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0.21 16:28 / 기사수정 2008.10.21 16:28
성남에서만 프로 생활 8년, 그러나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길고 길었던 2군 시절, 겨우 잡은 기회는 천국과 지옥을 전부 맛보게 했다. 미련은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골키퍼로서의 끈을 놓지는 못했다.
모교인 명지대로 돌아와 GK 코치로 새 인생을 시작한 양영민, 그를 U리그가 열린 용인 명지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나 그동안의 근황이 궁금하다.
양영민(이하 양) : 은퇴 후 바로 명지대로 넘어와 지도자 일을 시작했다. 2년차 GK 코치다. 07년 팀에 들어오자마자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1급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대학 코치 중 단 세 명만이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나다.
프로 8년간 빛을 본 선수는 아니었다.
양 : 그렇지. 딱히 그 점에 대해 미련이라던가 실망했다던가 그런 건 별로 없다. 난 내게 온 기회를 잡지 못한 것뿐이고, 대학 졸업하고 상무로 가 바로 군 복무를 하고 성남에 입단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프로의 벽은 높았다.
학생 시절엔 하려고 하면 될 것만 같았는데 프로는 그게 아니더라고. (성남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으면 이적이나 다른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 다른 팀에 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해도, 못해도 여기(성남)서 어떻게 해결을 보자는 생각이었다. 빛나든 아니든 마무리까지 성남에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상무는 프로팀이 아니었을 텐데
양 : 그렇긴 한데 그 당시엔 대표팀 가는 것보다 상무에 입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나와 같이 입대한 멤버가 96년 아시안 컵 대표가 6명이나 있었다. 최용수, 최성용, 박남열, 이영진, 한정국, 김대식, 조진호, 김한욱, 박철 정도가 그 당시 입대 멤버였으니 나름 대단하지 않은가.
다른 팀에서 제의는 한 번도 없었나?
양: 왜 없었겠나. 사실 은퇴를 결정하고 지도자 교육에 들어갔을 때 그 당시 창단을 준비하던 프로팀에서 2년만 더 뛰자고 제의가 들어왔다. 가지 않았다. 이미 지도자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장갑을 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결정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련이나 후회 같은 건 없다.
성남팬에게 양영민 하면 떠오르는 경기가 있다.
양 : 2004년 AFC 결승 말인가. 나에겐 천국과 지옥을 모두 오간 경기였다. 그때 당시 (김)해운이 형이 부상으로 경기를 뛸 수 없었고, 상철이와 나였는데 '아, 이번은 기회다.'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뛰고 싶다는 내 의지를 피력했고 그게 통해 뛰게 되었다.
1차전에서 3-1로 승리를 거뒀는데, 그때 그 경기가 15분 정도 한국에는 방송되지 않았을 거다. 그때가 정말 중요한 상황이었다. 상대 공격수가 나를 바로 앞에 두고 헤딩 슛을 시도했는데, 누가 봐도 들어갈 골이었다. 그걸 겨우 손으로 쳐내고 넘어졌는데, 튕겨져나온 공을 다시 넘어지면서 슈팅을 하더라. 다시 몸으로 막았다.
독하게도 그걸 또 차더라. 근데 그걸 또 막았다. 그때 그 경기장에 있었던 사람 말고는 모르는 일이지만, 난 그걸로 그 경기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홈에 와서 5-0으로 졌으니까, 그게 문제였지만. 그때는 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해이해져 있었다. 결승 1차전이 정말 힘들었는데 그걸 이겼으니까.
사실, 진 것도 진 것이지만 그 경기 결과로 인해 차경복 감독님께서 성남 감독뿐만이 아니라 축구계를 떠나게 된 원인이 된 것 같아서 지금도 속상하고 슬프고 그렇다.
그렇게 끝나고 나서 상처가 컸다.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까 김학범 감독님이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벌벌기냐. 정신 차리라.'고 하셨다. 그걸로 겨우 정신 차리긴 했지만,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난 AFC 결승에 간 걸 내 축구 인생의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들으면 웃길 수도 있지만, 국가 대표는 어떻게 하면 갈 수도 있겠지만, AFC, 그리고 결승이라는 건 나만 잘한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팀이 리그에서 우승해야 되고, 아시아의 각 리그에서 우승한 팀들을 꺾고 결승까지 간 거다. 우승까지 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 모교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참 어린 선수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일 뿐, 그 자유에 필요한 책임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런 태도에 대해 한참 동안 성토했다.
