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박상진 기자] 이영호의 은퇴식에는 팬들과 함께 많은 관계자, 동료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영호의 절친한 친구인 정윤종 역시 이영호 은퇴식의 한 자리를 지켰다.
이영호의 은퇴식이 끝나고 막바지 기사 작업이 분주하던 기자실에 한 명의 선수가 들어왔다. 바로 정윤종이었다. 머쓱하게 기자실에 들어온 정윤종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자신도 스타크래프트2 선수에서 은퇴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정윤종이 올해 활동한 마이인세니티와의 계약이 끝났을 때 한 통화에서 그가 은퇴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2015 GSL 시즌2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스타리그 2015 시즌3에서도 4강에 오르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은 정윤종은 적어도 내년 초반까지는 선수생활을 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윤종은 자신의 은퇴는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거 같아서 후련해요.” 은퇴 소감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재미로 시작한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를 하던 친구들이 잘한다는 이야기에 커리어 매치에 출전한 정윤종은 결승에서 노준규에게 패했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두 번 더 도전해서 결국 준프로 자격증을 따냈다. 원래 저그였지만, 템플러가 너무 강해서 프로토스를 선택했다는 정윤종. 선수가 되기 이전에는 허영무나 송병구 등 삼성 프로토스의 경기를 많이 봤던 그는 프로토스로 준프로가 되었다.
추천으로 들어간 MBC 히어로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나오게 된 정윤종은 집에서 잠시 익명 프로게이머 타이틀을 달고 아프리카 방송을 하며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눈여겨 본 지인의 추천으로 다시 입단 테스트를 본 팀이 바로 SK텔레콤 T1. 사실 정윤종은 웅진 스타즈 입단 테스트를 먼저 봤지만, 늦게 테스트를 진행한 SK텔레콤 T1에서 먼저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알려줬다고.
“입단 테스트에서 (정)명훈이 형도 이기고, (도)재욱이 형하고는 반반이 나왔어요. 다만 (김)택용이 형의 부종 저그에 졌고, 결국 4대 2정도의 성적을 냈는데 하루 만에 바로 연락이 오더라고요.” 정윤종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의 입단을 반대한 사람은 바로 정명훈이었다. “명훈이 형이 저한테 지고 삐져서 농담 반 진담 반 입단시키지 말자고 했더라고요. 하지만 SK텔레콤 T1에 입단했을 때 가장 잘 챙겨준 사람은 명훈이 형이에요.”
정윤종의 2군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2군에서 1~2위를 다투던 정윤종은 바로 1군으로 콜업되어 경기에 나섰다. 2010년 10월, 정윤종은 MBC 히어로의 박수범과 데뷔전을 치른다. 결과는 패배. 하지만 정윤종은 금방 두각을 나타내며 브루드 워 시절 SKT T1의 프로리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로 성장했다. 팀의 프로리그 우승까지 경험한 그는 화승과의 경기에서 올킬을 기록하는 등 남다른 성장을 보였다.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에서 승승장구하던 정윤종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한국e스포츠협회 소속인 SK텔레콤 T1 소속인 그는 2012년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 날개를 시작해야 했던 것. “하기 싫었어요. 한창 방송 경기도 적응을 잘했는데 종목을 바꿔야 했으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인데 남이 바꾸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거부감이 들지 않겠어요?” 하지만 정윤종은 그 상황에서도 특유의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데 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웃음). 처음에는 정말 싫었는데, 나중에는 정말 집중해서 연습했어요.”
어떤 게임이든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남들보다 잘해서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 날개도 자산이 있었다는 정윤종의 실력도 금방 늘었고, 빠르게 실력에 대한 보상도 돌아왔다. 정윤종은 2012 옥션 올킬 스타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리그에서 첫 기록을 남겼다. “제가 다른 선수 하는 걸 잘 따라 해요. 타이밍을 잡거나, 게임에 대한 개념, 그리고 심리도 잘 잡아내고 바로 제 것으로 만들어 쓰니 실력이 금방 늘었어요. 대신 프로토스 경기라면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다 봤어요. 해외 경기까지요.” 관중이 적어서 아쉬웠지만, 첫 우승의 기쁨은 그보다 더 컸다.
