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나유리 기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다. 서울올림픽과 호돌이가 떠오르는 그때, 한국프로야구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988년으로 돌아가봤다.
▶ 108경기 7구단 체제…태평양의 탄생
1988시즌에는 총 7개 구단이 페넌트레이스를 치렀다. 청보 핀토스에서 태평양 돌핀스로 변신한 첫 해였고, 팀당 108경기를 소화했다. 또 전기와 후기로 나눠서 성적을 계산한 전·후기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 페넌트레이스 결과 해태가 68승 2무 38패 승률 0.639로 전기, 후기 통합 우승을 차지했고, 빙그레가 62승 1무 45패 승률 0.579로 2위에 올랐다. 해태와 빙그레의 차이는 6.5경기 차였다.
이밖에도 롯데-삼성-OB-MBC 순으로 순위표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고, 새롭게 시작한 태평양이 7팀 중 꼴찌였다.
페넌트레이스 전·후기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섬 라이온즈를 3승 무패로 꺾고 올라온 빙그레와 맞붙었다. 해태가 1~3차전 3연승으로 기선 제압 했고, 빙그레는 3패 뒤 2연승으로 반전을 노려봤지만 해태가 6차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완성하면서 창단 이후 네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빙그레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1988년이 처음이었다.
▶ 7개 구단 사령탑
-삼성 라이온즈 : 박영길 감독
-MBC 청룡 : 유백만 감독
-OB 베어스 : 김성근 감독
-롯데 자이언츠 : 어우홍 감독
-해태 타이거즈 : 김응용 감독
-빙그레 이글스 : 김영덕 감독
-태평양 돌핀스 : 강태정 감독
▶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1988년의 선동열은 최전성기를 보내는 투수였다. 31경기동안 178⅓이닝 16승 5패(완투9회, 왼봉 1회) 10세이브 200탈삼진 평균자책점 1.21로 평균자책점 1위, 최다 탈삼진 1위, 다승 2위, 세이브 4위, 최다 이닝 3위 등 전부문을 휩쓸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또 하나의 기록도 있다. 롯데를 상대로 개인 20연승이라는 최다 연승 기록이 88년 8월 11일 해태-롯데전부터 시작됐다. 선동열은 이날부터 1995년 9월 26일까지 롯데전에서 단 한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았다.
▶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 파문
1988년 초겨울, 대형 트레이드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선동열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롯데의 최동원이 주인공이었다. 최동원이 선수협 창립과 관련해 구단에 미운털이 박혀있었던 상황에서 삼성과 롯데가 리그 전체에 영향을 미칠 4:3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1월 22일 삼성이 '에이스' 김시진을 비롯해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롯데로 보냈고, 롯데는 최동원과 오명록, 김성현을 포함한 트레이드를 집행했다.
▶ 골든글러브, 해태 vs 빙그레 양강 구도
▶ '노히트 노런' 두번이나 나왔다
보기 귀하다던 '노히트 노런'이 1988년에는 약 2주 사이에 두차례나 나왔다. 투수가 9이닝 동안 볼넷이나 사구는 내주더라도 안타를 맞아서도, 점수를 내줘서도 안되는 '노히트 노런'은 1988년 4월 2일 OB 장호연이 롯데전에서 역대 세번째로 달성했고, 15일 후인 4월 17일 빙그레 이동석이 해태전에서 역대 네번째 기록을 달성했다.
다음 해인 89년에 해태 선동열, 90년 삼성 이태일 등 드문 드문 '노히트 노런' 투수가 나왔지만 2000년 한화 송진우가 광주 해태전에서 기록한 이후 토종 투수 중에서는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 됐다.
▶ 서울 올림픽 열풍에도 프로야구의 인기는 쭈욱~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88 서울올림픽과 호돌이가 휘몰아쳤지만 프로야구의 인기는 별개였다. 이 해 프로야구 전체 관중은 193만2145명으로 전년도 201만명 보다는 소폭 떨어졌지만, 영향이 미미했다. 또 다음해인 89년 288만3669명의 관중을 불러들이며 '인기 극복'에 성공했다. (참고로 1990년에는 역대 최초로 300만 관중을 돌파하는 경사가 있었다)
기억하는 이가 많지는 않겠지만 서울올림픽에서도 야구가 있었다. 단, 임시종목이었다. 야구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또 프로 선수들이 아닌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몇몇 특급 아마추어 선수들은 프로 입성이 반강제적으로 1년 미뤄지기도 했다. 이때 서울올림픽 야구 대표팀에는 조계현, 이강철, 박동희, 송진우, 김동수, 김경기, 노찬엽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했지만 메달권 입성에는 실패했었다. 미국 대표팀이 금메달, 일본 대표팀이 은메달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이 동메달을 가져갔다.
▶ 연봉킹 : 최동원
KBO 기록으로 1988시즌 리그 최고 연봉자는 롯데의 '무쇠팔' 최동원이다. 최동원은 트레이드 직전이었던 1988년에 8910만원의 연봉으로 '연봉킹'이었다. 2015시즌 '연봉킹'인 김태균이 15억원을 받는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차이이지만, 당시 물가를 따져봤을때 8910만원은 강남에 아파트 한채는 거뜬히 사는 고액이다. 당시 시즌 MVP였던 해태 김성한의 연봉은 7800만원이었다고.
▶ 프로야구를 주름 잡았던 형들
-타격왕 : MBC 김상훈(0.354)
-최다 안타 1위 : 해태 김성한(131안타)
-홈런왕 : 해태 김성한(30홈런, 역대 최초 30홈런 돌파)
-타점 1위 : 해태 김성한(89타점)
-결승 타점 1위 : 해태 김성한(17번)
-도루 1위 : 해태 이순철(58도루)
-다승 1위 : 롯데 윤학길(18승)
-세이브 1위 : 빙그레 이상군(16세이브)
-올스타전 MVP : 해태 한대화
-한국시리즈 MVP : 해태 문희수
-1988시즌 리그 MVP : 해태 김성한
-1988시즌 신인왕 : MBC 이용철
▶ 'MVP' 김성한, 금 100돈 잃어버린 사연?
기록이 보여주듯 1988년 해태 김성한은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김성한 전 감독은 "그때가 나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은 정점에 있을 때는 모르다가 내리막길을 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때와 지금 선수 대접은 천지차이다. 지금 선수들은 FA라는 것도 있지 않나"라며 껄껄 웃었다.
또 웃지 못할 에피소드. 당시 김성한은 모 언론사로부터 그 해 최고 선수에게 수여되는 금 50돈을 두차례 받았다고. 총 100돈으로 현재 시세로 따지면 1500만원이 넘는다. 하지만 금 100돈은 감쪽 같이 사라졌다. "50돈은 도둑 맞았고, 나머지 50돈은 IMF 금 모으기 운동때 모범이 되고 싶어서 냈다"는게 그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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