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윤인섭 기자의 수다메리까!] - 풋볼 아메리까노(12)
-클라시코(clásico)란?
클라시코란 스페인어권에서 오랜 라이벌 감정의 두 팀이 맞붙는 경기를 의미한다. 영어권에서 부르는 '더비'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스페인 어와 유사한 점이 많은 포르투갈어로는 '클라시쿠'라 한다. -
지난 18일 새벽(이하 한국시각),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대표팀의 축구 경기는 경기 종료 직전에 터진 리오넬 메시의 결승골로 아르헨티나의 1-0 승리로 막을 내렸다.
비록 평가전이란 타이틀이 걸려 있었지만, 후반 인저리타임에야 첫 골이 터진 것처럼 양 팀은 패배를 모면하기 위해 안정적인 경기운영을 펼쳤고 치열한 중원싸움과 숱한 반칙으로 친선경기에 어울리지 않는 격전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그 경기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대결이기에 충분히 이해 갈만한 상황이었다. 남미 축구의 쌍웅이 맞붙는 경기에서 '친선'이란 단어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관계처럼, 마치 숙명의 한일전을 연상시키는 뜨거운 라이벌전 4경기를 골라봤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악연만큼, 남미의 근대사 역시 각국의 치열한 경합과 전쟁을 거듭했고, 그 와중에 어떤 종류의'패배'도 용납될 수 없는 앙숙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1. 아르헨티나-브라질 (남미 클라시코. Clásico Sudamericano)
시작: 1908년 전적: 34승23무34패 동률 최근: 2010.11 아르헨티나 1-0 승
면적, 인구(최근 들어 콜롬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추월하고 2위로 올라섬), 경제규모 등에서 남미 1,2위를 다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모든 면에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단순한 덩치로 따진다면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브라질이 남미 유일의 비 스페인어권 국가라는 점, 아르헨티나보다 덜 체계적이던 근대화 과정으로 남미 내에서 양국의 위상은 용호상박이 되었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월드컵에서의 성과는 브라질(5회 우승, 아르헨티나는 2회)이 다소 앞서지만, 코파 아메리카(우승횟수, 아르헨티나 14-브라질 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22-14로 아르헨티나가 우승횟수 우세) 등 남미 내 국가대항전과 클럽 대항전에서 거둔 성과는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압도한다. 더군다나 102년에 걸친 양국의 역대 대표팀전적은 34승23무34패로 완벽한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다.
리이벌 관계는 20세기 최고의 선수를 다루는 데도 빗겨가지 않는다. 지난 세기 최고의 선수, 두 명을 꼽는다면 브라질의 펠레와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를 들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기록상의 수치는 펠레가 한 수 위이지만, 한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봤을 때, 마라도나는 펠레보다 훨씬 독보적이었다.
최고의 명승부: 코파 아메리카 2004 결승, 2004.7.26 리마 국립경기장, 페루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남미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에서 처음으로 결승대결을 펼쳤다. 남미 축구 최고 라이벌의 결승 맞대결이 21세기에야 이뤄졌다는 부분에서 많은 의구심이 들 수 있겠으나, 코파 아메리카 대회가 오랜 기간 홈 앤 어웨이의 리그제로 치러졌다는 점,'잊혀진 강호'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와 함께 대회 최다 우승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첫 결승 격돌이었지만, 결승전의 긴장감은 다소 김이 새 있었다. 11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아르헨티나가 최정예 군단을 내세웠지만, 브라질은 호나우지뉴, 호나우두, 카카 등 주력 다수가 빠진 1.5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경기는 아르헨티나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되었다. 브라질의 젊은 선수들은 아르헨티나의 저돌적인 공세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고 전반 18분 만에 페널티 킥을 헌납하며 아르헨티나 주장 킬리 곤살레스에 선제골을 실점했다.
브라질은 전반 종료 직전, 세트피스 상황에서 수비수 루이장이 헤딩 동점골을 터트리며 경기를 동률로 가져갔지만, 후반전에 들어서도 아르헨티나의 역공은 그치지 않았다. 카를로스 테베스의 골과 다름없는 슈팅이 줄리우 세자르의 신기에 가까운 선방에 막히는 등,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의 거침없는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결국, 후반 42분, 줄기차게 두드리던 브라질의 골문이 열렸다. 후안 파블로 소린의 헤딩 패스가 세사르 델가도에게 연결됐고, 델가도는 강력한 오른발 하프발리 슈팅으로 브라질 골문의 오른쪽 구석을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벤치가 우승 세레모니를 준비하던 후반 48분, 브라질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 공격을 위해 미드필드라인 후방에서 길게 연결된 공이 아르헨티나 문전에서 혼전상황을 일으켰고, 그 순간 아드리아누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왼발 터닝슛을 연결,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골문 왼쪽 구석으로 공이 흘러간 것이다.
