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조은혜 기자] "한국시리즈가 다르긴 다르네요. 여기저기서 연락도 많이 오고, 인천에서 돌아다니면 많이 알아봐 주세요. 그런 데서 확실히 인기를 실감해요". 최근 몇 년 김태훈(29·SK)이라는 선수에게 달라진 것은 비단 인지도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고 마침내 한 단계를 올라선 그는, 자신의 시간을 발판 삼아 또 다른 도약에 나선다.
▲혼나지 않으려고 시작한 야구
김태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야구공을 잡았다. 수업에 들어가기 싫었던 날 마침 야구부 테스트가 있었다. 야구의 '야' 자도 몰랐던 그때 핑계 삼아 봤던 테스트에서 덜컥 합격했고, 야구광이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뛰어노는 것이 좋았던 김태훈은 그렇게 야구의 매력에 빠졌다. 우연처럼 시작했지만 구리 인창고 재학 시절이던 2008년 미추홀기 16강에서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고교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SK 1차 지명을 받으면서 프로 무대를 밟게 됐다. 김태훈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넘어오는 그 구간이 그때는 정말 설렜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녹록지 않았고, 김태훈에게 '1차 지명자'와 '꽃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팔꿈치 상태도 좋지 않아 2009년을 재활로 보냈다. 2010년 9월 17일 데뷔전에서는 한 타자를 상대로 고의4구만 내준 뒤 마운드를 내려온 '웃픈' 기억만을 남겼다. 김태훈을 그렇게 많은 시간을 2군 생활과 재활로 보냈다.
김태훈은 "재활할 때는 아파서 하기 싫고, 2군에서 성적이 좋아서 1군에 올라와도 보여주지 못하고 내려오는 일이 잦아 굉장히 힘들었다. 야구를 놓고 싶던 적도 많았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구속까지 느려지면서 희망이 안 보인다 싶어서 좌절도 많이 했다"고 지난날들을 돌아봤다.
그때 김태훈의 멘탈을 잡아준 사람이 제춘모 코치였다. 김태훈은 "코치님께서 '나도 이렇게 코치가 됐다'면서, 야구를 놓지 말라고 얘기해주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내가 힘들어 보이면 타인의 시선에서는 '얘는 안 되겠다' 이렇게 느낄 수도 있어서 티를 안 냈다. 최대한 '하려고 하는구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불안함, 혹독함으로 지우다
김태훈은 더디지만 부지런히 나아갔다. 2017년에는 트레이 힐만 감독의 신임 아래 선발과 구원으로 오가며 21경기 41⅓이닝을 소화했다. 5월 26일 데뷔 첫 승의 감격도 안았다. 다만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후반까지 이어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1군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지만 김태훈 본인의 불안감은 오히려 극에 달했다. 그는 "2017시즌이 끝난 뒤가 가장 고비였다. 초반에는 어느 정도 보여줬지만 그 뒤로 계속 2군에 있었다. 다음 해에 못 해버리면 더는 선수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평가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이 2018시즌을 앞둔 김태훈의 각오였다. 2017년 11월 마무리캠프부터 2018년 스프링캠프 출발까지 체중을 감량하라는 말에 정말 10kg을 뺐다. 김태훈은 "정말 독하게 했다. 저녁 자리에서 치킨 한 조각의 냄새만 맡으며 버틴 적도 있었다. 유산소운동도 하루에 2시간씩 했고, 원래 비훈련 기간에는 공도 많이 안 던지는데 꾸준히 던졌다"고 얘기했다.
"손혁 코치님이 마무리캠프 때 합류해서 '한 해 성적은 캠프 첫날에 나온다'고 얘기해주셨다. 그렇게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얘기해주셔서 믿고 싶었다. 그래서 더 준비를 열심히 했다"는 김태훈이었다. 그리고 그 인고의 시간을 거친 김태훈의 스프링캠프 첫 피칭을 본 손혁 코치의 평가는 '아, 이놈 안 놀고 왔구나'였다.
▲"나는 네가 언젠가 터질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훈 본인은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주변의 믿음과 기대는 단단했다. 현재 SK 손차훈 단장은 10년 전 스카우트로서 김태훈을 뽑았던 인물이다. 김태훈은 "항상 단장님께서 '나는 네가 언젠가 터질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널 뽑은 걸 후회 안 한다. 언젠간 터질 거다'라고 얘기해주셨다"고 전했다. 그는 "처음에 긴가민가했다"고 웃으면서도 "좋게 얘기해주셔서 기뻤다"고 말했다.
