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7.07 10:01 / 기사수정 2009.07.07 10:01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남미의 한 철학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축구심판을 한다"라고 했다. 그만큼 심판은 환희와 열정이 넘치는 그라운드에서 유일하게 고독한 존재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가 있는 축구에서 심판 판정에는 항상 한계와 불만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해 J리그에서 우라와 레즈와 감바 오사카의 경기 직후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이 일으킨 난동을 지켜본 일본축구협회 가와부치 사부로 회장의 "모든 불만과 짜증을 심판에게 퍼붓는 행동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라고 했다.
K-리그라고 예외는 아니다. K-리그가 흥행 부진을 겪고, '재미없다'는 평가를 받는 때마다 빠지지 않고 K-리그의 심판의 자질 문제가 입에 오르는 것은 새삼스럽지조차 않다. 그럼에도, K-리그 14라운드가 치러진 7월 4일, K-리그의 외국인 감독들이 일제히 심판에 대해 지적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터키를 월드컵 4강에 진출시키며 UEFA 최우수 감독으로도 선정됐던 유럽 출신 감독과 남미, 아시아 각국의 감독 생활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브라질 출신 감독이 나란히 K-리그의 심판을 비판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특히, 제주 유나이티드 알툴 베르날데스 감독의 "지금까지 많은 리그와 팀을 지도했지만, K-리그만큼 심판의 문제가 심각한 리그는 처음이다"라는 비판은 K-리그가 얼마나 심판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심판 문제는 단순한 불평의 문제가 아니다.
논의의 중심은 귀네슈 감독과 알툴 감독이 불만을 터뜨린 주심의 판정들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니다. 심판 문제가 K-리그에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것 자체이다. 모든 부분에서 쇄신을 외치며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K-리그가 정작 경기 내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인 심판 문제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일이다.
물론 심판은 신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지도, 기계처럼 모든 것을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 판정의 불완전성과 부정확성을 개선하려 하는 순간 축구의 가장 큰 매력인 원시성이 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축구에서의 심판 판정의 실수는 실수 그 자체로서도 경기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FIFA 역시 경기규칙에 관련된 조항에서 '경기와 관련된 사항에 대한 주심의 판정은 최종적이다'라며 주심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번복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심판도 사람이기에 오심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번복할 경우 엄청난 혼란으로 축구 경기 자체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판은 그라운드 위의 재판관인 동시에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시켜주는 존재다. 전자가 경기에 있어 '사법권'이라면 후자는 '행정권'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K-리그 심판들의 능력이 이 두 가지 부분에 있어 팬들의 눈높이와 리그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럽 빅리그만큼은 아닐지라도 월드컵 7회 연속 진출에 성공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근간을 이루는 K-리그는 경기력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부족하지 않는 리그다. 그러나 심판들의 수준까지도 과연 그 정도까지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붙는다.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판정 능력은 차치하고라도, 거친 파울 상황이나 논란이 있을만한 장면이 나왔을 때 K-리그 심판들은 결단력 있게 휘슬 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특히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의 파울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이는 잦은 오심과 일관성을 잃은 판정으로 이어져 선수와 감독은 물론 관중에게까지도 심판 판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심판이라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명확한 판정이 필요함에도, 페널티킥이나 퇴장상황 등에 대한 심판들의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점에서 K-리그의 선수와 코칭 스태프는 큰 불만을 느끼고 있다.
경기 운영 능력의 부족
경기 운영 능력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다. K-리그는 지난해부터 APT(Actual Playing Time, 실제 경기 시간)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포항 스틸러스의 경우엔 팀 자체적으로 APT 증가에 따른 포상금을 선수단에 지급할 정도다.
그런데 가끔 K-리그의 심판들은 여기에 대해 그다지 심각한 책임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경기시간을 늘리기 위해 단순히 경기 중 파울을 잘 안 불고, 어드밴티지 룰을 잘 적용하는 것만이 중요할까?
논란이 됐던 제주와 인천, 서울과 부산의 경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총 10골이 터질 만큼 재미있는 경기였다. 선수들은 나무랄 데 없이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쳤지만, 이에 반해 심판들의 경기운영능력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중요한 장면에서의 판정이 애매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그라운드에서 많은 불평과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K-리그 심판들은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사실이다.
주심은 선수들 간의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해 부심에게 달려갔고, 상황을 수습하는데만 몇 분씩 시간을 들이곤 했다. 정작 판정 상황에서의 경기 속개 능력은 떨어지면서 드로잉 상황이나 교체 상황에서 조금만 시간을 끌거나 판정에 항의를 하면 가차없이 경고를 주는 것은 마치 몇몇 규정에만 집중한 강박증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난 시즌에는 서울과 경남FC와의 경기에서 판정 번복 때문에 경기가 무려 35분간 지연된 일이 있었다. 물론 당시 양팀의 과도한 항의가 문제이긴 했지만, 주심이 5분 안에 경기를 재개하지 않으면 몰수패를 선언하겠다는 식으로 원활한 경기 운영을 위한 최후통첩을 하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심판의 모습
또 한가지 K-리그에서 가장 보기 싫은 장면은 심판들의 고압적인 자세다. 프로경기는 승부를 위한 격전장이기에 선수들의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정말 페어 플레이 정신을 잃고 흥분했다면 심판은 분위기를 추스르며 경기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영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그것은 휘슬을 불어서도 가능하고, 양팀 주장을 불러 흥분을 가라앉히게 해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가끔 선수보다 더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의 주심을 보면 꽤 난감해진다.