당시 코파 아메리카 규정상, 경기는 연장전 없이 곧장 승부차기로 돌입했다. 그리고 이날, 숱한 선방으로 브라질의 패배를 막은 줄리우 세자르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아르헨티나의 선공으로 시작됐기에 아르헨티나가 다소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줄리우 세자르가 아르헨티나 첫 번째 키커, 안드레스 달레산드로의 슈팅을 막아낸 것이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두 번째 키커, 가브리엘 에인세의 슈팅이 하늘을 향했고 브라질은 키커 전원이 득점에 성공하며 아르헨티나를 승부차기에서 4-2로 꺾고 대회 7번째 정상을 차지했다.
2. 아르헨티나-우루과이 (라플라타 클라시코, Clásico del Río de la Plata)
시작: 1901년 전적: 84승41무55패 아르헨티나 우세 최근: 2009.10 1-0 아르헨티나 승
라플라타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하류에서 그 폭이 200Km 이상이 돼, 세계 최고의 폭을 자랑한다. 그리고 언어적, 문화적으로 동질감이 강한 양국을 하나의 이름으로 일컬을 때, 이 강의 이름'라플라타'가 사용된다. 양국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라플라타 부왕령'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미에 독립 열풍이 몰아 닥친 19세기에 들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분열의 운명을 맞이한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치르는 사이, 포르투갈 군대가 우루과이를 점령했고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결국,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독립하자마자 전쟁의 굴레에 다시 발을 담갔고, 양국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우루과이는 남미 대국,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완충지대로서 독립(183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과거의 한 식구인지라, 양국 사이엔 엄청난 인적, 물적 교류가 이어지며 남미 다른 국가들과 다른 특별한 관계가 맺어졌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사이가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는 소국 우루과이를 마치 자국의 한 지방이나 되는 듯 업신여겼고, 우루과이 역시 콧대 높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반감을 심심찮게 드러냈다.
그러나 소국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전쟁은 비현실적이었다. 대신, 이러한 악감정의 대리전으로 축구란 스포츠가 부상했다. 축구에서만큼은 우루과이도 아르헨티나에 밀릴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우루과이 축구가 아르헨티나에 라이벌이란 이름이 어색하지만, 20세기 초반 우루과이 축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주름잡은 세계 최강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1901년,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양국의 역사적인 첫 대결(아르헨티나 3-2승)이 이뤄졌다. 당시 이 경기는 양국의 첫 경기일 뿐 아니라, 브리튼 섬(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치러진 첫 번째 A-매치였다.
이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대결은 남미 최고의 자리를 건 한판이 되었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의 결승(2-1, 4-2 두 차례 모두 우루과이의 승) 무대를 장식하며 세계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명성을 더했다.
최고의 명승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 1930.7.31 몬테비데오 쎈테나리오 경기장, 우루과이
당시 세계 최고의 라이벌답게,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대결은 초대 월드컵 결승 무대를 장식했다. 그러나 양국의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 싸움은 결승전 공인구를 놓고도 벌어졌는데, 결국, 전반은 아르헨티나의 공을, 후반은 우루과이의 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힘겹게 타결점을 찾았다.
자신들의 공으로 전반을 시작한 아르헨티나는 전반 12분, 우루과이의 파블로 도라도에게 선제 실점을 내줬지만, 카를로스 파우세셰와 기셰르모 스타빌레의 연속골로 전반을 2-1로 앞선 채 끝마쳤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공으로 진행된 후반전에서 우루과이는 페드로 세아, 산토스 이리아르테, 엑토르 카스트로의 골이 터지며 아르헨티나를 4-2로 꺾고 월드컵 초대 챔피언의 영예를 가져간다.
그러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아르헨티나 관중들은 곧바로 폭도로 변해 몬테비데오 시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우루과이 영사관이 공격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단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러 축제가 될 월드컵이 양국의 관계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3. 브라질-우루과이
시작: 1916년 전적: 32승19무19패 브라질 우세 최근: 2009.6 브라질 4-0 승
아르헨티나-브라질, 아르헨티나-우루과이만큼의 악감정은 없지만, 남미 3대 거인 중 나머지 대결인 브라질-우루과이전도 남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팀 레벨의 클라시코이다.
