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신태성 기자] 3일(한국시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린 2015~2016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에서 토트넘 홋스퍼가 첼시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레스터 시티가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시즌 중반까지 레스터의 상승세를 보고 ‘어차피 나중에 내려갈 팀’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레스터는 예상을 깼다. 결국 구단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마법 같은 레스터 시티의 우승은 ‘덕장’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니에리는 2015~2016시즌을 앞두고 레스터에 부임해 선수들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고 개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시켰다. 선수들과 깜짝 파티를 하는가 하면, 단기간 목표를 설정하고 시즌 중간 선수단에 짧은 휴가도 줬다. 또한 팀 내 최다 득점자 제이미 바디의 증언에 따르면 라니에리 감독은 경기 전 상대팀에 대한 비디오 50~60편을 본다고 한다. 라니에리의 특이하면서도 특별한 노력이 레스터의 우승을 만든 셈이다.
레스터에 오기 전, 라니에리는 1위보다 2위가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라니에리의 이름 앞에는 ‘성공한 감독’보다 ‘승격 청부사’, ‘소방수’, ‘만년 2인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러한 별명을 얻기까지 라니에리의 발자취는 어땠을까. 지금까지 라니에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승격 청부사’
라니에리는 1986~1987시즌 이탈리아의 아마추어 리그 캄피오나토 인테레지오날레(현 세리에D)에 소속된 비고르 라메티니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감독으로 데뷔한 시즌 라메티니를 세리에C2로 승격시킨 라니에리는 다음 시즌 세리에C1의 SSD 푸테올라나를 맡았다. 푸테올라나는 해당 시즌을 17위로 마감하며 강등됐지만 지난 시즌 라메티니를 승격시킨 능력을 높이 산 칼리아리가 러브콜을 보내 라니에리는 세리에C1에 남게 됐다.
이때부터 라니에리가 유럽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라니에리는 지휘봉을 잡자마자 팀을 첫 시즌에 세리에B로, 그 다음 시즌에는 세리에A로 승격시키며 칼리아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1990~1991시즌 처음 세리에A를 경험한 라니에리는 칼리아리와 함께 승격시즌 잔류라는 성과를 냈다. 성공적으로 감독 경력을 쌓아가는 라니에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팀이 있었으니 바로 SSC 나폴리다.
그 시점에 나폴리는 ‘나폴리의 보물’ 디에고 마라도나가 약물 파동으로 팀을 떠나며 어려워진 실정이었다. 1989~1990시즌 우승을 거두었으나 바로 다음 시즌인 1990~1991시즌을 8위로 마감하고 에이스까지 빠지며 위기에 봉착한 나폴리는 젊은 감독 라니에리에게 기대를 건다. 라니에리는 마라도나의 빈자리를 기존 로테이션 자원이던 지안프랑코 졸라로 메우며 4위라는 성적을 거둔다. 이대로 세리에A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지만 1992~1993시즌은 11위에 머물며 팀을 떠난다.
다음 행선지는 세리에B의 피오렌티나였다. 피오렌티나의 여건은 나폴리보다 더 좋지 않았다. 피오렌티나는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죠가 유벤투스로 떠난 뒤 1992~1993시즌 16위를 기록하며 세리에B 강등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라니에리는 여기서도 자신의 능력을 보였다. 라니에리는 기존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신입생 후이 코스타를 활용해 피오렌티나를 세리에B 우승으로 이끌며 한 시즌 만에 세리에A에 복귀시켰다. 이후 세리에A에서 세 시즌을 더 머물며 10위, 4위, 9위를 기록하고 1995~1996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까지 거머쥔 라니에리의 눈은 이제 다른 곳을 향했다.
라니에리의 외국 도전기
라니에리의 첫 외국 감독직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였다. 선수시절에도 이탈리아를 벗어나본 적 없는 라니에리는 1997~1998시즌을 앞두고 스페인 행을 택한다. 발렌시아는 직전 시즌 리그 10위에 그친 호르헤 발다노 감독과 이별한 직후였다. 라니에리는 부임 뒤 ‘주장’ 가이즈카 멘디에타를 필두로 1980년 이후 우승컵과 거리가 멀었던 발렌시아에 두 시즌 동안 코파 델 레이, UEFA 인터토토컵 우승을 안겨줬다.
스페인 도전기를 성공적으로 시작한 라니에리는 이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향했지만 성적이 바닥을 치며 한 시즌도 못 채우고 경질 당했다. 아틀레티코는 이 시즌 ‘주포’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가 24골로 리그 득점왕 2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2부 리그인 세군다리가로 강등되고 만다.
