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6 08:39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던 사나이의 이야기, 영화 '역도산'

기사입력 2004.12.10 02:51 / 기사수정 2004.12.10 02:51

박지훈 기자

역도산. 63년 그가 사망한지 벌써 40년이 넘게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일본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이다. 물론 그는 단순히 프로레슬러가 아니었다. 서양스모로 불리던 프로레슬링을 일본에 들여와 국내까지도 영향을 미친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일본의 프로레슬링 뿐만 아니라 이종격투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혹자는 그를 비열한 모사꾼 혹은 지독한 콤플렉스 덩어리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가 일본 격투계에 남긴 업적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단연 한 레슬러의 도전과 명예로 그려지지 않을까? 하지만 12월 15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송해성 감독의 영화 ‘역도산’은 전혀 다른 역도산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아닌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슬픈 영웅의 모습이 있었다. 바로 인간 역도산의 이야기 말이다.



시사회장에서 만난 송해성 감독과 역도산 역을 소화한 배우 설경구는 시종일관 과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화 상영 내내 웃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영화 분위기 자체가 무거웠던 점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표현한 역도산을 평가받는 자리여서 그런지 긴장된 모습이었다. 반면 같이 자리에 한 일본 배우들은 환한 표정으로 인터뷰 장소로 들어섰다. 이번 영화는 일본과 합작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일본 현지에서 촬영한 만큼 일본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역도산의 부인 역을 맡은 나카타니 미키와 역도산의 후견인 역을 맡은 후지 타츠야 등 뛰어난 배우들과 스텝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가장 먼저 역도산 역을 맡았던 설경구 씨를 만나보았다. 



1.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은 일본어로 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대사만 알면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리액션이 엉뚱하게 나올 수 있으니까 상대방의 대사까지 다 알아야 했다. 그리고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래도 레슬링이 가장 고되고 힘들었다.

2. 실제로 레슬링을 해본 소감은 어떤가?

정말 힘들었다. 보통 액션같은 경우는 대충 시늉만 하고 상대방이 잘 받아주면 제법 그림이 나온다. 하지만 레슬링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화면이 안나오더라. 그래서 찹공격을 할때도 퍽 소리가 나도록 내리쳐야 했고 바디슬램처럼 온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기술 때는 숨이 컥하며 멎기도 했다. 정말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몸이 가루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3. 상대가 후나키 마사카츠나 무토 케이지 같은 굉장히 유명한 프로레슬러들이었다.

맞다. 그 분들이 실제로 도쿄돔에서 경기를 하면 표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일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영화 찍으면서 힘들다고 하더라. 모두 2m에 140kg이 넘는 거구들인데 그런 말할 정도면 나는 어떻겠는가. 실제 선수들도 20분 이상은 경기를 안한다는데 열흘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했으니 말 안해도 알 것이다.

4. 원래 ‘역도산’은 가라데 찹이 특기였는데 영화에서도 역시 가라데 찹이 많이 보인다.

물론 촬영 내내 가라데 찹을 가장 많이 썼다. 실제로 내 손이 아플 정도로 타격을 했다. 때문에 이무라 역으로 출연하는 후나키 마사카츠는 너무 많이 맞아서 눈이 엄청나게 붓고 멍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한쪽 어깨가 시커멓게 살이 죽어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미안해서 혼났다. 물론 그 친구는 괜찮다고 했지만...

5. 일본 배우들과의 호흡은 괜찮았나?

내가 복이 많은 것 같다. 나카타니 미키도 영리한 배우여서 말도 잘 통했고, 후지 타츠야(역도산의 후견인인 칸노 역) 선생님은 에너지가 대단한 분이셨다. 식사할 때도 몇 번 말씀 드렸는데 정말 존경한다. 그리고 하기와라 마사토(역도산의 심복인 요시마치 역)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일본에서는 대배우인데 역도산의 비서이자 그림자로 드러나지 않는 역을 해줘서 너무 미안하고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내가 비서역을 하겠노라고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 ‘역도산’에 대해 한순간도 치열하게 살지 않았던 적이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소개하면서 현재도 치열하게 살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바친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어서 만나본 배우는 야쿠자 보스이자 역도산의 후원자로 등장하는 칸노 타케오 역을 맡은 후지 타츠야 씨이다. 오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밝은 미래’ 등에서 중년의 황폐함을 연기했던 그는 이번 첫 출연한 한국 영화에서 냉철함과 중후함을 겸비한 보스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1. ‘역도산’ 영화에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소년시절 실제로 역도산이 프로레슬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패전 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것이 바로 역도산이다. 당시 어린 나이에 복잡한 사정들을 알진 못했지만 TV앞에서 ‘역도산 힘내라! 잘해라!’며 모두 함께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준 역도산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시나리오도 보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조건 출연하겠다고 했다.

2. ‘칸노’역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

‘칸노’란 사람은 역도산을 프로레슬링 세계에서 거물이 되도록 키운 최초의 프로모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찍이 역도산을 만나 프로레슬러로서의 역도산의 영광과 좌절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역도산과 칸노 사이에는 부자간의 애증 같은 감정이 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10여년동안 오가는 사이인데, 결국은 결별하게 된다.