염경엽 감독도 단장으로 부임 당시부터 김태훈을 높게 평가했다. 그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자신을 좋게 봐주고, 신경을 많이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김태훈에게는 동기부여가 됐다. 김태훈이 더 이를 악문 계기이기도 했다.
김광현 역시 김태훈의 잠재력을 본 사람 중 하나였다. 2018년 오키나와 2차 캠프를 앞두고 김광현은 자신의 룸메이트로 김태훈을 콕 집었다. 구단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김광현은 "김태훈을 올해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선언하며 김태훈을 택했다. 김태훈에 대한 기대가 없이는 나오지 않았을 말이었다.
▲'10년 차' 2018년, 최고의 한 해
경험과 기대, 무엇보다 노력은 비로소 열매를 맺었다. 김태훈은 정확히 데뷔 10년 차였던 2018시즌 61경기 94이닝에 나서 9승3패 10홀드 3.83의 평균자책점의 호성적으로 SK 불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처음으로 나선 포스트시즌에서는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도합 8경기 11이닝을 단 1실점으로 틀어막으며 팀의 8년 만의 우승을 이끌었다.
김태훈은 "워낙 캠프 때 좋고 시즌 때 안 좋은 선수라서, 올해도 시작만 좋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 했는데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서 "지금까지는 '2군에 내려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던졌는데, '1년 내내 1군에서 쓰겠다'는 손혁 코치님의 한마디에 자신감을 많이 받았다. 마음가짐, 멘탈이 가장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돌아봤다.
높은 고과는 확실하게 보상을 받았다. 김태훈은 지난해 4000만원에서 1억4000만원이 인상된 1억8000만원에 사인했다. 이번 김태훈의 350% 연봉 인상률은 김광현이 가지고 있던 225%의 기록을 훌쩍 넘어선 SK 구단 역대 최고의 인상률이다. '마음이 따뜻하겠다'고 하자 김태훈은 "따뜻한 걸 넘어 덥다"며 외투 안쪽의 반소매 티셔츠를 보여주며 웃었다.
그럼에도 아직 김태훈은 2018년 성적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두지 않았다. 김태훈은 "운이 좋았던 해 같다. 광현이 형이 마무리캠프에 온 것부터 캐치볼 파트너 된 것도 큰 운이고, 손혁 코치님과 최상덕 코치님을 만난 것도 운이다. 그리고 힐만 감독님을 만난 것, 그리고 지금 염경엽 감독님이 단장님으로 오신 것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게 합쳐져서 작년 같은 성적을 낸 것이 아닌가 싶다".
▲부담감은 불안함보다 덜 두렵다
지난해 활약으로 김태훈을 향한 팀 안팎의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더욱이 염경엽 감독은 일찍이 김태훈을 이번 시즌 마무리 후보로 낙점했다. 크게 뛴 연봉까지, 이래저래 부담감과 책임감이 크다. 그래도 김태훈은 "부담감이 있긴 하다. 작년에는 불안함으로 시작했고 올해는 부담감으로 시작하는데, 그래도 부담감이 불안함보다 이겨내기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10승, 100이닝, 100탈삼진을 목표로 삼았던 김태훈은 9승, 94이닝, 93탈삼진을 기록하며 아쉽게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마무리가 유력한 올해는 목표를 승리와 홀드, 세이브를 합쳐 30개 이상으로 잡았다.
그는 "투수는 공을 안 던지면 엄청 근질근질하다. 또 다른 보직에서 내가 잘 수행할까, 어떤 생각을 하고 타자를 상대하면서 경기에 임해야 할까 기대된다. 얼른 시즌이 시작했으면 좋겠고, 올해 한국시리즈가 끝났을 때는 내가 어떻게 되어있을지가 궁금하다"고 설렘을 전했다.
김태훈은 "2008년에 퍼펙트를 했고, 2018년에 잘했으니까 나는 10년 주기로 잘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럼 다음은 2028년이다"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 소리 안 듣게 잘하고 싶다. 늦게 핀 만큼 더 오래 야구 하고 싶다"고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김태훈의 야구 인생도 줄기를 곧게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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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혜 기자 eunhw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