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 뉴스=손병하 기자) 2002년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특별했던 한 해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을 개최했었고, 그런 월드컵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우뚝 서며 세계를 감동으로 젖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 참가한 이후 48년 동안 14전 4무 10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던 한국이 놀라운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준결승에 올랐고, 선수들의 연승 행진에 흥분한 국민은 거리로 뛰쳐나와 더 놀라운 장관을 연출했었다.
경기마다 수백만 명의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 방방 곡곡에서 '대한민국'을 외쳤고, 대표팀이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드라마에 매료된 국민은 선수들을 향한 응원은 물론이고 뜨거운 애국심까지 포함된 함성을 대표팀에 보내 주었다.
수많은 외신은 이런 놀라운 한국의 모습을 자국으로 타전하기에 바빴고, 전 세계 축구팬들은 뜨거웠던 한국의 6월에 적지 않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었다.
FIFA가 더 높은 이상으로 추구하려 했던 '월드컵 그 이상의 월드컵'이란 명제에 가장 좋은 모범 답안을 보여준 한국 대표팀과 국민은, 분명 2002년 월드컵의 당당한 주역이었다.
▲경기 다시 보기-승패를 좌우했던 바로 그 순간
△2002년 6월 4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 대한민국 vs 폴란드
본선 첫 경기 상대는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였다. 세계적인 골키퍼 두덱과 폴란드가 자랑하는 흑표범 올리사데베가 포진한 폴란드는 분명 강한 상대였다. 경기 초반 폴란드의 강한 공세에 당황하던 대표팀은 전반 초반 경기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올리사데베와 크르지노벡, 주바르스키 등에 자주 공간을 허락했고, 위협적인 슈팅도 몇 차례 허용했었다. 본선 첫 경기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대표팀은 다시 주도권을 찾지 못하며 힘든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전반 8분, 대표팀의 주장이자 수비수였던 홍명보는 수세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히 전진하며 공격에 가담했고, 폴라드 진영 아크 정면에서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쏘아 올리며 선수들의 분위기를 바꾸고자 노력했다.
비록 골과는 거리가 멀었던 슈팅이었지만, 노장 홍명보의 이 중거리 슈팅으로 대표팀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분위기 반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후 대표팀은 폴란드에 단 한 차례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며 2-0이란 완승을 일구어낼 수 있었고, 감격스런 첫 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승부처는, 바로 노장 홍명보의 오기와 투혼을 담은 그 중거리 슈팅이었던 것이다.
△2002년 6월 10일, 대구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미국
전반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한 이을용은 아마 경기 내내 울며 뛰었을 것이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부상당한 이영표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폴란드전부터 출전했던 이을용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지독히도 경기가 풀리지 않던 후반 33분. 이을용은 미국 진영 왼쪽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중앙을 향해 킥을 시도했고, 이 공이 안정환의 헤딩 골로 연결되면서 귀중한 동점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안정환의 골이 확정되는 순간, 이을용은 뒤돌아서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팀을 패배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은 실수를 만회하려던 이을용의 그 악착같은 몸부림이었다.
경기 종료 직전 미국의 왼쪽을 완벽하게 돌파하며 얻은 득점 기회에서 최용수가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자 고개를 떨어뜨렸던 이을용은, 이날 경기에서 팀을 위해 가장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뛰었던 선수였다. 미국전에서의 값진 무승부는 바로 이을용의 집념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2002년 6월 14일, 인천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포르투갈
포르투갈 황금 세대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세계 4대 미드필더 중 하나로 꼽혔던 포르투갈의 에이스 루이스 피구. 그가 경기중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짜증내는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었다.
경기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였던 피구는 한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의지와 정반대로 가는 경기를 어쩔 수 없이 바라봐야만 했다. 바로 자신을 마크했던 송종국 때문이었다.
