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4.07.07 06:09 / 기사수정 2004.07.07 06:09
6월 13일, 전 세계의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된 가운데, 2004년 유럽선수권 대회의 개막전이 시작되었다. 개최국인 포르투갈과 지역예선에서 스페인을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조 1위로 본선에 직행한 그리스의 개막전 경기..
우승후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답게, 포르투갈은 선수들의 빼어난 개인기를 선보이며, 경기 초반부터 그리스를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피구와 C. 호나우두의 돌파와 파울레타의 슈팅.. 그러나 그리스는 강했다. 극단적인 수비전술을 선보이면서도 간혹 보이는 날카로운 역습, 그리고 전반 중반 터진 극적인 선제골.. 결국 경기는 그리스가 한 골을 더 넣고, 포르투갈은 신예 C.호나우두가 한 골을 만회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이변.. 또다시 그리스의 이변이 계속되면서 A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예상되었던 8강 진출국의 판도가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2004년 6월,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유로2004, 즉 유럽 선수권 대회는 유럽에서 미니월드컵이라고까지 불리는 유럽의 축구 최강전이다. 이 대회는 UEFA(유럽축구연맹)에 소속된 국가들이 각자의 지역예선을 벌이고, 녹다운 토너먼트제의 경기를 하면서 실력을 겨루는 축구 제전이다. 이 대회의 우승국은 이듬 해 열리는 프레월드컵, 즉 대륙간 컵(다 아실 겁니다. 우리나라도 참여한 적이 있는.. 컨페더레이션스 컵이라고도 불리죠.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 때 월드컵 개최국의 자격으로 출전했습니다.)에서 유럽의 대표국으로 출전하는 영광도 얻게 된다. 명실공히 다음 유럽 선수권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강자로 인정받는 대회가 바로 이 유럽 선수권 대회인 것이다.
이러한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대회이니만큼, 무관에 허덕이는 축구 강국이나, 돌풍을 일으키는 축구 변방국들이나 할 것 없이 얼마나 이 앙리 들로네 컵(월드컵의 줄리메 컵처럼, 유럽 선수권 대회의 우승컵 이름입니다.)이 갖고 싶겠는가?
또한, 이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강팀이나 그 전술은 2년 후에 있을 월드컵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단 유럽뿐만이 아닌, 비유럽의 국가들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파악하는 대회로서도 손색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전술로는 유로2000 대회때 프랑스의 ‘크리스마스 트리 포메이션’이라든지, 이번 대회에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는 ‘4-2-3-1’식 더블 볼란티 포메이션 등이 있습니다.)
포르투갈, 그리고 그리스.. 결국 결승전은 개막전에서 만났던 두 팀이, 그러나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나라가 다시 한번 맞붙게 되었다. 피파 랭킹 35위의 팀으로서 지역예선에서 스페인을 누르고, 개막전에 포르투갈을 누른 뒤, 프랑스, 체코를 줄줄이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이번 대회 최대 이변으로 불리고 있는 파죽지세(破竹之勢)의 그리스와, 89년과 91년 2차례에 걸친 세계 청소년 대회를 우승했던 주역들이 건재한, 그러나 2002월드컵의 아픔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유럽의 브라질, 포르투갈이 말이다. 포르투갈로서는 루이스 피구, 루이 코스타, 세르지우 콘세이상 등과 같은 ‘골든 제너레이션’들이 활약할 수 있는 마지막 메이저 대회이니만큼, 또한 ‘만년 우승후보’이지만 언제나 ‘무관의 제왕’이라 불렸던 설움을 개최국인 모국에서 날리고 싶은 마음,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역시도 자신들이 몰고 온 돌풍을 포르투갈에게 마지막으로 전해주면서, 자신들의 새 역사를 쓰기에 주저하지 않았기에 마지막 결승전은 정말 치열한 경기가 될 것이었다.
이미 서로 한번씩 승리와 패배를 나눠 가졌었던(개막전 2:1 포르투갈 패배) 팀이었던 만큼, 두 팀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았던 간에 다시 벌어진 결승 리턴매치에서 더 이상의 탐색전은 없었다. 공격 일변도로 경기에 임한 포르투갈과 극단적인 수비전술로 경기에 임한 그리스는 모두 결승에 진출한 팀들답게 피치에서의, 그리고 미드필드에서의 경기 장악을 위해 초반 거친 플레이를 펼쳤다.(오랜만에 나왔습니다. 피치.. 그라운드가 아니고 피치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 ) 그리고 양 팀의 특성에 따라 포르투갈이 초반 점유율을 높여가며, 게임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간혹 날카로운 역습을 높여가며, 포르투갈의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서서히 볼 점유율을 높여나간다.