라니에리가 일자리를 찾기 시작한 2000~2001시즌, 마침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첼시 감독직이 공석이 된다. 이전까지 팀을 이끌던 지안루카 비얄리가 시즌 개막 후 5경기 만에 선수단과의 불화로 사퇴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 라니에리는 잉글랜드로 넘어가 한때 자신이 지도했던 졸라, 하셀바잉크와 재회하게 된다. 라니에리는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추슬러 첼시를 UEFA컵(현 유로파리그)에 진출시켰다. 이 시즌에 라니에리는 하셀바잉크를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등극시키고, 그 전까지 경기에 거의 나오지 못했던 ‘신인’ 존 테리에게 출전 시간을 보장해준다.
라니에리는 첼시에서 2년차에 접어들자 선수단을 개편한다. 미드필드에는 은퇴를 앞둔 로베르토 디 마테오, 토트넘으로 이적한 거스 포옛을 대체하기 위해 프랭크 램파드, 엠마누엘 프티, 부데바인 젠덴을 영입했다. 수비수로는 프랑크 르뵈프를 떠나보내고 윌리엄 갈라스를 영입했으며 유소년 팀에서 로베르트 후트를 발굴해냈다. 라니에리의 과감한 결정은 해당 시즌 6위에 그쳤지만 2002~2003시즌 4위, 2003~2004시즌 2위로 순위가 상승하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2003~2004시즌에는 구단주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부임하며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클로드 마케렐레, 조 콜, 데미언 더프, 웨인 브릿지 등이 성공 사례로 남아있다. 물론 에르난 크레스포,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과 같이 이적료에 비해 부진했던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라니에리는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야망을 채워주기엔 부족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우승을 원했고 ‘스페셜 원’ 주세 무리뉴의 영입을 위해 라니에리가 팀을 떠나게 됐다. 라니에리는 2004년 여름 라파엘 베니테즈의 후임으로 발렌시아에 돌아갔으나 성적부진으로 시즌 도중에 사임하고 만다.
위기 팀의 ‘전문 소방수’ 라니에리
1년 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라니에리에게 2007년 2월에 손을 내민 것은 이탈리아 세리에A의 파르마였다. 당시 파르마는 코파 이탈리아 8강 탈락, UEFA컵 32강 탈락, 세리에A 23라운드까지 승점 15점 획득으로 강등 위기에 처해있었다. 라니에리는 남은 15경기에서 27점을 따내며 파르마가 12위로 시즌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만들었다. 라니에리의 기적과도 같은 잔류 이야기는 그를 다수의 팀들이 눈독들이게 했다. 그중 라니에리의 선택은 1부 리그로 돌아온 세리에A의 절대 강자, 유벤투스였다.
거대 승부조작 스캔들인 ‘칼치오폴리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유벤투스는 그에 대한 징계로 창단 이후 첫 강등을 당하며 2006~2007시즌을 세리에B에서 보냈다. 1년 만에 세리에B 1위로 승격을 확정지은 유벤투스는 라니에리에게 ‘소방수’ 역할을 맡겼다. 라니에리는 유벤투스를 승격 첫 시즌부터 3위에 안착시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두 번째 시즌에는 2위의 성적으로 유벤투스를 다시 세리에A의 강자로 명예회복 시켰으나 시즌 막판에 리그 7경기 연속 무승(6무 1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세리에의 팀들은 ‘소방수’ 능력이 검증된 라니에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2009년 9월 AS 로마의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이 이적 시장 실패에 개막전 2연패가 더해지며 사임하자 라니에리가 후임자로 점 찍혔다. 라니에리는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시즌이 끝날 때 리그 준우승을 선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번째 시즌을 넘기지 못했다. 야심차게 ‘돌아온 탕자’ 아드리아누를 브라질 리그에서 다시 데려오며 시즌을 준비했지만, 2011년 2월 리그에서 8위로 부진하던 중 3연패를 당하며 야인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후 2011~2012시즌 도중 인터 밀란에도 잠시 투입됐으나 급한 불을 끄는 데 실패하며 약 6개월을 버티고 물러났다.
라니에리는 2012년 5월 프랑스 행 기차를 탔다. 그는 2003~2004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2부 리그까지 떨어진 AS 모나코로 발을 옮겼다. 강등 2년차인 모나코는 ‘우승 청부사’ 전력이 있던 라니에리에게 승격을 요구했고 라니에리는 바로 기대에 부응했다. 지휘권을 인수한지 1년 만에 2부 리그 1위로 프랑스 리게1에 입성한 라니에리는 신흥 부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대대적인 선수단 물갈이에 들어갔다. 기존 선수들을 처분한 뒤 데려온 선수들은 하메스 로드리게스, 라다멜 팔카오, 주앙 무티뉴, 앙토니 마샬 등이었다. 강해진 선수단으로 2013~2014 리게1 준우승을 거둔 라니에리지만 구단주가 쿠프 드 프랑스 1차전 탈락을 문제 삼으며 경질시켰다. 이후 그리스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지내지만 유로2016 조별예선에서 파로제도에게 충격패를 당하며 2014년 고작 4경기 만에 해임됐다.
