅리거가 됐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한 박찬호의 성공은 사실 선배들이 쌓아 놓은 업적이 없었다면 그 효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찬호가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계약’만 놓고 본다면 한국인 1호는 박찬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에 빛나는 ‘무쇠팔’ 최동원이다.
최동원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1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메이저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그 전까지 미 프로야구에서 뛴 선수들은 있었으나(박철순, 이원국) 그들은 모두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최동원과는 분명 달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아직까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임의탈퇴선수 명단에 최동원의 이름이 남겨 있다. 만약에 당시 군 문제와 프로구단 창설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최동원은 주저 없이 미국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미국행이 가시화됐다면 구도 부산의 ‘야생야사’ 이야기가 거론되지도 못했을 것이며, 박찬호의 빅리그 진출 또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선동열 삼성감독 역시 현역 시절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의받은 바 있다. 1984년, 당시 LA다저스의 부사장이었던 알 캄파니스는 계약금 50만불을 제시하며 선동열을 영입하고자 발품을 판 적이 있었는데, 선동열은 군 문제와 소속팀 계약문제로 인하여 미국행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즉, 박찬호의 미국행은 두 선배의 존재가 있었기에 더욱 빛이 났던 것이다. 또한, 박찬호의 아마시절 경쟁상대였던 세 선수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로 연세대학교 임선동, 고려대학교 조성민, 홍익대학교 손경수가 그들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찬호의 네임 벨류는 이들 ‘트로이카’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박찬호에게는 이들 라이벌들의 존재가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 한양대학교 시절때 까지만 해도 박찬호는 드러나지 않은 ‘숨은 보석’ 이었다
자신과의 싸움
1994년, 계약금 70만 불에 미국행을 택한 박찬호에 대한 시선이 따뜻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해외진출에 대해 '무모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으며, 빅리거들을 상대로 빠른 볼만을 주무기로 삼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혹독한 평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실제로 박찬호는 겁없이 뛰어 든 데뷔무대에서 단 4이닝 투구에 그치며, 마이너리그 더블A로 내려가게 된다. 자신과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의 어려움은 말로 표현하지 힘들 정도다. 앞서 '마이너리그의 눈물 젖은 빵'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고된 훈련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것은 언어와 문화적인 문제다. 16시간이 넘는 버스동행을 하며 통역까지 동행해야 하며, 미국을 포함한 중남미 선수들과의 소통에서 동양인은 상대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선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소통의 장'이 열리지 않을 경우 주먹싸움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콧대 높은 선수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들보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먼저 살갑게 다가서는 것이다.
그들을 인정하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자가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박찬호는 스스로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통역고용을 중단한 바 있다. 그리고 되든 안 되든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그들과 같이 뒤섞였다.
그렇게 몸으로 뛰며 건장한 모습을 보였던 ‘마이너리거’ 박찬호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1995년). 당시 두 경기에 등판하여 4이닝을 던졌을 뿐이었지만, 이때 잡아낸 탈삼진 숫자는 7개로써 이닝당 1.75개였던 셈이다. 나름대로 마이너리그에서 적응을 마친 박찬호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셈이었다.
박찬호의 빠른볼은 입단 당시부터 이미 LA인근 야구팬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고 난 후 2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1996년 당시, 선발과 불팬을 오가며 100이닝 이상을 던졌던 박찬호는 5승 5패, 방어율 3.64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LA 마운드를 이끌 재목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라몬 마르티네즈, 페드로 아스타시오, 이스마엘 발데스를 포함한 굴지의 10승 투수들과 선발마운드 경쟁을 펼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1997년, 풀타임 선발의 기회를 잡은 박찬호는 5연승을 포함하여 시즌 14승을 거두었다. 빠른볼만으로는 빅리그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무색하게 만든 성적임엔 틀림없었다. 미국 진출이 절대 무리수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IMF 시절 : 두 '박씨'의 미국무대 성공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박찬호의 활약은 미국무대의 참맛을 보여 준 계기를 마련했지만 이와 상관없이 국내 경제는 한없이 침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우리나라는 급기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악화되기에 이른다.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국민에게 남은 것은 시름과 고통뿐이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타지에서 호성적을 거둔 박찬호 선수의 활약은 ‘경제’라는 어두운 그늘에 가려진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홍안소년' 박찬호를 포함하여 미 LPGA에서 첫 승리를 올린 박세리의 활약 역시 큰 이슈가 됐다. IMF 사태로 인하여 국가 신용등급을 낮추는 등 미국경제로 인하여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국민들이 그 ‘미국땅’에서 대활약을 펼친 두 박씨로 인하여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스포츠 외적으로 많은 것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박찬호는 IMF를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국민과 함께했다. 1997년 14승을 포함하여 1998년 생애 최초로 15승 달성에 성공하며, 다저스 마운드의 2인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응원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었지만, 그는 이 또한 이겨내며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국가대표 : 막내에서부터 맏형 노릇까지
야구의 본고장에서 선전을 펼치고 있는 그를 KBO가 가만 놔둘 리 없었다. 1998 시즌 15승을 거둔 박찬호는 그 해 방콕 아시안게임 '드림팀 Ⅰ'에 전격 선발되었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했던 당시 국가대표팀은 주성노 감독을 중심으로 마운드의 박찬호를 비롯하여 92학번 트로이카 멤버 중 하나였던 18승 투수 임선동, 성균관대학교 김병현 등이 선발되었으며, 타선에서는 안타제조기 이병규를 포함하여 김동주, 박재홍, 조인성, 백재호 등 프로와 아마에서 당대 1류 선수들이 대거 선발되기에 이른다.
