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노트북]에서는 그 동안 인터뷰 현장에서 만났던 배우들과의 대화 중 기사에 더 자세히 담지 못해 아쉬웠던, 하지만 기억 속에 쭉 남아있던 한 마디를 노트북 속 메모장에서 다시 꺼내 되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김유진 기자)
"연기라는 것이, 내가 아닌 것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연기력이 너무나 출중한 DNA가 있어서 정말 어떤 배우들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이렇게 보면 다 살아온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얘기냐면,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편적이고 올바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2016.09.05. '고산자, 대동여지도' 인터뷰 중)
계속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역시나 어려웠던 2021년 올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반가웠던 것은, 배우 차승원의 꾸준한 작품 활동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죠.
4월 9일 넷플릭스로 공개된 영화 '낙원의 밤', 8월 11일 개봉한 '싱크홀', 11월 27일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된 드라마 '어느 날'까지 어느 해보다 작품을 통해 차승원이 보여준 다양한 캐릭터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작인 '어느 날'은 평범한 대학생에서 하룻밤 사이 살인 용의자가 된 김현수(김수현 분)와 진실을 묻지 않는 밑바닥 삼류 변호사 신중한(차승원)의 치열한 생존을 그린 범죄 드라마로, 차승원은 괴짜 변호사 신중한 역을 맡아 진지함과 유쾌함을 오가는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죠.
봄부터 '어느 날' 촬영을 계속 이어갔던 차승원은 '낙원의 밤' 공식 행사와 여름 '싱크홀' 개봉을 앞두고까지 긴 머리를 5대5 가르마로 정갈하게 빗어 넘긴 스타일과 수염을 기른 얼굴로 공식석상에 등장해 시선을 끌었습니다.
'싱크홀' 인터뷰 당시에는 긴 머리와 수염을 유지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고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에서 괴짜 변호사를 연기하거든요. 좀 평범하지 않고 고뇌하는 캐릭터인데, 그래서 이렇게 수염도 막 기르고 그랬었어요. 촬영이 끝나면 자를 것인데요. 제가 수염을 깎으면 바로 서른두 살이 됩니다. 뒷모습을 보면 20대로도 보일 수 있을걸요?"라고 넉살을 부리기도 했었죠.
몇 개월이 지나 '어느 날' 속 차승원의 모습을 보니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렀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승원은 "신중한이 야인 같아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토피로 고생 중인 설정까지 직접 이명우 감독에게 제안했던 얘기를 제작발표회에서 직접 전하기도 했었죠.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 사건에 휘말린 김현수 변호에 나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변모하는 신중한의 모습을 외모와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해 낸 차승원의 호연에 '어느 날'을 본 시청자들의 호평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19일 마지막 회인 8회 공개 후 막을 내렸죠.
늘 그랬듯 한 작품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노력했을 차승원의 모습을 보며 5년 전 출연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 개봉을 앞두고 가졌던 인터뷰에서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전하던 그의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2016년 9월 개봉한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차승원은 타이틀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역을 맡아 데뷔 29년 만에 첫 실존인물 연기에 나섰죠. 9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어진 로케이션은 물론, 무려 10만6240km에 달하는 거리를 오가며 김정호의 흔적을 찾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능 '삼시세끼' 출연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던 차승원은 올해만큼이나 활발했던 자신의 활약상을 언급하던 취재진의 말에 쑥스러워하며 "저는 제가 나온 프로그램을 잘 못 보겠어요. TV를 틀다가 혹시라도 제 모습이 나오면 빨리 돌리거든요"라고 얘기했죠.
"내가 한 것이 다 기억이 나는데 특별히 본다고 해서 뭐…"라며 특유의 농담기 어린 시크한 말투로 말을 이은 차승원은 이내 진지하게 "가끔씩 볼 때도 있는데, 내가 모르는 카메라에 있는 내 모습이 있잖아요. 거기서 현실의 저와 너무 괴리감을 느끼면 '이건 좀 고쳐야 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있죠. 다행히 요즘에는 그런 것은 없어요. (작품 속의) 차승원과 지금 현실의 저의 접점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지금 제 나이 정도 되면,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해도 현실적이게 돼요. 그게 큰 장점이지"라고 이야기를 이어간 차승원은 마음속에 갖고 있던 연기에 대한 고민들을 살짝 털어놓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연기에 대한 생각을 전했습니다.
"연기라는 것이, 내가 아닌 것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연기력이 너무나 출중한 DNA가 있어서 정말 어떤 배우들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이렇게 보면 다 살아온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얘기냐면,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편적이고 올바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들이 이해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자기 색깔을 입히는 것이에요. 그 보편적인 사고 식이 어떤 것이냐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을 잘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연기로 나오는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배우의 연기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 이전에 일상적으로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내가 생뚱맞지 않을 수 있잖아요."
5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현실의 자신과 작품 속 모습의 접점을 찾아가려는 차승원의 고민은 매 순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지난 4일 방송된 JTBC 예능 '세리머니 클럽'에 출연한 차승원은 "연기하다 보면 편하게 느껴지는 역할이 있냐'고 묻는 김종국에게 "배우마다 맞는 역할들이 좀 있죠. 그런데 제가 불쌍한 역할을 연기한다고 하면 그건 좀 힘들어요. 배우는 어떤 역할도 연기해야 하지만, 그걸 바라보시는 분들은 좀 가식이라고, 저건 진짜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았죠.
"저는 굉장히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들도 제가 넘어야 될 산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소위 말해서 채찍질을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멀찍이서 떨어져서 보려고 하고 그렇게 계속 저를 연구하는 것이죠. 사실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결핍이거든요. 그 결핍이 없으면, 저는 이 일을 못할 것 같아요. 배우라는 것이 무언가를 일궈내고 성취하는 그런 과정인데, 그런 결핍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미완성이죠. 그러다가 이제 좋은 작품을 만나면 참여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 계획은 그래요. 늘 말해왔지만, 식구들과 일상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평범하고 보편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에서 차기작 활동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라고 말했던 차승원은 다시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로 돌아와 다음 변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후에도 차승원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등 작품 활동을 계속하죠.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연기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신을 고민하는 베테랑 차승원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집니다.
사진 = 엑스포츠뉴스DB, 쿠팡플레이, 각 영화 스틸컷, JTBC 방송화면
김유진 기자 slowlif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