그러나, 경기 초반, 미드필드들이 경기를 장악하고, 짧은 패스로 공격을 주도했던 포르투갈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도 풀리지 않는 경기가 계속 되면서 조급해지게 되고, 개인기를 위주로 한 드리블 돌파로 공격 전술을 바꾸게 된다. 피구와 C.호나우두가 서로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크로스를 올리고, 공격찬스를 만드는 전형적인 윙 전술을 고수했던 포르투갈과 달리 그리스는 변칙적인 극도의 수비전술을 계속해서 고수하면서 순간순간의 역습에 공격 주안점을 두는 플레이를 하였다. 공격에 비중을 두면서도 역습을 대비해 공격진들의 추가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포르투갈 대신 전반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는 조금씩 공격의 빈도를 높여가면서, 수비시의 선수들 대부분이 공격에도 가담하는 가공할만한 체력전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세에도 장신의 수비수들 앞에 번번이 차단당하는 크로스패스와 드리블이 길면 여지없이 들어가는 태클에서 포르투갈은 다시 첫 개막전의 패배를 재현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사견이지만, 계속되는 공격에도 포르투갈이 득점에 번번이 실패한 것은 포르투갈은 그리스가 수비위치를 잡는 시간 동안 불필요한 드리블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초반의 15분여 동안 보여주었었던 짧게 들어가는 패스를 조금만 더 유지시켰더라면, 경기 종반까지도 그렇게 중거리슛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결승까지 올라오면서도 과감한 전술과 선수기용으로 승리를 이끌어냈던 스콜라리 감독의 판단 역시 중요했겠지만, 결국 이 전술에 맞서서 완벽한 파해법을 만들어 냈던 오토 레하겔 감독 역시 우승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결국 후반 13분 쯤, 결승 헤딩골이 터져나온다(카리스테아스 득점). 그때까지 단 한번의 코너킥도 없었던 그리스였지만, 한번의 득점 찬스를 골로 연결시키는 집중력을 보여준 것이다. (포르투갈 골대 뒤편에 앉은 그리스 팬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모두들 주문을 외우듯 손을 벌리고 포르투갈 골대 안으로 공이 오기를 기도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주문은 성공을 거두었고 말이다. :-)) 그리스는 프랑스에게 그랬고, 체코에게 그랬듯이 단 한번의 역습으로 골을 낚는 효율적이고도 치명적인 공격 작업을 보여주었고, 포르투갈은 많은 수의 찬스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리스의 강력한 대인마크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게 되고 만다.
유로2000 4강 신화의 ‘골든 제너레이션’을 등에 업고도, 또, C.호나우두, 시망 사브로사, 데코등 가공할 공격력을 가진 신예들과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일궈 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다시 한번 무관의 제왕에 머물러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준우승이라는 것.. 과연 그들이 원했던 것일까?) 힘겹게 스페인을 밀어내고, 잉글랜드를 제쳤으며, 네덜란드를 꺾고 올라온 그들에게 그리스는 또다시 힘겨운 상대였던 것이다. 유럽의 브라질이라 불리울 만큼 수려한 개인기, 패스웤이 강점인 포르투갈이 탄탄한 조직력과 빗장수비를 능가하는 대인마크를 기반으로한 그리스의 지역수비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결국, 그리스는 ‘놀러 온 것이 아니고, 우승을 하기위해 여기에 왔다’는 오토 레하겔 감독의 말마따나 유럽 선수권 대회 2회 진출 만에 강팀들을 꺾고, 2004년의 새로운 축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들이 보여준 믿을 수 없는 체력, 가공할 수비력, 날카로운 역습이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가 가진 최고의 공격진도, 체코가 가진 최고의 미드필더 진도, 이탈리아가 가진 최고의 수비진도 아닌, 최고의 조직력으로 다른 팀들을 압도했고, 최고의 체력으로 다른 팀들을 눌러버렸다. 마치 히딩크가 2002년 최고의 체력과 조직력을 가진 팀으로 만든 대한민국 대표팀처럼, 그리고 그 이상으로 말이다. (포르투갈이 공격을 하기 위해 그리스 진영으로 오는 경우 그리스는 최전방에 위치한 1명의 공격수조차도 자신의 진영에서 몸싸움에 가담하고 미드필더 전체가 압박을 해오는 또 다른 형태의 수비 전술을 보여주었다. 이는 세트 플레이를 비롯한 여러 포르투갈의 공격모습 동안 보여졌는데, 이미 프랑스 전에서도 그러한 수비전술을 봤던 필자로서는 그리스가 포르투갈을 상대로, 그리고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팀들을 상대로 어떤 모습으로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준 경기라고 생각된다. 체력이 곧 열쇠다.)