송종국은 전반엔 혼자서 후반엔 이영표와 협공으로 피구를 막으며 포르투갈 우승의 꿈을 완전히 깨버렸다. 특히 피구와의 맞대결에서 스피드 개인기 어느 하나 뒤지지 않으며 완벽하게 그를 막았었다.
그런 송종국의 눈부신 활약에 한국은 포르투갈을 꺾고 D조 1위로 당당히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경기중 수차례나 얼굴을 감싸쥐며 괴로워했던 피구, 그의 앞엔 항상 송종국이 웃으며 서있었다.
△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이탈리아
숨막혔던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경기 종료 직전까지 패색이 짙었던 대표팀에 희망의 빛이 찾아온 것은 후반 20분경부터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전 축구 대표팀 감독)은 후반 18분 수비수였던 김태영을 빼고 황선홍을 투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23분엔 이천수를 김남일 대신 투입했고, 38분엔 홍명보마저 제외하고 차두리를 넣어 승부를 걸었다.
그라운드에 전문 수비수라곤 최진철밖에 없었으며 미드필더였던 유상철이 홍명보와 김태영의 빈자리를 책임졌었다. 경기장엔 무려 6명의 전문 공격수들이 포진했고, 이는 이탈리아가 더 이상의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설기현의 동점골도 그랬고, 종료 직전 터진 차두리의 환상적인 오버헤드 슈팅도 이탈리아를 더욱 수비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선수 기용은 연장에서도 우리가 공격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결국 경기 시작 117분 만에 감격스런 승리를 맛볼 수 있던 계기가 되었었다.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스페인
우리도 16강전에서 연장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고 올라왔지만, 스페인도 아일랜드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힘겹게 8강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스페인보다 이틀이나 더 늦게 16강전을 치렀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담은 우리가 더 했었다.
특히 16강에서 이탈리아의 매서운 공격을 막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던 수비수들의 체력저하는 걱정할 만한 것이었다. 최진철은 이탈리아전 이후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 갔었고, 김태영은 코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당했었다.
하지만, 최진철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다시 한 번 투혼을 불사르며 모리엔테스와 호아퀸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냈고, 김태영은 안면 보호대를 착용하고 나와 시야와 호흡에 문제를 느끼면서까지 경기에 뛰었다.
이런 노장 선수들의 부상 투혼이 대표팀을 다시 한 번 강한 정신무장으로 재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왔고, 스페인의 공세를 끝까지 잘 막아내 승부차기까지 가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2년 6월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독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대표팀이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표팀은 무서운 상승세를 타며 준결승까지 올랐고 결국 상암벌에 우뚝 섰다.
요코하마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길 간절하게 바랬지만, 결국 두 경기 연속 연장 혈투를 치른 체력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독일과 대등한 싸움을 펼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서 한 걸음씩 뒤처지며 승리를 양보해야 했다. 특히 발락의 결승골을 허락하던 순간에는 체력 저하를 이기지 못하고 교체되었던 최진철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했었다.
이기고자 하는 의지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우리의 투지는 여전했지만, 마음에 따라주지 못했던 육체적인 한계가 결국 요코하마로 날아가지 못했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2002년 6월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vs 터키
터키와의 3-4위전을 앞둔 한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이미 목표를 초월한 성적을 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너무나도 숨가쁘게 달려와 이제 승부에 연연하지 말고 마지막 월드컵 경기를 즐기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게다가 상대인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치켜세우며 승리보다는 친선의 의미를 강조했었다. 이런 터키와의 경기를 앞두고 만들어진 다소 어색한 분위기는 경기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대회 두 번째 패배를 불러 왔다.
이런 주위의 분위기도 선수들에 그대로 유입되었고, 이기려는 의지와 경기에 대한 집념은 전과 달리 많이 약해져 있었다. 승부의 세계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전 6경기에서 단 3실점만을 허용했던 대표팀은 전반 32분 만에 무려 세 골을 허용하며 무너졌고, 결국 유종의 미를 장식하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