‘미생’들과 첫 1부 리그 우승컵을 들기까지
2015년 라니에리는 잉글랜드에 재차 자리를 잡았다. 2014~2016시즌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해 14위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잔류에 성공한 레스터가 라니에리와 거스 히딩크, 닐 레논 사이에서 고민 끝에 구애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라니에리는 3년 계약을 맺으며 나이젤 피어슨 대신 레스터의 수장이 됐다. 유벤투스 시절 지략가의 면모를 보이며 ‘늙은 여우’라는 애칭을 얻은 라니에리가 여우를 엠블럼으로 삼는 레스터와 손을 잡은 것이다.
괴팍하고 기분파였던 피어슨 전 감독과 달리 친근한 ‘긍정왕’ 라니에리는 들어오자마자 선수들을 살폈다. 피어슨 휘하에서 주로 처진 공격수 자리에 출전하며 리그 5골에 그친 제이미 바디를 과감히 최전방으로 보냈다. 리야드 마레즈에게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불어넣어 팀의 ‘에이스’ 역할을 부여했다. 첼시 시절 자신이 발굴한 후트를 임대생 신분에서 완전 영입하기도 했다. 이어 전 포지션에 걸쳐 선수단 보강에 돌입했다. 샬케04에서 크리스티안 푸흐스를, 마인츠05에서 레스터 역대 최고 이적료인 7백만 파운드(약 117억 원)를 들여 오카자키 신지를 데려왔다. 또한 팀 내 최고의 스타였던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재계약이 불발되자 은골로 캉테, 괴칸 인러로 중원 강화에도 나섰다.
라니에리의 레스터가 프리미어리그 전반기에 승점을 얻지 못한 것은 단 2경기였다. 간신히 강등을 면한 팀이 그 다음 시즌 19라운드까지 11승 6무 2패를 거둘 확률은 얼마나 될까. 팀뿐만이 아니라 선수들도 잘나갔다. 골잡이로 활약한 바디는 11경기 연속골이라는 신기록을 경신하며 득점 1위를 달렸고, 마레즈는 13골 7도움으로 전반기 최다 공격포인트 선수가 됐다.
2005~2006시즌 위건 애슬래틱의 돌풍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은 레스터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 예상했다. 당시 위건은 11라운드까지 리그 순위 테이블에서 두 번째 자리를 지키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결국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던 바 있다.
하지만 레스터는 달랐다. 레스터는 23라운드 이후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더 가관인 것은 라니에리의 인터뷰였다. 라니에리는 레스터가 리그 1위에 올라있는 상황에서도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섣불리 우승을 입에 올리지 않으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질문하는 기자들을 향해 “우리는 운이 좋은 것뿐이다. 우승 가능성은 다른 팀이 더 높다. 우리의 목표는 우선 잔류고, 다음은 유럽대항전 진출이다”라고 주위의 기대를 낮췄다.
이러한 인터뷰 덕분인지 선수들은 부담감을 덜고 경기에 임했다. “성적을 내기보다는 경기를 즐기기 원한다”라는 라니에리의 말처럼 선수들은 경기를 즐겼고 이는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레스터의 우승을 의심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기대하기 시작했고, 기대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라니에리는 4월 23일 인터뷰에서 ‘만년 2인자’의 설움을 토로하며 처음으로 강한 우승 열망을 드러냈다. 마침내 레스터는 리그 2경기를 남겨두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선수단 전체 몸값이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미생’들에 불과했던 레스터의 우승은 기적과도 같았다. 라니에리는 만년 2인자에서 ‘기적의 사나이’가 됐다.
라니에리는 가는 팀마다 선수를 잘 활용했다. 졸라와 멘디에타의 능력을 끌어올렸고, 테리와 후트에게 기회를 줬으며, 후이 코스타와 램파드를 새로운 팀의 주축으로 만들었다. 레스터에서도 라니에리의 ‘선수 활용법’은 빛을 발했다. 바디와 마레즈가 각성했고, 대니 심슨과 마크 올브라이튼의 출전 시간이 전보다 늘어났으며, 캉테와 푸흐스는 새 둥지의 중심이 됐다.
전술도 용병술도 모두 훌륭했다. ‘선수비 후역습’의 정석을 보여주는 효율적인 축구로 어떻게 해서든 승리를 얻어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리적인 경기 운영을 펼치며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또한 선수들의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스타 선수 없이도 리그를 지배했다.
기적을 쓴 라니에리에게는 어김없이 러브콜이 쇄도했다. 그러나 라니에리는 레스터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라니에리는 이탈리아 대표팀 부임설에 대해서 단지 추측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때 몸담았던 첼시가 시즌 종료 후 감독 선임을 원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라니에리는 레스터에서 은퇴하기 원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라니에리는 이미 레스터에서의 다음 시즌을 구상하고 있다. 이들의 동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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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