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7.12 07:52 / 기사수정 2010.07.12 07:54
[엑스포츠뉴스=대구, 김현희 기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많은 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그라운드에 수놓았다.
특히, 프로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유니폼을 입었던 원년 멤버들의 자부심은 상당하다. 이들이 없었다면, 프로야구 '시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 원년부터 야구를 지켜본 '올드 팬'들은 이들을 일컬어 '선구자'라고도 부른다.
프로 원년 멤버 중에서는 박철순과 이만수 같이 시작부터 큰 업적을 낸 선수들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소리 없이 그라운드를 떠난 이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재능이 스타급 선수만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마야구 시절에는 프로에서 '스타' 칭호를 받던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경우가 많다. 대구 상원고등학교의 사령탑인 박영진(52)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1977년 청룡기 선수권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 투수상을 받은 박 감독은 동시대에 활약했던 그 어떤 선수보다도 빼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성균관대 시절에도 연세대/고려대 등 명문들을 제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스가 박 감독을 스카우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모교인 대구상고(현 대구 상원고)에 정말 투수가 없었다. 당시 공을 1,500개는 던진 것 같았다. 던지고 또 던져도 마운드에 다시 올라야 했다."
하지만, 프로 원년멤버가 된 박영진의 어깨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당시에는 재활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결국, 박영진은 1984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으며, 아까운 재능을 프로에서는 끝내 꽃피워 보지 못했다. 이후 삼성 프런트를 거쳐 모교 감독이 된 박영진은 상원고를 이끌고 전국대회에서 호성적을 거두며, '제2의 성공시대'를 열고 있다.
"부상으로 못 던질 때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야구 철학을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기 위해 대붕기 전국대회가 한창인 대구 시민구장에서 박 감독을 만나보았다.
'나만' 몰랐던 고교 유급
- 전국대회가 시작될 때마다 매번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특히, 1977년 청룡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MVP에 해당하는 우수투수 상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가?
박영진(이하 '박') : 당시에는 팀이 많이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투수가 없었다. 현 삼성 2군 투수코치인 양일환을 포함하여 현재 경주고에서 체육교사로 재직 중인 권기홍과 나, 이렇게 투수가 3명밖에 없었다. 팀이 이렇다 보니, 당시 정동진 감독(전 삼성/태평양 감독)께서 나를 유급시키셨다. 당시에는 선수 동의 없이도 감독이 선수를 유급시킬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웃음).
그런데 나는 감독님께서 나를 유급시킨 것도 몰랐다. 졸업 시기가 돼서 졸업장 받으러 교실에 가니까 선생님께서 나를 빤히 바라보시더라. "너 왜 왔냐?"라면서. 그래서 "졸업인데 당연히 졸업장 받으러 왔다"고 이야기하니까, 선생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더라. 그제야 내가 유급한 것을 알았다.
어쨌든 유급 이후 청룡기 지역 예선부터 거의 혼자 던졌다. 본선에서는 6경기 연속으로 등판했는데, 1/3이닝 던진 것을 빼고는 거의 완투하다시피 했다. 패자부활전 포함해서 한 1,500개는 던진 것 같다. 그런데 그때에는 그게 또 재미있었다.
- 그렇게나 많이 던졌는가?
박 : (고개를 끄덕이며) 오죽하면 코피를 많이 흘렸겠는가. 그만큼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주심이 솜을 한 뭉치 준비해서 코에서 피가 범벅이 될 때 즈음에 솜을 갈아주기도 했다(웃음). 그래서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KBS 유수호 아나운서가 나에게 별명을 지어줬다. ‘와지마 고이치(일본 복싱 영웅)’라고. 당시 와지마 선수가 여러 차례 다운을 당해도 우뚝 일어서서 다시 경기하곤 했는데, 그 모습과 내가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
- 그 외에 기억나는 고교시절 추억은 없는가?
박 :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와의 준결승전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1-3으로 지고 있었는데, 내가 타석에 들어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고, 그 다음 타석에서도 솔로 홈런을 쳤다. 연타석 홈런을 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투수만 잘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만능이었는데?
박 : (웃음) 과찬의 말씀이다.
명문대 잡는 영건, 에이스 박영진. 그리고 프로행
- 이후 성균관대에 진학했다.
박 : 대학 시절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성대에서 장학금 지급 조건으로 현금 스카우트를 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주구장창' 던졌다. 그러면서 대학야구에서 두 번의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당시 ‘야구 명문’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연세대와 고려대였다. 연세대에는 최동원이, 고려대에는 노상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등판하는 날이면, 상대 타자들이 ‘2루’를 밟지 못했다. 그래서 경기에서 지는 것과는 별도로 연/고대 선수들이 기합을 받았다고 하더라. 당시 고려대 선수였던 박종훈 감독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나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얼차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웃음).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성균관대가 ‘야구명문'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 그랬기 때문에, 연고 구단인 삼성에서 박영진을 스카우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였을 것 같다.