바로 이어진 GSL 4강에서는 아쉽게 탈락했지만, 스타리그와 GSL, 그리고 WCS 지역 선발전과 아시아 파이널로 바빴던 정윤종은 쉴 시간이 생겨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회 세 개를 동시에 하려니 한 달 동안 쉴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는 정윤종.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윤종은 낙천적이지만 수동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방어적인 그의 플레이 스타일 이야기가 나왔다. “제 경기를 제가 봐도 재미가 없었어요. 그냥 방어하다가 업그레이드 되면 공격하러 가서 이기고. 다들 저를 ‘노잼종’이라 불렀던 이유를 저도 알아요. 저도 이해하고요. 하지만 별 특징이 없어 별명이 없던 저한테는 좋은 일이었죠.” 정윤종의 다른 별명 중 하나인 ‘런윤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정윤종은 당시 MLG 출전을 출국 전날 알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살짝 억울했어요.” 인터뷰 중 가장 억울한 표정을 지은 정윤종은 ‘살짝’ 이라는 단어에 무게를 두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대회를 결정할 권한이 제게 없었고, 비행기 타기 전날 저녁에야 알아서 다음 날 아침 급하게 집을 싸서 미국으로 갔어요. 팀 소속 선수니까 팀의 결정에 따르는 게 맞았지만 ‘런윤종’이라는 별명은 좀 억울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별명이었지만 말이죠.” 별명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아이디인 ‘Rain’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물어봤다. “원래 제 아이디는 ‘Sun’이었는데 래더에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저보고 ‘태양이니?’라는 질문을 들어서 바꿔버렸어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정윤종은 계속 대회 상위라운드에 이름을 올리며 우승도 차지한 정윤종. 2013년 군단의 심장이 처음 나왔을 때는 게임이 많이 달라져서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계속 좋은 성적을 냈다. 그리고 2014년 말, 정윤종은 그동안 활동한 SK텔레콤 T1을 떠났다. 팀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달랐고, 은퇴 전에 해외 팀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 문제라기보다는 서로 생각이 달랐어요. 서로 맞는 이야기를 했지만, 방향이 달랐기에 저도 SK텔레콤 T1을 떠났던 거고요.”
팀을 떠나 집에서 지낼 동안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지만, 가족들과 보낸 시간은 좋았다고. 그리고 2015 GSL 시즌2 우승은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해외대회를 다니며 쉬엄쉬엄하려고 했는데 그의 말처럼 ‘그냥 하다보니’ 우승을 해버린 것. 이어 진행된 스타리그 2015 시즌3은 정윤종에게 새로운 경험을 줬다고 한다.
“스포티비 게임즈 제작진 분들이 영상을 굉장히 자주 만들더라고요. 정말 이분들은 열심히 하시고, 스타크래프트2를 부흥시키겠다는 노력이 보였어요. 저도 감탄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영상 촬영도 재미있게 했어요. ‘노잼종’이라는 제 별명을 가지고 두 편의 픽션을 찍었는데 이슈가 되니 저도 좋았죠. 저는 재미 없었지만 영상은 재미있더라고요. 출연자 분이 제 농담을 듣고 비행기 타고 떠나버리는 컨셉도 재미있었죠.”
또한, 2015 GSL 시즌3에서 이영호와 벌인 실랑이는 시청자 모두에게 재미를 줬다. “원래 지명권은 딱히 생각이 없었고, (이)영호한테 주려고 했어요. 저도 장난친거고, 영호도 ‘자기는 지명권이 필요없다’고 장난친거고요. 그러다 보니 방송이 재미있었죠. 하지만 둘 사이에 감정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날도 끝나고 같이 술 한잔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둘이 게임 이야기는 잘 안하는 편이에요.”