사실,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브라질의 영향이 가장 짙은 나라이다.'셰'발음으로 대변되는 우루과이 특유의 스페인 어 사투리는 포르투갈어의 영향에서 비롯되었고, 알바로 페레이라, 다리오 실바 등 우루과이 축구 선수 중, 포르투갈식의 성을 가진 선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우루과이의 전력약화로 다소 김빠지는 승부가 됐지만, 양국은 한 차례의 월드컵 결승, 5차례의 코파 아메리카 결승에서 만나 양팀 공히 세 차례(월드컵은 우루과이)의 우승컵을 가져갔다.
최고의 명승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리그 3차전, 1950.7.17 히우 제 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 브라질
비록, 공식적인 결승전은 없었지만,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결승리그 최종전은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의 우승팀을 가릴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브라질은 아데미르, 지지뉴 등을 앞세워 역대 최고의 공격력을 발휘, 결승리그 앞선 두 경기에서 스웨덴과 스페인을 7-1과 6-1로 대파했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에 힘겹게 2-2 무승부를 거두었고 스웨덴에는 후반 막판 연속골로 3-2로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브라질은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할 수 있었지만, 우루과이에 대승을 거둬도 놀랍지 않은 지경이었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브라질이 이번 대회 처음으로 전반전 득점에 실패한 것이다. 비록, 브라질이 후반 시작하자마자 프리아싸의 선제골이 터지며 기선을 제압했지만, 그것은 우루과이의 극적인 승리를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후반 21분, 우루과이의 축구 영웅, 후안'페페' 스치아피노가 브라질의 골문에 동점골을 선사했고 후반 34분에는 스치아피노의 패스를 받아 알씨데스 기기아가 역전 골까지 성공한 것이다.
당황한 브라질은 동점을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우루과의 두터운 수비에 막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결국, 우루과이는 20년 만에 월드컵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만끽했고, 브라질은 쓰디쓴 패배로 자살자가 속출하는 등, 혼돈의 월드컵 후폭풍을 맞이해야 했다.
4. 칠레-페루 (태평양 클라시코, Clásico del Pacifico)
시작: 1935년 전적: 36승14무20패 칠레 우세 최근: 2009.3 3-1 칠레 승
사실, 칠레와 페루는 스페인 식민군대를 몰아나는 데 연합 전선을 펴는 등 독립 직후 한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그러나 칠레-페루-볼리비아 국경의 광물지대가 칠레와 페루의 친선관계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결국, 1879년,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동맹 간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지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 전쟁은 3년여에 걸쳐 약 50,000여 명의 사상자(칠레: 15,000, 페루-볼리비아: 35,000)를 낸 끝에 칠레의 승리로 끝났다. 칠레는 전쟁의 승리로 국경을 북쪽으로 1,000km나 확장,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가 되었다.
반면 페루와 볼리비아는 막대한 땅을 칠레에 빼앗겼고, 볼리비아는 태평양 영토를 상실하며 오늘날의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은 안콘 강화조약으로 1883년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양국은 감정적으로 서로에 대한 원한을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악감정이 결국, 칠레 축구와 페루 축구의 뜨거운 라이벌 관계를 이끄는 셈이다.
이후 양국은 그들의 축구실력으로 말미암아 코파 아메리카 결승이나 월드컵의 중용한 길목에서 서로 상대하는 일은 없었지만, 몇 차례 맞붙은 월드컵 예선(월드컵 남미 예선이 풀리그로 진행된 것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에서 서로를 떨어뜨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칠레는 1974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페루를 떨어뜨렸고 페루는 1978년 월드컵에서 칠레를 예선 탈락의 길로 내몬 적이 있다.
한편, 양국은 서로 바이시클 킥의 원조라 주장하고 있다. 칠레에서는 칠레 축구의 전설, 라몬 운사가가 1914년 칠레 리그경기에서 바이시클 킥을 창조했다고 하고, 페루 측에서는 19세기 후반, 카야오 항구에서 영국 해군과 축구를 벌이던 페루의 아프리카 계 노동자들이 이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한다.
[사진(C)올레 홈페이지 캡쳐]
윤인섭 기자 press@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