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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츠뉴스 김현정 기자)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나요? 활력을 불어넣어 줄 문화생활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또 혼자 보러 가기 좋은 공연을 추천합니다. 엑스포츠뉴스의 공연 에필로그를 담은 코너 [엑필로그]를 통해 뮤지컬·연극을 소개, 리뷰하고 배우의 연기를 돌아봅니다 <편집자 주>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명작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 인생을 관통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물신주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가장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세일즈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관객과 만나며 울림을 주는 현대 고전의 명작이다.
아서 밀러가 1949년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박근형, 손병호 분)이 대공황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직업과 가족을 잃어 가는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가족 구성원들의 내면을 세밀히 조명해 삶과 가족의 가치를 담는다.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으며 연극계 3대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토니상, 뉴욕 연극 비평가상을 모두 받았다.
연극은 윌리의 정신착란 증세를 활용해 자신감 넘쳤던 윌리의 과거와 피로하고 무기력한 현재를 교차시키며 극을 진행한다.
봉급도 못 받는 외근직 종사자 월리 로먼은 나이가 들어 실적이 계속 줄어들자 하워드(김태향, 박승재) 사장에게 뉴욕 본사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오히려 해고를 당한다. 장성한 두 아들이 제 몫을 못 하는 데다 가정 경제를 감당할 길이 막막해지자 그는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겨주려고 차 사고를 일으킨다. 영업사원으로 36년간 한 회사에 헌신한 결과는 막 월부금을 완납하고 온전히 가족의 소유가 된 집 한 채뿐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집에 없다.
윌리 로먼이 처한 상황은 1949년이나 2025년이나, 또 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가 겪은 가난의 질곡과 고독 그리고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21세기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아버지의 모습과도 닮았다.
윌리가 더 안타까운 건 대공황을 기점으로 세상이 달라졌는데 인기와 개성, 인정만 강조하며 변화에 뒤처졌다는 것이다. 그는 창업주의 아들 하워드 사장이 뭘 모른다고 말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작 그 자신이었다.
윌리의 가장 큰 실망은 두 아들 비프(이상윤, 박은석)와 해피(김보현, 고상호)일 터다.
맏아들 비프 로먼은 특히 전망이 밝았던 고등학생 때와 달리 서른네 살이 되도록 정착하지 못하고 별 볼 일 없이 산다. 그러나 윌리는 학업에 태만하고 도벽까지 있는 아들을 바로잡지 않고 두둔했다. 비프의 낙제를 걱정한 비프의 친구 버나드(구준모, 도지한)를 공붓벌레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런 윌리가 이후 마주한 현실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비프가 엇나가게 된 결정적 이유도 다름 아닌 자신의 외도 때문이지만 애써 회피하기만 한다.
윌리 로먼은 ‘검은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정글’ 같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가족과도 비극적인 결말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니까.
노장의 힘은 대단하다. 올해로 만 84세인 박근형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3시간 정도 되는 공연에서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극 중 예순인 윌리 로먼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캐스팅인데, 베테랑 연기자인 만큼 소시민 윌리 로먼 그 자체로 보이게 하는 흡인력을 과시하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겉도는 윌리 로먼의 감정을 보여주며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유발한다.
윌리는 환영 속 큰형 벤 로먼(박윤희, 박민관)이 “넌 애들을 잘 키웠어. 최고의 아빠”라고 하자 “정말이요? 그런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애들을 잘못 가르칠까 봐 두려웠거든요”라며 반색한다.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윌리를 실감 나게 연기한다.
윌리를 지지하고 보듬는 아내 린다 로먼(손숙, 예수정)을 연기하는 예수정과의 부부 호흡도 자연스럽다.
아들 비프 로먼 역의 배우 이상윤의 무르익은 연기도 눈에 띈다. 과거 다소 틀에 박힌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와의 일체감을 통해 이질감 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2019년 ‘올모스트 메인’부터 ‘라스트 세션’, ‘클로저’, 그리고 현재 ‘세일즈맨의 죽음’까지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서고 캐릭터를 분석해 온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김현정 기자 khj3330@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