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6.05.13 07:32 / 기사수정 2006.05.13 07:32
축구라는 단일 종목이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로 발전하며 확실한 성공의 열매를 맺고 있었던 당시, 축구에 대한 세계인의 경외감은 대단했다. FIFA는 올림픽이 추구하는 '아마추어리즘' 대신 철저한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했고, '프랜드십'에 입각한 올림픽과는 달리 국가간의 경쟁을 통해 승리를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을 강조했다 그 결과 월드컵은 비록 치열하고 살벌한 승부의 세계로 전락했지만 올림픽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극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전 세계인들의 국가 명예를 건 도전이 펼쳐지는 아주 커다란 경쟁의 장이 된 것이었다. 또, 그 무대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많은 국가들이 월드컵이란 '전쟁'에 기꺼이 참가했으며, 이러한 열기는 축구와 월드컵을 세계 최고의 이벤트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제12회 1982년 스페인 월드컵 ▲ 개최 배경
1966년 7월 6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는 11회 대회를 아르헨티나에서 개최할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12회 대회 개최국도 일찌감치 정해버렸다. 바로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다. 그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잉글랜드 서독 등 유럽 열강에 뒤져 월드컵 개최를 못 했던 스페인은 정치적 입김이나 로비 없이 오직 축구만으로 월드컵 개최권을 따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FIFA의 이른 개최지 선정 덕분에 스페인은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대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우선 1975년에 월드컵 조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14개 도시에 무려 17개의 경기장을 신축 보수했으며, 교통 숙박 등 대회 운영에 필요한 기본 기간 시설의 정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스페인이 이렇게 안정적이고 충분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자 FIFA는 월드컵 역사상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참가국의 확대였다. FIFA는 무려 17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보유하게 된 스페인 대회를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1978년 총회에서 기존의 16개국이던 참가국 수를 24개국으로 늘리는 데 합의하게 된다. 이는 제3대륙의 축구 발전은 물론이고, 계속 발전하고 있는 월드컵의 더 큰 도약을 위해서였다. 이전에도 FIFA는 본선 진출국 수를 늘리기 위해 고심했지만, 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이 긴 시간 동안 넉넉한 준비를 하게 됨으로써 24개국으로 진출국 수를 늘리는 데 성공했고, 이런 참가국의 증가는 월드컵의 경기 수와 관중 증가를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월드컵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비록, 당시 스페인을 장악하고 있었던 프랑코의 오랜 독재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독립을 원하는 소수 민족들의 시위나 거친 저항이 스페인을 힘들게 했지만, 스페인 국민은 월드컵으로 하나가 되어 착실하게 준비했었다. 그러한 스페인 국민의 지지와 성원으로 스페인 월드컵은 아주 훌륭하고 깨끗한 대회로 막을 내렸으며, 흩어졌던 스페인 국민의 화합에도 큰 역할을 했던 대회로 남아 있다.
▲ 월드컵 뒷얘기 펠레와 크루이프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 펠레 게르트 뮐러 베켄 바워 요한 크루이프 같은 슈퍼스타들의 은퇴로 주춤하던 세계 축구계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야말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지존들이 1978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거 사라지면서 스페인 월드컵은 차기 황제를 위한 격전장의 성격도 띠었다. 축구 신동이라는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처음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대회였으며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공격수인 파울로 로시, 그리고 브라질의 생각하는 축구 선수라는 별명을 가진 소크라테스와 하얀 펠레 지코 마지막으로 프랑스 아트 싸커의 영혼인 플라티니가 활약했던 대회였다. 모두가 역사에 남을만한 스타들이지만, 당시엔 그 누구도 1인자가 되지 못하고 치열한 지존 경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파울로 로시가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기자단 투표에서 MVP에 오르는 등 유럽 출신의 선수들이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4년 뒤인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신동에서 펠레의 뒤를 이을 황제로 영전한 마라도나가 맹활약한 남미의 승리로 끝났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은 디 스테파뇨와 펠레, 요한 크루이프와 베켄 바워의 뒤를 이을 예비 황제들의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로시, 나락에서 천상까지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격수로 칭송받고 있는 파울로 로시.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막 약관을 넘긴 어린 로시는 3골을 터트리며 다음 대회의 득점왕 자리를 예약했다. 하지만, 로시는 2년 뒤 축구 도박에 연루되면서 이탈리아 축구협회로부터 3년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20대 초반의 로시로서는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최대의 위기였다. 이탈리아는 198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공격력의 부족함 때문이었다. '카테나치오'의 수비력은 브라질의 창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탄탄했지만, 역시 승부를 결정지어줄 공격수가 아쉬웠다. 이에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월드컵 우승을 위해 출장정지에 괴로워하던 로시를 2년만에 복귀시키며 면죄부를 주었다. 로시는 6골을 폭발시키며 득점왕 타이틀을 따냄과 동시에 조국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끌며 보답했다. 지옥의 문 앞에서 부활해 세계를 제패한 로시였다. 전 대회 우승국의 개막전 징크스 1978년 월드컵 우승국인 아르헨티나는 바르셀로나의 노깜 경기장에서 열린 스페인 월드컵 개막전에서 유럽의 '붉은 악마' 벨기에와 맞붙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 지난 대회 득점왕인 마리오 켐페스가 건재했고 우승 멤버인 파사레야, 베르토니에 1979년 세계청소년대회의 우승 주역인 마라도나와 라몬 디아스마저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벨기에에 0-1로 침몰하고 말았고 이때부터 전 대회 우승국의 월드컵 개막전 징크스는 시작되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조 지금까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조를 꼽는다면 과연 어느 대회의 어떤 조가 꼽힐까?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아마도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본선 2라운드의 C조가 아닐까 한다. 당시는 24개국으로 늘어난 참가국 때문에 4개 팀씩 6개 조의 1, 2위 12팀이 본선 2라운드에 진출했는데, 12팀은 3개 팀씩 다시 4개조로 나눠 풀리그를 펼쳤고 각 조 1위가 4강에 진출하는 경기 방식이었다. 그런데 본선 2라운드의 조추첨이 나오자 해당 국가들은 물론이고 세계가 경악하고 말았다. 바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가 모두 한 조에 속했던 것.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한 조에 편성되자 다른 나라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정작 이들 세 나라는 참담했다. C조에서 올라온 팀이 우승할 거란 얘기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을 정도였다. 결국, 파울로 로시가 활약한 이탈리아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돌려 보내고 4강에 진출, 세 번째 월드컵을 품에 안게 되었다.
스페인 월드컵은 소수 민족 분쟁과 장기 집권으로 지쳐 있는 스페인 국민에게 커다란 응원과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계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월드컵이 단지 축구를 즐기는 축제가 아닌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거대한 이벤트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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