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중국 저장성, 김지수 기자) 임도헌호가 완전히 침몰했다. 21년 만에 아시아 정상 정복을 목표로 야심차게 출항했지만 결과는 61년 만에 '노메달' 수묘였다.
국제배구연맹(FIVB) 랭킹 27위 한국은 22일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중국 섬유 도시 스포츠센터 체육관(China Textile City Sports Centre Gymnasium)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배구 12강 토너먼트 51위 파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0-3(19-25 22-25 21-25)으로 졌다.
한국은 이날 패배로 메달 획득이 좌절됐다. 순위 결정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승을 목표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입상권 밖으로 밀려난 사실 자체가 치욕이다.
임도헌 감독은 세터 한선수, 리베로 박경민, 아웃사이드 히터에 나경복과 전광인, 아포짓 스파이커에 허수봉, 미들 블로커 김민재로 선발 라인업을 구성했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5-6으로 맞선 1세트 초반 허수봉, 나경복의 공격 시도가 파키스탄의 블로킹에 연달아 걸리면서 점수 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타점 높은 공격에 리시브까지 흔들리면서 5-9까지 끌려갔다.
임도헌 감독은 일단 타임아웃으로 흐름을 끊은 뒤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후 파키스탄의 범실과 한선수의 연속 서브 에이스 등을 묶어 9-10까지 쫓아갔다. 주축 선수들이 조금씩 몸이 풀리면서 주도권을 되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9-11에서 김민재의 오픈 공격이 파키스탄 블로킹에 막혔고 한국의 범실이 겹치면서 게임이 어렵게 흘러갔다. 13-14까지 추격하기도 했지만 한국은 공격 전개가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다. 평균 신장 195cm 이상의 파키스탄 미들 블로커진이 한국 주포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한국은 1세트 후반에는 17-21까지 열세에 몰리면서 점점 더 궁지에 몰렸다. 파키스탄의 기세에 점점 더 밀렸다. 파키스탄 세터 나비드 무함마드 카시프는 중앙 속공과 양쪽 날개를 적절히 활용하는 경기 운영으로 한국을 괴롭혔고 1세트는 25-19로 파키스탄이 가져갔다.
첫 세트를 빼앗기자 한국 벤치는 허리 통증으로 휴식을 취하던 에이스 정지석을 2세트 초반 투입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좀처럼 경기력이 개선되지 않았다. 공격수들이 파키스탄의 높이를 뚫지 못해 블로킹에 공격 시도가 저지 당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고전하던 한국은 11-14로 끌려가던 2세트 중반 반격에 나섰다. 허수봉의 오픈 성공과 파키스탄의 연이은 공격 범실, 김민재의 득점으로 15-15로 균형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동점 이후 파키스탄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범실로 18-21까지 다시 격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국은 나경복의 연속 득점으로 20-21까지 쫓아간 뒤 20-22에서 파키스탄 공격 범실로 한 점을 더 보태 21-22로 희망을 이어갔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한국은 승부처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나경복의 공격이 블로킹에 막히고 곧바로 실점하며 21-24가 됐다. 허수봉의 득점으로 한점을 만회했지만 22-25로 2세트까지 파키스탄에 넘겨줬다.
3세트에도 반전은 없었다. 초반부터 1-4로 끌려가며 파키스탄의 기세에 완전히 짓눌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정지석의 공격 성공, 파키스탄의 범실, 정지석의 블로킹으로 4-4 동점을 만들고 접전 상황을 펼치기도 했지만 7-7에서 파키스탄의 서브 에이스와 허수봉과 나경복의 공격 범실로 순식간에 7-10으로 벌어지면서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파키스탄은 흔들리는 한국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3세트 리드를 잡은 이후 한국과 꾸준히 2~3점 차를 유지하면서 저항을 쉽게 따돌렸다. 안정적인 리시브, 선수들의 연계 플레이까지 매끄러웠다.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자주 노출한 한국과 크게 대비됐다.
한국은 끝내 반전을 만들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미 넘어간 승부를 되돌릴 힘이 임도헌호에는 없었다. 3일 연속 게임을 치르는 강행군 속에 선수들의 잔부상이 악화되면서 게임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땅한 카드를 내지 못했다.
한국은 결국 3세트까지 파키스탄에게 헌납하면서 셧아웃 패배의 희생양이 됐다. 200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 무대를 호령했던 호랑이는 이제 머나먼 과거의 얘기가 됐다. 공격수들의 기량은 아시아권에서도 통하지 않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한 부분 투성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확인했다.
한국은 지난 20일 인도와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충격적인 세트 스코어 2-3(27-25 27-29 22-25 25-20 15-17)의 패배를 떠안았다. '항저우 비극'이라는 한국 배구 역사에 쉽게 씻기지 않을 상처가 새겨졌다.
한국 남자 배구가 국제대회 공식 경기에서 인도에게 무릎을 꿇은 건 베트남에서 열린 2012 아시아배구연맹컵(AVC) 이후 11년 만이었다. 변명의 여지 없이 '실력'으로 인도에게 패하면서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다.
이튿날 캄보디아를 세트 스코어 3-0(25-23 25-13 25-15)으로 꺾고 C조 2위로 12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경기력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국제대회 출전이 거의 없는 캄보디아는 FIVB가 세계랭킹조차 산정하지 않는, 아마추어 레벨의 팀이었지만 1세트에 졸전이 나오면서 우려를 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세밀함은 부족해도 높이와 파워에서 우리보다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 파키스탄은 흔들리는 한국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은 인도전에 이어 '실력'으로 졌다.
한국 남자배구가 하계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건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이후 61년 만이다. 한국 남자배구는 1966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까지 14개 대회 연속 시상대에 올랐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건 1978 방콕 아시안게임,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등 총 3번이었다. 은메달 7회, 동메달 4회로 아시안게임 남자 배구에서 만큼은 '강호'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구축했었다.
앞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이란의 벽을 넘지 못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지만 적어도 조별예선이나 12강 토너먼트에서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5년이 흐른 2023년 현시점에서 한국 남자배구는 아시아권에서조차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V리그라는 번듯한 프로배구가 운영 중이지만 공격의 대부분을 외국인 선수에게 의존하는 몰빵배구로 우물안 개구리를 자초한 대가를 최근 들어 톡톡히 치르고 있다.
2019년부터 남자 배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는 임도헌 감독의 지도력도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몸 상태가 100%가 아닌 선수들을 소집한 점, 아시안게임 내내 조직력에서 허점을 노출한 부분까지 사령탑으로서 책임져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임도헌 감독과 대한배구협회의 계약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만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배구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남을 참사를 두 번이나 겪은 만큼 뼈를 깎는 쇄신의 노력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기량 발전 지체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V리그에서 수억원 연봉을 받는 스타들이지만 지금은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전혀 힘을 못 쓰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사진=중국 저장성, 김한준 기자
김지수 기자 jisoo@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