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이예진 기자) 류보리 작가가 ‘트롤리’의 숨은 뒷이야기를 전했다.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가 지난 14일 방송된 최종회로 8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김혜주(김현주 분)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남중도(박희순)의 성범죄를 직접 폭로, 남중도는 뒤늦은 자수와 처벌로 진정한 속죄를 했다.
‘트롤리 딜레마’의 갈림길 앞에서 헤매던 김혜주의 마지막 선택과 함께 의미 있는 마침표를 찍으며 시청자들에게 진한 울림과 여운을 선사했다.
이에 류보리 작가가 종영을 맞아 집필 비하인드를 공개했다. 드라마를 통해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메시지에는 작품에 대한 특별한 소회가 담겼다.
먼저 그는 제목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트롤리 딜레마’ 이론을 착안한 이유에 이어, 극 중 성범죄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류 작가는 “범죄 피의자가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으로 경찰 수사가 종결되는 것을 보며 법체계의 ‘공소권 없음’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납득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수긍하기가 어려웠다”라며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2차 가해를 포함해 또다시 상처를 입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죄를 짓고 극단적 선택으로 도피하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혜주가 과거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맞대응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할 것은 침묵한 피해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2차 가해 등의 두려움으로 인해 침묵을 선택하게 만든 사회”라고 짚었다.
이어 “드라마가 현실과 똑같을 필요도 없고 드라마로나마 소위 ‘사이다’식 대응을 원한 분들도 있겠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폭로를 주저하고 용기 내지 못하는 피해자들에게 ‘그래도 당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고, 이건 모두 사회와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라고 그의 입장을 대변했다.
자신과 한마음 한뜻으로 참여해준 배우들에게도 감사를 잊지 않았다.
첫 미팅부터 큰 힘과 응원이 되었다는 김현주에 대해서는 “김혜주라는 인물이 겪는 파도 같은 감정선은 김현주 배우가 아니었으면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라고 말했고, 캐스팅 단계에서 후반부 내용을 미리 듣고 긴 고민 끝에 남중도 역을 맡아준 박희순에게는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알아주길 바란다며 어려운 결정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싶다”라고 전했다.
다음은 류보리 작가와의 일문일답.
1. 드라마 제목과도 연관되어 있는 ‘트롤리 딜레마’를 함께 녹이게 된 이유는?
평소 경제범죄를 저지른 기업인들이 경제논리를 내세워 형을 경감받는 것을 보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이 질문은 누군가에겐 명확히 ‘그렇다’와 ‘아니다’로 정해진 것일테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답을 정하기 어려운 난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성범죄 피해자인 김혜주가 세상과 자신이 염원하는 ‘남궁솔법’과 법안 발의자이자 남편인 남중도의 성범죄 폭로라는 두 개의 철길 사이에 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트롤리 딜레마’를 녹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명확하게 답이 정해진 문제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2. 극 중 성범죄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처분이 거듭 등장한다. 이를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사기·살인 사건 등에서 범죄 피의자가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으로 경찰 수사가 종결되는 것을 보며 남겨진 피해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성범죄의 경우 경찰 수사를 통한 진실 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의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수사가 종결되면, 피해자들에게 의혹을 제기하며 ‘(살인이나 상해도 아닌) 그깟 일로’ 혹은 ‘무고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식의 2차 가해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법체계의 ‘공소권 없음’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납득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범죄자의 극단적 선택 소식에 환호하는 제3자들과는 달리 사실을 폭로한 피해 당사자들의 마음도 그러기만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가해자의 사망이 피해자에게 후련함을 안길 수도 있지만,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 피해자가 받는 충격과 괴로움도 당연히 있지 않을까.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2차 가해를 포함해 또다시 상처를 입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죄를 짓고 극단적 선택으로 도피하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3. 여러 차례의 성범죄 사건들 가운데 가해자 가족의 각기 다른 모습도 그려졌다. 이에 대해서 의도한 바가 있다면?
극 중에도 언급되었듯이 국내 성범죄 사건의 수는 연간 3만여 건으로, 서울 잠실 야구장의 만원 관중 기준인 2만 5천여 명보다 많다.
이때 이 성범죄자들 대부분도 누군가의 가족일 것이다. 이에 내 가족의 성범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3자의 입장에서는 경찰 신고가 당연하게 여겨지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성범죄 가해자의 배우자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트롤리’에 등장하는 성범죄자의 가족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이유신(길해연)은 진실을 알면서도 은폐하여 김혜주를 가해자로 만들었고, 의대생(=지승규)의 부모는 아들의 성매수 이력을 숨기면서 남중도의 공개 저격을 비난한다. 진승희(류현경)는 “넌 네 가족을 못 믿어?”라는 한 마디에 친구 김재은(=김혜주)보다 진승호(이민재)를 믿기로 선택한다.
남중도가 남지훈(정택현)의 성범죄(거짓)를 폭로했을 때, 김혜주는 피해자라는 자신의 과거와 가해자의 엄마라는 새로운 입장 사이에 처한다. 그리고 남중도와 김수빈(정수빈) 중 누굴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남편을 믿기로 한다. 이후에 남중도의 성범죄를 알게 된 김혜주는 ‘남궁솔법’을 위해서 침묵하려 했지만, 피해자인 현여진(서정연)은 물론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성범죄가 알려지는 것을 눈물로 말리는 딸 남윤서(최명빈)를 위해서라도 폭로하기로 마음을 돌린다.