양: 처음에 학교에 딱 왔는데, 애들이 운동을 나오잖아. 근데 다 각자 입고 나오는 거야. 어떤 놈은 빨간색, 파란색, 주황색, 흰색. 근데 뒤엔 다 명지대학교라고 쓰여 있어. 요즘은 조기회도 다 맞춰 입고 운동하는데 이거 조기회보다도 못하단 생각이 들더라고. 축구는 단체운동이잖아. 그걸 모르는 건지. 그래서 주장 불러서 얘기했지. 내일부터 색 맞춰 입고 나와라.
그리고 왜 경기장에 들어가야 경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 경기에 대해 오전에 미팅을 하면 그때부터 이미 경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하고 집중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 그러니 뭐가 되겠느냐고.
'축구선수'라는 타이틀을 다른데 쓰려고 하지 그라운드에서 쓰려고 하지를 않아. 자유롭고 싶은데 그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근데 더 웃긴 건, 프로 2군 애들도 그래. 나도 물론 2군에서 생활을 했지만 어린 애들일수록 더 그렇더라고. 뭐랄까. 생활에 리듬이 없어.
이런 일도 있었어. 아파서 운동을 그만두고 싶대. 근데 재활 센터에 한 달에 한 90만 원씩 주고 재활하러 다니더라고, 그러면서 와서는 '한국의 지도자들은 다 무식하다.'라면서 그만두겠대. 그래서 그랬어. 너 재활하는 동안, 거기서 복근운동 상체운동 하체운동 하지. 내가 그거 안 시키냐? 횟수와 운동 방식이 약간 다를 뿐이지.
너 한국 지도자들이 무식하다 그랬느냐. 그랬더니 네. 그러더라고. 내가 그래서 너 나 지난겨울에 못 봤을 때 어디 갔다왔는 줄 아냐. 그랬더니 모른대. 소위 말하는 유럽축구 배우러 네덜란드 갔다왔다 그랬어. 별말 못하더라.
근데 그것도 이상하지 않느냐. 지도자들 다 무식한데, 왜 유럽 갔다왔다니까 별말을 못해. 갑자기 똑똑해 보이나. 그냥 운동하겠다 그러더라.
네덜란드에서 느낀 건 없나?
양 : 어느 팀 감독이 초청을 해서 경기를 보러 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클럽하우스까지 가게 되었거든. 그때 내 일행 중 한 명이 모자를 쓰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어. 계속 별말 않다가 클럽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감독이 그러더라고. "모자 벗고 이어폰 빼. 여기에 축구와 관련없는 핸드폰, MP3, 노트북, PSP 같은 거 들여오려면 그냥 나가."라고.
축구 때문에 왔으면 철저히 축구에만 집중하라 이거야. 맞는 말 아냐?
그가 소속된 명지대는 올 시즌 U리그에서 10팀 중 5위로 중간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팀 지원도면에서는 여타 다른 팀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선수들에게 나오는 축구화나 트레이닝 복 같은 물품도 그렇고, 인조 잔디이긴 하지만 잔디를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명지대 선수들에겐 행운이다. 비록 팀 이름과 점수가 표시되는 것이 전부이긴 하지만 경기 땐 인조 잔디 구장에 설치된 전광판도 쓸 수 있다.
양: 학교 측에서 많이 관심을 가져주고 지원을 해주니까 고맙지. 애들이 맘 놓고 운동만 할 수 있잖아. 이런 좋은 환경인데 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거두고 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무심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한다. 아니라 말하면서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학원 축구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난다. 이쯤 되니 그의 꿈이 궁금해졌다.
양 : 내 꿈? 딱 두 가지야. 지도자로서 엄청나게 성공하던가, 아니면 공부해서 교수님이 되던가. 둘 중 하나는 될 수 있지 않겠어?
선수로서의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의 단단한 꽃봉오리를 맺은 그의 꽃이 활짝 피기를, 그 꽃이 더 나은 학원 축구를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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