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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백구대제전] 하종화-나카가이치, 잊을 수 없는 '1991년'

기사입력 2012.10.01 07:32 / 기사수정 2012.10.17 01:49

조영준 기자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나카가이치 선수가 그렇게 대단했나요?"

시즌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하종화(43) 현대캐피탈 감독은 옛 추억에 휩싸였던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유난히 맑았던 가을 하늘을 잠시 바라본 그는 "정말 세계적인 선수였죠"라며 최고의 라이벌을 회상했다.

90년대 한일 배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전성기 시절 서전트 점프가 무려 1m을 넘었던 나카가이치 유이치(45, 전 신일본제철)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시아의 거포' 강만수(57)의 뒤를 잇는 세계적인 공격수로 평가받은 그는 '코트의 신사' 하종화와 치열하게 자존심 승부를 펼쳤다.

"나카가이치는 정말 세계적인 선수였습니다. 일본과 경기를 할 때 우리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아직 일본에는 그만한 선수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일전 명승부의 중심에는 나카가이치와 하종화가 있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남자배구대표팀은 당시 최고의 에이스였던 이상렬(47, 전 금성)과 마낙길(44, 전 현대자동차서비스)이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일본을 3-0으로 완파했지만 매세트 접전을 치렀다. 특히 중요한 상황에서 터진 나카가이치의 공격에 고전했다.

나카가이치와 하종화의 본격적인 라이벌 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해는 1991년이었다. 그해 열린 월드리그에서 한국과 일본은 명승부를 펼쳤고 그 중심에는 하종화와 나카가이치가 있었다.

청소년대표 시절 하종화는 나카가이치를 만나기 못했다. 그러나 시니어 대표팀에서 상대하기 시작했고 '일본전 필승해법'은 나카가이치를 막는 것이었다. 1991년 하종화는 모교인 한양대를 백구의 대제전 정상에 올려놓았다. 실업팀이 아닌 대학팀이 우승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제 전성기는 대학교 때부터 시작됐죠. 한양대 시절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기억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시절에는 대학에서도 스타플레이어들이 많이 나왔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죠."

195cm의 장신 공격수였던 하종화는 높이와 파워는 물론 기술도 뛰어났다. 마낙길과 함께 대표팀의 왼쪽을 책임진 그는 한양대 우승으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해 가장 중요했던 대회는 8월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이 대회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한 장의 티켓이 걸려있었다. 오직 우승팀만 올림픽에 초청 받을 수 있었다.

1991년.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1991년 8월18일 호주 퍼스 슈퍼드롬에서는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이 열렸다. 바르셀로나행을 놓고 맞붙은 두 팀은 '숙명의 라이벌' 한국과 일본이었다. 출발은 한국이 좋았다. 1세트에서 하종화는 일본의 코트를 맹폭했고 첫 세트를 따내면서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하지만 하종화의 맹활약을 지켜본 나카가이치는 2세트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 좌우를 안 가리고 무섭게 공격을 퍼부었고 한국의 블로킹과 수비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나카가이치가 분전에 힘입은 일본은 세트스코어 2-1로 역전했다. 하종화와 마낙길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4세트를 따낸 한국은 승부를 최종 5세트로 가져갔다. 그러나 나카가이치는 마지막 세트에서도 놀라운 투지를 펼치며 일본에 승리를 안겼다.


[사진 = 일본남자배구대표팀, 뒷줄 가운데가 나카가이치 유이치 대표팀 코치다. 국제배구연맹(FIVB 제공)]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올림픽 티켓을 놓친 한국은 바르셀로나행이 불투명해 보였다. 하지만 한줄기 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해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월드컵대회에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은 올림픽에 가기위해 반드시 넘어야할 벽이 있었다. 유럽의 강호인 독일과 남은 한 장의 티켓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펼쳤다.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국은 3-2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특히 5세트 11-14로 뒤쳐진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독일의 공격 범실 2개가 연달아 나오면서 14-14 듀스를 만들어냈고 노진수(47, 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마낙길의 마무리 공격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은 한국은 고대했던 일본과의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1991년 12월1일 도쿄 요요기 국립체육관은 열성적인 일본 배구팬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의 영웅인 나카가이치를 연호했다. 일방적인 응원 속에 기가 죽은 한국은 1,2세트를 내주며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나 설욕을 위한 의지는 3세트부터 시작됐다. 하종화와 노진수의 공격이 살아난 한국은 당시 신예였던 임도헌(현 삼성화재 코치)의 공격까지 더해지면서 3세트와 4세트를 따냈다. 그리고 최종 5세트에서 나카가이치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여기에 고 김병선(전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전광석화 같은 이동속공이 터지며 14-12를 만들었다.

일본은 막판 추격에 나섰지만 한국의 블로킹에 차단됐다. 벤치에 앉아있던 나카가이치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고 코트에 있던 하종화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시절에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패하면 공항에 들어오기가 무서웠습니다.(웃음) 한일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는 언제나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와야 했지요. 그 때 경기장의 응원소리는 정말 대단했어요. 특히 나카가이치를 부르던 일본 팬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 남자배구 선수들이 큰 인기를 얻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요. 현재 일본에서는 여자배구 선수들이 훨씬 인기가 많습니다. 허허허."

[사진 = 하종화 (C) 엑스포츠뉴스DB, 일본배구대표팀 (C) FIVB 제공]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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