박 : 대학 4학년 때 농협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대리 임명장'을 주는 조건으로 농협에 가겠다고 이야기했더니,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농협에서는 10년을 근무해야 '대리'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대학 4학년 1학기 때부터 농협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82년에 삼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안정된 생활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삼성으로 가서 프로 원년 멤버가 될 것인지 여러 차례 생각을 했다. 결국, 프로행을 결심했는데, 당시 삼성에서 내건 조건이 계약금 1,200만 원이었다. 지금의 1억 원에 맞먹는 금액이었던 만큼, 정말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 좋은 조건으로 삼성에 입단했지만, 원년에 1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박 : 대학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팀에서 치료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만큼,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수술'도 생각을 못 할 때였다. 다친 어깨가 재생이 안 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공을 던질 때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따랐다. 그래서 현역 시절 내내 정동진 감독님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퇴 직후 정동진 감독님과 술자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감독님, 그때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때는 아무 대답을 해 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이만수(현 SK 2군 감독)를 포함한 대구상고 졸업 멤버들이 정동진 감독님과 사모님을 초청하여 술자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한 번 더 물어봤다. "감독님,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그러더니 딱 한 말씀만 하시더라. "야, 이놈아! 우승하려고 그랬지!"라고.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더라(웃음). 사모님께서도 "당신, 박 감독님께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라고 한마디 거드셨다. 사모님 역시 배구선수였기에, 운동하는 선수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리신 정동진 감독께서도 매우 괴로우셨을 것이다. 내가 감독이 되고 나니까 그런 심정을 잘 알겠더라. 사실, 강심장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한 투수를 연투시키지 못한다. 내가 만약 당시 정동진 감독이었다면,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 박 감독께서 아마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선희 투수(현 삼성 스카우트)가 연일 마운드에 올라 고군분투했다.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나 싶다.
박 : 저런 자리에 나도 서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매 경기를 볼 때마다 참 꿈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은퇴, 그리고 지도자의 길
- 프로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달라.
박 : 1982년에 행크 아론이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는가? (애틀랜타 더블 A팀을 대동하고 어니 뱅크스 등과 함께 온 일을 말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렇다. 당시 선발 투수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볼넷을 연거푸 3개나 주고 강판당했다. 당시 대회 이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연수를 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 볼넷 3개 때문에 일본 연수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당시 김재하 과장님(현 삼성 단장)이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당시 우리 투수들은 투구를 마치고 나면 더그아웃에서 더운 물로 어깨 찜질을 했다. 그것을 본 미국 선수들이 “저거 미친 짓이다(Crazy)!”라고 하더라. ‘아이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의 시행착오이기도 했다.
- 1984년에 딱 1이닝을 던지고 은퇴했다.
박 : 이후 군에 입대했다. 군 전역 이후 1987년부터 삼성 프런트 일을 시작했다. 1988년까지 2군 매니저를, 1993년까지 1군 매니저를 맡았다. 그런데 1993년 이후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김성근 감독(현 SK 감독)께서 코치로 오라고 제의하셨다.
그런데 나는 필드 코치로 나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고사했는데, 만약 그때 내가 합류했다면, ‘김성근 사단’의 멤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런트에서 물러난 이후 2000년도에 모교 투수코치로 부임하기 전까지 영어학원 사업을 했다.
▲ 박영진 감독은 지난해, 소속팀을 이끌고 대통령배 준우승, 대붕기/전국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 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면, 부상으로 못 던질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다.
박 : 그래서 절대 선수들을 무리시키지 않는다. 내가 그러한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
- 그런 점에 있어서 지난해 박화랑(현 삼성 라이온스)의 연투는 약간 예외로 해야 할 것 같다. 워냑 연투 능력이 좋지 않았는가.
박 : 그랬다. 그렇게 많이 던졌는데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안 했다. 투구 자세 자체가 부드러워 연투를 해도 큰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도 연락이 온다. 장담하건데 앞으로도 박화랑처럼 타자들을 향하여 여유 있게 공을 던지는 사이드 암 투수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프로에서는 힘을 길러야 통한다.
-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지도 철학'을 말해 달라.
박 : 부상 없이, 열심히 하면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해준다. 야구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 질문이다. 박 감독님께 ‘야구’란 무엇인가?
박 : 야구는 인생이다.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존재한다. 야구를 하면서 이것만큼 정직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을 하면, 반드시 대가가 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에게 야구를 시켜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드린다.
※ 박영진(대구 상원고등학교 감독)
1. 생년월일 : 1958년 7월 27일
2. 경력 : 대구상고 - 성균관대 - 농협 - 삼성 라이온스
3. 수상경력 : 1977년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최우수 투수상
4. 프로 통산 성적 : 9와 1/3이닝, 1세이브. 평균자책점 9.64
[사진=박영진 상원고 감독 (C) 엑스포츠뉴스 김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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