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7.03.08 21:59 / 기사수정 2007.03.08 21:59
[엑스포츠뉴스=런던, 안희조기자] 잉글랜드에서 축구를 현장에서 보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할까요?
현재 런던에 체류 중인 저는 아스날과 PSV 에인트호벤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새로 지어진 에미리츠 스타디움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PSV 에인트호벤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이 벌어진 7일, 에미리츠 스타디움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더욱 힘겨웠습니다.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튜브역인 아스날(Arsenal)역은 물론 그 앞 역인 홀로웨이 로드(Holloway Road) 역까지 모두 차단됐거든요.
많은 지하철 노선이 교차하는 킹스크로스-ST.판크라스(King's cross St. Pancras)역 곳곳에는 ‘에미리츠 스타디움으로 가는 승객들은 아스날, 홀로웨이 역이 있는 피커딜리 라인 대신 빅토리아 라인을 이용해 하이버리&이슬링턴 역에서 내리십시오.’라는 문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리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하이버리&이슬링턴(Highbury&Islington) 역은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꽤 떨어져 있는 역이고 그것은 경기장에 가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거든요.
예상과 다른 길이었어도 에미리츠 스타디움을 찾아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저 붉은 Gunners(아스날의 애칭)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많은 이들의 무리만 잃지 않으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이버리&이슬링턴으로 가는 지하철은 이미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홀로웨이로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홀로웨이로드 주변에 위치한 몇몇 펍들은 벌써 경기를 앞두고 술기운에 흥겨운 아스날의 팬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펍 안의 TV에는 경기에 대한 전망을 하는 SKYSPORTS의 방송이 틀어지고 있었고 손에 술잔을 든 많은 사람은 저마다 경기에 대한 전망을 늘어놓기에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아스날의 승리였겠죠. 한 잔 맥주의 영향인지 몰라도 펍에 있던 팬들의 표정에는 이미 승리에 대한 도취감이 가득했습니다. 8강전 상대가 누가 될지에 대한 행복한 걱정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 달리 아스날의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앞선 2주는 아스날에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죠. 프리미어리그를 제외한 세 가지의 타이틀에서 모두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지난 2월 21일, UEFA챔피언스리그 16강전 PSV아인트호벤전 패배(0:1)를 시작으로 25일(일) 칼링컵 결승전에서는 선수들 간의 물리적 충돌 끝에 첼시에 1:2의 역전패를 당했고 지난 수요일에는 블랙번과의 FA컵 재경기에서마저 승리를 놓쳐버렸습니다.
지난 2주 동안, 한 시즌에 치르는 4개의 타이틀 가운데 2개가 물거품으로 변했습니다. 레딩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사실상 리그우승은 힘든 아스날에 지난 보름 동안의 끔찍한 결과들은 올 시즌을 무관으로 끝낼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기 충분했습니다.
이런 아스날에 챔피언스리그는 올 시즌 트로피를 안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죠. 경기장으로 향하는 팬들의 표정에서 기대감과 초조함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스날의 벵거 감독이나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죠. 1차전의 패배와 로시츠키, 반 페르시, 앙리 등 주전급 선수들의 부상들은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지만 아스날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습니다.
경기장에 가까워지는 동안 저 역시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표가 없었거든요. 경기장에 가지만 경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정상적인 방식으로 살 수 있는 표는 모두 매진되었기 때문에 내심 암표를 생각하고 경기장으로 향했습니다.
암표상들은 그들과는 생김새가 다른 동양인이 어수룩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면 틀림없이 다가왔던 게 평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습니다. 태연한 제 모습이 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단 한 명의 암표상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날의 중요한 경기에는 암표상이 팔 티켓마저도 동났던 걸까요?
솔직히 암표상을 만난다 해도 그들이 거침없이 부르는 높은 가격에 선뜻 응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래저래 가격을 조정해 볼 기회마저 가질 수도 없었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경기장 안에서 새어 나오는 팬들의 응원소리가 귓전을 때릴 때면 절박함은 더욱 짙어졌죠.
이성적인 생각을 반쯤 잃어가던 그때, 누군가 다가와서 저에게 거래를 청했다면 제가 상식 밖의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을지도 모를 일이죠. 하지만, UEFA챔피언스리그의 메인주제가가 들리고 장내 아나운서의 선수소개가 흘러나온 뒤, 킥오프에 환호하는 관중의 함성을 들을 때까지 이 날은 그 어떤 암표상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쉬움에 산 것은 매치 프로그램. 이 날 경기를 위한 한 권의 핸드북 가격은 3파운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생이 K리그 한 경기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입니다. 80페이지를 넘기는 이 책에서는 경기를 앞둔 아스날 주요 선수들의 인터뷰와(이 날은 티에리 앙리, 요한 주루의 인터뷰) 경기에 대한 간략한 전망, PSV아인트호벤에 대한 소개를 기본으로 간략한 구단 소식들과 지난 경기들에 대한 리뷰, 역사 속의 아스날, 유스팀, 우먼팀 경기 결과 등이, 한 경기를 위한 책자치고는 과도할 정도로 다양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경기장을 빼고 축구중계를 볼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곳은 펍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장 주변의 펍마저 외지의 낯선 축구팬에게는 냉담했습니다. 경기가 벌어지는 날에는 아스날의 회원들만이 경기장의 몇몇 펍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펍의 정문에는 ID검사를 하는 사람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경기장 안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뒤로하며 저는 다시 하이버리&이슬링턴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빌어먹을 축구 보기 힘든 땅이여'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요.
결국, 하이버리와 많이 떨어진 곳의 펍에서 후반전 일부의 경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PSV의 알렉스가 두 골을 두 팀의 골문에 번갈아 넣어버리는 원맨쇼는 감상할 수 있었죠. 경기장 주변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아스날 팬들의 절망어린 모습까지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그랬다면 그 이유가 알렉스의 원맨쇼 때문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스날의 유럽챔피언을 향한 행진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 아스날의 목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자동진출권을 향한 리그 4위 수성만이 남았네요. 얼마 남지 않은 그 과정을 단 한 번이라도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지켜볼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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