3.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나?

역도산을 일본에서 영화화하려한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그런데 ‘역도산’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역시 한국에서 만드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만든다면 이런 스토리가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면 그냥 ‘영웅 역도산’에 대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4. 일본에서 영웅으로만 알려져 있는 역도산과 영화 속 역도산의 캐릭터는 조금 다른 듯 하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인물이니까 영화화 되는 거고, 훌륭한 스토리가 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역도산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가 없다. TV나 잡지에 많이 나왔었지만 사생활은 전혀 몰랐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일본인도 상당히 많으니까. 그런 면에서 영화가 공개되면 일본에서도 다들 흥미롭게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역도산의 비서이자 그림자였던 요시마치 유즈르 역을 맡은 하기와라 마사토이다. 

1. ‘역도산’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 시나리오가 중요했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서라도 출연하고 싶다고 생각해으니까. 한국연화는 지금 일본에서도 아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나도 한국 영화를 몇 편 보고 일본영화에는 없는 에너지를 많이 느꼈다. 실제로 그런 에너지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2. ‘요시마치’역에 대해 소개한다면.

역도산의 비서로 아주 냉정하고 모든 일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인물이다. 그런데 역도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요시마치도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3. ‘역도산’ 역의 설경구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간 설경구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고 할까, 수줍음도 많이 타고, 성실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촬여아는 동안 계속 일본어로 말을 걸어주었고,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었다. 때문에 아주 깊이 반했다. 하지만 배우 설경구는 정반대이다. 자기 주장도 강하고 쉽게 물러서지 않는 면을 갖고 있었다. 설경구씨 같은 배우는 일본에는 없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와 공연했던 것은 틀림없이 나의 배우 인생 속에서 재산이 될 것이다.

 

마지막은 자신도 역도산만큼 독하고 질기고 센 놈이라 자신하는 송해성 감독이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화 ‘역도산’을 위해 준비했지만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여서 즐거웠다는 그는 이미 영화 ‘파이란’으로 국내외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평생 진검승부를 하면서 살아간 남자, 그게 비록 자신에게 슬픔이 되고 독이 되더라도 그 승부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남자 역도산의 숙명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1. 왜 ‘역도산’이었나?

남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그 무엇 - 자기에게 독이 되어 돌아올지언정 살아가는 동안 정말 진검승부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한 남자가 갖고 있는 숙명 -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내가 본 수많은 인물들 중에 이 사람이 가장 치열했다. 그리고 역도산은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는 점도 끌렸다. 물론 레슬링이라는 스포츠가 갖고 있는 매력도 좋았다.

2. ‘역도산’을 통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영화를 보고 난 후 마음 속에 감춰져 있던 어떤 삶의 본능이라고 할까 그런게 좀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면서 자기의 좌표를 잃고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50년 전 한 사내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투쟁하면서 살았노라, 50년 대의 사람도 이렇게 진검승부 하면서 사는데 2000년대 살아가는 너희들은 왜 못 하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3. 역도산 역에 설경구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는데 이유는?

역도산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슈퍼스타가 된 남자이다.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영광 뒤에 숨겨져 있는 삶의 이면, 분노, 좌절, 이 정도를 한국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배우가 누가 있나 생각하면, 나는 단언컨대 설경구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4. 뭐니뭐니해도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레슬링인데, 레슬링 장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처음 레슬링을 어떻게 찍을까 상의할 때 카메라가 안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많이 고민했다. 카메라를 안으로 들여다 놓으면 화면 자체가 빨라지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밖에서 찍으면 경기를 객관적인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밖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롱테이크로 갔다. 왜냐하면 ‘역도산’의 레슬링 장면은 역도산이라는 인물이 링 위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 투쟁하는가가 경기의 포인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 레슬링 장면을 찍을 때 설경구 씨에게는 미안했을 것 같다.

당연히 미안했다. 연기자한테 살찌우라고 하고 레슬링하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건 설경구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두 눈 감고 찍었고, 설경구도 죽을 각오로 찍었다. 롱테이크로 찍으면서 힘들면 설경구한테 직접 컷을 외치라고 했는데, 단 한 번도 안 끊더라. 독하긴 독한 놈이다. 


원래 리테이크(다시 찍기)를 잘 안하기로 유명한 송해성 감독 덕분에 설경구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감독의 얘기를 듣고 난 후 설경구라는 배우는 그렇게 안일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그이기 때문에 치열하게 살았던 역도산에 더욱 근접한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직까지 역도산이라는 인물이 ‘짧고 굵게 산 인물인가’ 아니면 ‘단순히 콤플렉스 덩어리인가’라는 질문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둘 다 아닌 것 같다. 영웅도 그리고 모사꾼도 아닌 단지 치열하게 살다간 한 남자의 슬픈 웃음만 있을 뿐이다.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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