4년 전 열린, 2000년 유럽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는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했던 넣고 지키기 전술이 결국 얼마나 부질없는 전술인지를 느꼈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도 넣고 지키려 했던 나라들이 모두들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또한 공격 일변도로 전술을 내세웠던 나라들이 결국 지키는 나라들에게 점수를 따내는 것을 보고, 지키는 전술이 얼마나 힘든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리스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수비 전술을 보여준 것이다.(정말 말로 할 수 없는 체력입니다.) 뭐, 네오 카테나치오(필자 주. 카테나치오란 이탈리아의 수비방식, 즉 패스요소마다 차단을 하면서 빗장을 걸어 잠그는 플레이를 한다는 의미이지만, 이탈리아의 수비방식과는 또 다른 강함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네오라는 말을 넣어 만든 합성어입니다.)라고 표현하면 될까나..
굳이 포메이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리스의 경기 전술은 현실이 아닌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극도의 수비전술에다, 역습시에는 많은 수의 미드필더를 동시에 위치 이동시킨 것 같은 공격가담력을 보여주면서, 통상적으로 조직력을 가진 팀이 가지는 수적인 우세, 체력적인 우세를 십분 활용하여 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2004년 유럽 선수권 대회는 이변의 결정판으로 끝이 났다. 뭐, 그리스의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리 이변이라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그리스의 강함이 가장 잘 드러난 경기는 역시 8강의 프랑스 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기를 관람한 필자는 체코를 또다른 희생양의 경우의 수로 넣을 생각을 했고, 불운은 결국 체코를 집어 삼키고 말았습니다. 1:0 체코 패배), 또다른 축구 변방국이 일으킨 돌풍치고는 상당히 거센 돌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리아만이 3전 전패를 이루며 예선탈락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위스와 라트비아 역시 초반 약체라는 평을 어느 정도 걷어내는데 성공을 하였고, 역시 유럽 선수권 대회 본선참가국들의 수준은 백지 반 장 정도 차이라는 말에 많이 공감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때의 히딩크 감독만큼이나 체력에 주안점을 두고 훈련을 했을 것 같은 그리스 대표팀은 우리나라가 보여주었던 그 이상의 체력을 가지고, 기본이 충실한 나라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보여준 강철같은 체력은 그리스의 90분 기동력 앞에는 더 이상 비교 우위가 될 수 없다고까지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회가 계속되어 갈수록 우리나라 대표팀의 또 다른 미래의 모습이 그리스 대표팀 위에 채색되어 갔던 것은 나 혼자뿐이었을까?.. (물론 그리스는 패스웤이나 공격의 집중력이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에 있다.)
휴.. 이제는...
결승전이 끝나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야 되냐며 한숨을 짓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조차도 결승전(한없는 이변의 종착역이었던 결승전이란!)이 끝나는 새벽 6시에 한숨을 지었던 사람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 유로2004는 볼거리도 많았고, 명승부도 많았던 경기였다. 필자가 본 경기는 총 5경기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빅매치로 불린 게임이었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승부를 보여준 게임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몇 배나 더 컸다.
월드컵 이후 맥빠진 한국축구를 보며 실망하는 이들에게는 어찌보면 우리와 더욱 비교되는 팀들의 경기를 보면서 한숨을 쉴 수도 있을테지만, 인간이 공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불리는 축구의 재미만을 본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었던 몇 주였다고 생각된다. 다른 때 같았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새벽 3:45분에 펼쳐졌던 예술의 향연, 그리고 물고물리는 팀들의 전략대결, 스타들이 펼쳐보이는 형용할 수 없는 플레이까지도, 필자에게는 2002웓드컵이 보여주었던 것 이상의 감동과 재미를 준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필자의 견문을 넓혀준 사부같은 대회.. ‘Thank you’ 다.
관전기 후기 : 축구라는 것이 언제부터 좋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처음으로 공을 가지고 웃은 것도 축구였고, TV에 나오는 선수들을 본 것도 축구였으며,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도 그냥 ‘축구’ 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머리 속에 있는 말들을 토해내다 보니 벌써 A4용지 4장이 가까워지는 양이 나왔습니다. 이런 것이 다 ‘축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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