드림팀이라는 이름에 맞게 국가대표팀은 모든 경기를 싱겁게 끝냄으로써 완벽한 전승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본 아시안게임으로 인하여 중국전에서 5이닝 퍼펙트를 기록한 김병현이 애리조나 스카우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때 당시 박찬호는 빅리거에 걸맞게 선발과 릴리프를 오가며 전천후 활약을 펼쳤다. 박찬호가 불펜에서 몸을 풀기만 해도 상대팀 선수들이 긴장을 할 만큼 그의 존재는 국가대표팀에 절대적이었다.
이후 박찬호는 국가대표팀이 구성될 때마다 매번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본인 또한 태극마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시즌 스케줄이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박찬호가 다시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은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었다.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올림픽 등 각종 대회에서 개인/팀 사정상 불참했던 것과는 달리 오프시즌에 진행됐던 WBC에는 참가에 제한이 없었다. 1998년도에는 막내로써 빅리거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2006년도에는 어느덧 고참 선수로 마운드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서재응, 김병현, 김선우, 봉중근 등 미국 프로야구를 경험했던 선수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의 침착함은 특히 1라운드 對 일본전에서 더욱 잘 나타났다. 마무리 투수로 나선 박찬호는 마지막 타자인 이치로와의 대결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으며, 침착하게 그를 범타처리했다.
그의 배짱은 2라운드에서도 변함없었다. 2라운드 일본과의 두 번째 대결에서 선발로 나선 박찬호는 5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티며, 우리나라의 2:1 승리를 알리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처럼 WBC는 ‘일본과 미국을 이겼다’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확고히 한 것과 더불어서 박찬호 본인에게도 내부적으로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대회였다.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박찬호는 샌디에고에서 8승을 거두며 텍사스 시절에 빠진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했기 때문이었다.
▲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당시 박찬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열심히 뛰었다.
그런 박찬호가 다시 2009 WBC를 향해 문을 두드렸다. 물론 FA로 다년계약을 이끌어 낼 경우 참가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노장 김인식 감독의 아픈 속내를 배려한 그의 이런 결심은 보통 선수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이 이름불린 그가 국가대표의 중요성과 명예성을 모를 리가 없다. 국가대표는 국민이 만들어 준 자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 : 당신이 단지 거기에 있기에……
미국 위인전을 살펴보면, 야구선수들이 다수 있다. 특히, 베이브 루스의 위인전을 읽고 소년들이 꿈과 용기를 얻는다는 일화는 미국 내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는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래도 야구선수인데 야구 빼고 뭐 있겠나. 미국사람들 허풍은 유명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IMF라는 힘든 시기에 박찬호를 통하여 많은 꿈과 용기를 얻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해 박찬호 본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당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라며 겸손하게 물러났지만, 적어도 그가 빅리그 마운드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에 큰 획을 그은 것임엔 틀림없었다.
그러한 '존재의 의미'가 국민들에게 큰 사기로 돌아와 IMF 시대를 초고속으로 졸업한 바탕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한,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간의 냉각 기류가 흐를 때 박찬호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일본을 네 차례나 이기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과 2006년 WBC다. 공교롭게도 일본이 독도 문제로 외교문제를 야기할 때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 있어하는 야구에서 늘 우리나라에 무너졌다.
적어도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그가 어떤 성적을 내든 그를 끝까지 믿고 응원해야 할 일종의 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빅리그 진출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라는 압박감을 지니고도 100승이라는 훌륭한 금자탑을 쌓았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그를 계기로 많은 야구팬이 메이저리그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과 그를 필두로 조진호, 김병현, 서재응, 봉중근, 김선우, 송승준 등이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은 무시 못할 사실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다. 바로 그가 '그 곳(메이저리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라는 자부심으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사진 = 한양대 시절 박찬호(C) 일간스포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C) 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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