이처럼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의심한다는 것도, 가족의 추악한 범죄를 폭로한다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린 다양한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4. 김혜주가 과거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맞대응하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에 대해 시청자들의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혜주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 성범죄 피해 사실을 뒤늦게 용기 내 폭로하는 피해자들을 향한 의혹 제기와 ‘그때 폭로했었어야지’, ‘당신이 피해자인데 왜 침묵했냐’라는 일부 비난에 마음이 쓰였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침묵한 피해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2차 가해 등의 두려움으로 인해 침묵을 선택하게 만든 사회가 아닐까.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감독님과 함께 ‘피해자들에게 즉각적인 폭로를 강요하고 투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폭력이고 가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나눴다. 그런 의미에서 15회에서 폭로를 주저하는 현여진에게 김수빈이 “그럼 제가 신고할 것”이라고 하자, 김혜주가 현여진의 뜻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그 후 현여진은 폭로를 선택하긴 하지만, 여전히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접 기자회견장에 가지는 못한다. 그가 기자회견을 대신 서게 한 것을 사과하자 김혜주가 전혀 미안할 일도 아니고, 충분히 용기를 낸 것이라고 다독이는 장면은 그처럼 폭로를 두려워하는 피해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드라마가 현실과 똑같을 필요도 없고 드라마로나마 소위 ‘사이다’식 대응을 원한 분들도 있겠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폭로를 주저하고 용기 내지 못하는 피해자들에게 ‘그래도 당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고, 모두 사회와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집필 내내 지니고 있었다.
5. 극 중 남중도가 성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데 의도한 것인지?
캐스팅 단계부터 배우들에게 남중도의 과거 성범죄 장면은 영상으로 절대 재현되지 않을 것이며,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이유도 전혀 언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15회에서 남중도가 변명을 하려고 하지만, 김혜주는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이유도 없다”라고 단칼에 자른다. 러닝타임 관계상 편집되었지만 남중도가 경찰에 출두할 때 기자들이 범죄 이유나 횟수, 장소 등과 같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질문을 쏟아내지만 (죄를 반성하고 있는) 남중도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장면도 있었다.
남중도가 성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개연성이 없다’라는 지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성범죄 가해자의 목소리는 드라마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6. 김현주, 박희순을 비롯해 진정성 있는 열연을 펼친 배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주요 배우들에게는 캐스팅 당시에 이야기의 큰 줄기를 공유했다.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 이후에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제작사도 의미 있는 이야기라며 용기를 줬고, 김현주 배우가 첫미팅 때 “감정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에 아주 큰 힘을 얻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움츠러들지만, 결국 더 이상은 도망치지 않고 ‘(자신)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김혜주라는 인물이 겪는 파도 같은 감정선은 김현주 배우가 아니었으면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박희순 배우에게는 남중도의 불륜(거짓)을 포함해 후반부 내용을 상세히 공유했다.
처음 배역을 제안했을 당시 박희순 배우는 기획 의도에 매우 공감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가 성범죄자라는 설정에 대해 거부 반응이 굉장히 컸다. “이해도 가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역겨운 (성범죄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배우의 말에 완전히 공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희순 배우가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매우 바른 사람이라서 이 역을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알아주길 바란다”라며 고민 끝에 어려운 결정을 해준 박희순 배우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김무열 배우와 서정연 배우도 각 캐릭터의 입장에 완전히 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주었고, 그들의 깊은 캐릭터 해석 덕분에 좋은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작업할 수 있어 행운이었다. 특히 고통스러운 과거를 숨긴 채 많은 장면들을 연기하느라 고생한 서정연 배우에게 큰 고마움을 전한다. 다만 작품에 가장 늦게 합류한 정수빈 배우에게만은 남중도의 비밀을 ‘불륜’이라고만 공유했는데, 이는 극 중 김수빈이 남중도의 비밀을 불륜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14회 대본을 쓴 후에 미안함을 전했는데 정수빈 배우가 제작진의 의도를 이해해줘서 감사했다.
7. ‘트롤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과 대사들을 꼽는다면?
16회에서 우진석(김미경 분)이 ‘남궁솔법’의 전개를 지켜보며 폭로를 기다려보면 어떻겠냐고 하자, 김혜주는 “이혼도 지금은 안 된다, 폭로도 지금은 안 된다… 그럼 언제 해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와 함께, 이때 그녀의 얼굴을 ‘트롤리’를 쓰는 내내 생각했다.
또 남중도의 성범죄 폭로를 결심한 김혜주가 딸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제발 폭로하지 말라고 울면서 발버둥 치는 남윤서를 꽉 끌어안는 김혜주의 얼굴과 “제 선택이 지금 당장 제 아이를 힘들게 할지라도… 저는 이 아이가 선택의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라는 내레이션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한 장면이다.
이 드라마에 유일한 판타지라면, 남중도가 구치소에서 김혜주가 수선한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보는 장면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라도 죄를 지은 이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도피하지 않고, 살아서 뉘우치고 죄의 대가를 치르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마지막으로 폭로 이후 책 수선실에 익명의 편지가 온 장면이 있다. 김혜주는 폭로를 선택했지만 ‘남궁솔법’이 무산된 것에 마음의 무거움을 쉽게 떨치지 못했을 사람이다.
어쩌면 ‘남궁솔법’ 쪽에 선 사람들의 원망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폭로로 자신도 용기를 낼 수 있어 고맙다는 어느 피해자의 편지, 그리고 폭로 이후 관계가 서먹해진 딸 남윤서가 김혜주를 이해하는 순간, 김혜주는 지난 20년간 지고 있던 마음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마침내 평안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주에게 이 순간을 안겨주기 위해 이 드라마를 쓴 것 같다.
사진= 스튜디오S
이예진 기자 leeyj0124@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