흥분하여 몸싸움을 벌인 것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는 선수 본인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러한 충돌을 일으키기 전에 선수들의 흥분과 거친 플레이를 다스리지 못한 심판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K-리그 주심들은 이런 상황에서 그저 연방 휘슬을 불어대며 경고와 퇴장을 남발한다.
그리고 파울을 불 때마다 위압적이고 윽박지르는 듯한 표정으로 선수의 항의를 묵살하기만 하는 태도는 선수들을 더욱 흥분시킬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심판들이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미소와 함께 짐짓 여유있는 모습으로 과열된 경기 양상을 다독이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K-리그에서 불가능한 일인 걸까.
또한, 파울이나 경고 등을 부여할 때 유럽 프로축구리그의 심판들과 같이 냉정하고도 차분한 어조와 태도로 휘슬을 분 이유를 해당 선수에게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화나는 건 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나 말을 들어주려고도 안 하는 심판들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옳은 판정도 중요하지만 심판이 선수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경청해주고 있다는 공감을 주지 못하면 신뢰는 결코 생길 수 없다.
심판은 무엇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소신있게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신’과 ‘고집’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소신’을 위한 ‘권위’와 ‘강요’를 혼동해도 안 된다. 물론 선수들의 심판을 향한 자세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앞서 심판들이 ‘당신의 좋은 경기를 위해 내가 노력하고 있다.’라는 자세를 보여주는 게 어떨까?
K-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용 심판은 "심판을 탓하는 게 선진 축구가 아니다. 오히려 선진 축구일수록 심판을 존중한다"라고 했지만, 동시에 존중은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프로축구연맹
K-리그 한 경기를 치르는 데에는 억대의 자본이 투입된다. 그러나 심판의 잘못된 판정 하나가 수억 원이 드는 K-리그 경기의 질과 상품을 한순간에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심판 교육 및 재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 및 투자의 노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심판 문제라는 상처가 안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프로축구연맹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연맹의 심판 문제에 대한 책임회피와 무관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플레이오프와 같은 큰 경기 때마다 외국인 심판을 기용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판정 시비를 우회적으로 피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맹이 임명하여 시즌 내내 K-리그에 기용해 온 심판들을 정작 시즌 중 가장 큰 경기에서 빼는 것은 연맹 스스로 국내 심판들을 믿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였다.
지난 99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수원 삼성의 샤샤가 '신의 손' 사건으로 결승골을 넣었을 당시 주심은 중국인 심판이었다. 결국, 모든 비판은 그 중국인 심판이 받았고, 연맹은 더 이상 중국인 심판을 기용하지 않는 차원에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이처럼 큰 경기에 대한 판정 시비의 위험을 외국인 주심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고, 다시는 해당 국가 심판을 안 쓰면 그만이라는 식의 접근은 프로축구연맹이 현재 심판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심판과 판정을 대하는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의 자세도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이전에 심판의 경기 운영능력과 판정 능력 향상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체계적인 재교육 프로그램, 사기 진작을 위한 처우 개선 등이 연맹과 대한축구협회 주도 하에 더 높은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은 절실해 보인다. 그것은 비단 K-리그뿐 아니라 한국 축구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연맹 심판위원회는 K-리그 전임심판의 자질 향상을 위해 심판발전 프로젝트 프로그램에 따라 매년 두 차례 소집 훈련과 시즌 중 경기 전후 교육 등을 진행해오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올해 심판실을 심판국으로 승격시켰고, 지난해에는 심판분석실을 따로 만들어 직접 경기마다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심판국의 주도로 선수들에게 정확한 규정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해 상호 간의 오해를 줄여나가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이 쉽지 않다. 실례로 현재 우리나라엔 전문적인 심판양성소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올해 초 새롭게 취임했던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 역시 10대 공약 중 하나로 ‘심판 자질향상 및 독립성 강화를 위한 교육과 제도 개편’을 내세웠었는데,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심판 교육과 처우 개선에 있어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심판 양성을 위한 투자와 교육의 정도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식의 변환과 함께 보다 혁신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더 이상 한두 게임의 판정을 두고 들끓어 오르는 냄비현상이 아닌, 거시적 관점에서 심판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재미있는 축구 경기는 22명의 선수의 선수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이들의 중재자이자 재판관이자 행정관인 심판의 경기 운영 역량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성호의 스카이박스] 대한민국 축구를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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