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4.01 08:50 / 기사수정 2008.04.01 08:50
[엑스포츠뉴스=김경주 기자] 지난 주말, 봄을 재촉하는 단비와 지방에 몰린 리그 덕에 오랜만에 집에서의 편한 주말을 맞던 기자는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게 영 맘에 걸려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 중계 채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게 찾은 중계 채널 창 두 개를 함께 띄워놓고 보던 경기 중 전남과 대전의 경기에서 왼팔에 주장완장을 채운 채 그라운드를 달리는 10번의 고종수가 눈에 띄더군요.
이 날 고종수는 자신의 고향 근처인 광양 전용구장에서 자신의 친정팀인 전남과의 경기를 가졌습니다. 어느 때보다 열심히 뛰고 있음이 모니터 너머로도 전해졌습니다. 그런 그를 보자니 문득 1년 전 대전 월드컵 경기장이 떠올랐습니다. 2007년 3월 11일, 겨우내 조용히 잠들었었던 퍼플 아레나는 대전과 울산의 K리그 경기로 그 누구보다 분주한 봄맞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경기장 안팎에서는 대전의 서포터들이 선수들만큼 들뜬 마음으로 새로 시작되는 리그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들에 의해 퍼플 아레나의 벽에는 팀의 승리와 선수들을 독려하는 화려한 색의 걸개들이 내걸렸습니다.
그들의 열정 속에서 한발 떨어져 경기장을 한 바퀴 휘휘 돌며 봄을 만끽하던 기자의 눈에 작은 무언가가 띄었습니다. 화려하고 커다란, 컴퓨터로 뽑아내 글씨들도 참 정갈하던 걸개들 사이에 투박하게 손으로 쓴 작은 색지 하나가 조용히 붙어있더군요. 그 분홍빛 작은 색지에는 ‘고종수! 돌아와서 고마워.’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10대 소녀들이 들고 다니는 플랜카드처럼 예쁘게 치장한 것도 아니고, 열혈 서포터들의 페인트칠 가득한 강한 걸개도 아닌, 단지 펜으로 몇 번을 덧칠해 쓴 그 짧고 투박하지만, 말 그대로 고마움이 가득 담긴 그 색지를 보며 문득 맘 한구석이 아련해져 가만히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로 그 색지를 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날 고종수는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유니폼 대신 두꺼운 점퍼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팀 사인회에 참여했을 뿐이었죠. 그 후 그는 다른 2군 선수들과 함께 4층에서 경기를 관전했습니다. 묵묵히 앉아 초록 그라운드를 달리는 동료들을 바라볼 뿐 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고종수를 그라운드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오늘, 혹은 내일 그가 돌아오리라 예측을 내놓았지만 그는 묵묵부답, 그동안 잃어버린 감각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라운드에 첫 발을 내딛은 건 그로부터도 6개월 뒤인 2007년 8월 12일, 포항과의 경기였습니다. 이 날 후반 35분 데닐손과 교체되어 1년 반 만에 초록 잔디를 밟은 그는 단 10분의 출전 기록을 가지게 됩니다.
10분, 어찌 보면 참 짧고 별 것 아닌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이 10분을 위해 고종수는 1년 하고도 반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 날 그 색지의 주인공도 경기장을 찾아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의 컴백을 지켜보며 기뻐했겠죠?
그라운드로 돌아온 고종수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끌어올렸습니다. 출전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9월 15일 서울과의 경기에선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90분을 모두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2008 시즌 그의 왼팔에는 대전의 자줏빛 유니폼 외에도 다른 색의 무언가가 걸쳐져 있습니다. 바로, 주장 완장이죠. 2007 시즌 중반 그를 그토록 아끼던 김호 감독이 대전에 부임하게 되었고, 김호 감독은 고종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나섰죠. 그런 김호 감독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새어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주장 완장은, 단지 그를 편애하는 마음이 아닌 그에게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워 그가 자신의 그라운드에 대한 책임감을 가졌으면, 그래서 두 번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건넨 것일지도 모릅니다.
주장 완장을 왼팔에 걸치고 나서부터 그는 좀 더 나서서 선수들을 다그칩니다. 경기 중 손발이 맞지 않으면 잔뜩 높아진 그의 목소리가 그라운드 어느 곳에선가 들려옵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손짓 발짓까지 가득 섞어 동료들을 다그치곤 하죠.
고종수, 한때 천재라 불리던 사나이. 그리고 잊혀진 천재라 뭇매를 맞았던 사나이. 자신조차도 모든 것을 포기했을 거라 여겼던 많은 사람의 조롱을 뒤로 한 채 그는 여전히 그라운드에 서 있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은 예전 그 화려하던 ‘천재’ 고종수에 미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릅니다. 별다를 게 있겠냐고 한마디씩 하고 싶기도 하겠죠.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다만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기자 입장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와 10분, 30분, 그리고 다시 90분을 달려주는 그가, 90분 내내 다른 10명과 달리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등에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가슴에 어느 한 팀의 상징을, 왼팔엔 그 팀을 대표한다는 주장완장을 달고 그라운드 안에 서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고마워집니다.
2007년 3월 11일에 걸렸던 그 분홍빛 색지의 주인공도 퍼플 아레나 어느 한 곳에서 초록 그라운드를 달리는 고종수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겠죠. 천재가 아니라도, ‘고종수! 돌아와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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