정윤종과 이영호는 군단의 심장이 발매된 후 처음으로 진행된 MLG에서 친해졌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금방 친해진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하게 대하면서 친해졌다고 이야기 한 정윤종은 이영호에 대해 “어릴적 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성숙한 친구”라고 이야기했다. 정윤종이 SK텔레콤 T1에서 나온 이후에는 이영호의 팀인 kt 롤스터 숙소에도 자주 찾았을 정도. “저하고 영호가 친한 걸 아니 kt 롤스터 강도경 감독님이나 코치님들도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셨고, kt 롤스터 선수들과도 다 친하게 지냈어요. 연습도 서로 도와주고요. 아무래도 해외팀 선수다보니 편했던 거 같아요.”
절친한 사이인 이영호가 은퇴식을 치른 날, 정윤종은 이영호의 은퇴식을 모두 지켜본 후 자신도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예전부터 해외 팀에서 1년간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를 하겠다고 주변에 이야기했고, 결국 자신이 생각한 그 날이 온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GSL 우승 직후 시상식에서 은퇴 의사를 밝히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마지막 욕심이 남아 있었다. 바로 블리즈컨 현장에서 벌어진 WCS 글로벌 파이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지막 시즌까지 계속 대회에 출전했다.
WCS 글로벌 파이널 2주 전, 정윤종은 자신의 아버지가 간 이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형이나 저나 둘 중 하나가 아버지에게 간 이식을 해드려야 하는데, 이왕 할 거면 제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제가 아버지와 혈액형이 같았고, 저는 기흉이나 맹장 수술을 해봐서 수술에도 익숙했거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든 걸 아는데 그걸 형한테 맡기자니 짐을 미루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간 이식을 하기로 했죠. 저나 아버지 모두 지금은 건강하세요. 다만 집에서 세 달 정도 휴식을 취해야 해서 당분간은 집에서 쉬어야 할 거 같아요. 아버지와 친구 같은 사이라 속마음은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버지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윤종은 은퇴 후에 집에서 쉬면서 그간 즐기던 리그 오브 레전드나 브루드 워를 다시 하고 있다고 전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다이아 2 승급전까지 가 봤고, 지금도 그 정도 등급에 있어요. 봇 라인은 가면 맨날 싸워서 잘안가고 나머지 포지션을 하는데, 최근에는 탑 말파이트를 하면 거의 안 지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이영호와도 같이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해요. 영호는 보통 정글에 가는데 이블린을 잘해요. 심심풀이로 하는데 저하고 비슷한 등급이니 마음 잡고 하면 더 잘할 거 같아요. 영호는 정말 뭐든 잘하니까요. 재능이 있는 친구죠. 집에 계속 있으려니 심심해서 방송할까 생각 중이기도 해요.”
프로게이머 인생에서 후회되는 시절이 있느냐는 물음에 정윤종은 단호히 “없다”고 말했다.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다 누려본 거 같아요. 개인 리그 우승도, 팀 리그 우승도, 올킬도, 에이스 결정전도 다 나가봤잖아요. 매 순간 최선을 다 했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 적도 있긴 해요. 하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노력은 안 할 거 같아요. 그 때를 후회하지도 않고요. 프로게이머를 처음 시작한 순간부터 가진 자신감 하나로 쭉 생활한 거 같아요.”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정윤종은 프로게이머 생활이 끝났다는 아쉬움은 조금도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오래전 부터 생각한 거지만, 팬들이 있어 지금까지 제가 계속 노력하고 달려온 거 같습니다. 제가 갑자기 은퇴한다고 해서 많이들 놀라시고 너무 성급한게 아니냐는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 들도 있을 거 같네요. 하지만 오래전 부터 생각한 거고 이제 프로게이머는 더 해봐야 의미가 없을 거 같습니다. 많이 지치기도 했고요. 이런 제 생각을 믿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방송이든 다른 일이든 어떤 일을 하든지 여러분이 좋아하시던 정윤종의 모습에 반하는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정윤종의 표정에서 약간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내가 본 어떤 프로게이머보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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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기자 vallen@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