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6.23 14:29 / 기사수정 2009.06.23 14:29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영화에서 주연보다 돋보이는 조연을 가리켜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고 부른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단체 스포츠이지만 그 중에서도 팀의 중심이 되는 스타 플레이어는 영화의 주연에 빗댈만하다. 그러나 이들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팀 승리의 밑거름이 되어주고, 더 나아가 승리의 주역이 되며 정점의 순간을 차지하는 선수들 역시 축구계의 '신 스틸러'라 할만하다.
어느덧 반환점을 돌아선 K-리그의 상위권에 위치한 클럽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주연보다 돋보이는 조연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명품 조연들'은 국가대표에서 뛰는 스타 플레이어보다는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지만,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승리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추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나아가 이제는 어엿한 K-리그의 '주연급 선수'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최원권(광주 상무)
시즌 초반 광주가 호성적을 거둘 때만 해도 '반짝 돌풍'으로 끝날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는 달리 광주의 승승장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3라운드가 끝난 현재 K-리그 1위. 그 중심에는 단연 최성국-김명중의 투톱 공격진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 광주의 선전을 설명하긴 어렵다.
광주의 핵심전술은 조직력을 갖춘 탄탄한 수비를 기반으로 한 역습이다. 이러한 전술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 광주의 굳건한 포백 수비진과 최성국의 빠른 발과 출중한 개인기, 김명중의 넓은 활동량과 득점력 외에도 오른쪽 수비수 최원권의 맹활약을 꼽을 수 있다.
최원권은 경우에 따라 오른쪽 풀백과 윙백을 넘나들며 광주의 오른쪽을 책임지고 있다. 수비시에는 측면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기도 하지만, 공격 시에는 오버 래핑을 넘어 때로는 공격수 그 이상의 몫을 해내기도 한다. 역습이 시작될 때 최원권은 번개같은 속도로 상대 수비진보다도 앞서 공격에 나서 공간을 파고든다. 최원권의 움직임에 수비진은 또 다른 공간을 내줄 수밖에 없고, 이 공간은 최성국-김명중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원권은 FC 서울에서 뛰던 지난해 새롭게 이적해 온 이종민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내주며 부침을 겪었다. 주로 교체로 출전하며 컵 대회 포함 20경기에 나와 단 한 개의 공격 포인트도 올리지 못했고, 라이벌 수원 삼성과의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는 결정적인 수비 실수로 골을 헌납해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대 후 광주에서 절치부심한 최원권은 자신감과 노련함을 더한 플레이로 광주 돌풍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시즌 중반이지만 벌써 15경기에 나서 3골 3도움을 기록하는 등 한층 발전된 모습이다. 광주가 시즌 말미까지 지금의 호성적을 유지해나가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최원권의 맹활약이 필수적일 것이다.
박용호(FC서울)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의 중앙수비하면 김진규-김치곤의 국가대표급 콤비가 떠올랐지만, 이제는 박용호를 빼고는 서울의 수비를 논할 수 없다.
박용호는 이천수, 최태욱과 더불어 ‘부평고 3인방’으로 불리며 일찌감치 한국 축구의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8강의 주역이기도 했던 그에게는 한 때 ‘포스트 홍명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안양 LG에서 프로로 데뷔한 이래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박용호는 부침을 겪었고, 상무 제대 이후에도 서울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올 시즌 김치곤과 김진규가 부진한 틈을 타 기회를 잡은 박용호는 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우승 후보 서울에서 당당히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의 활약은 수비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서울은 예전과는 달리 극적인 역전승을 자주 일궈내며 정신력과 근성에서 떨어진다는 평가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박용호는 그 가운데 두 번이나 후반 45분에 역전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에 귀중한 승리를 안겼다.
특히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13라운드 후반 45분에 박용호는 빠른 역습 상황이었지만 중앙 수비 위치에서 전력으로 상대 문전까지 질주해 극적인 역전 헤딩골을 터뜨렸다. 그가 얼마나 경기에 집중하고, 또 예전보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박용호의 존재는 서울의 전술적 다양성에서도 큰 힘이 된다. 포백을 기본으로 하는 서울의 수비지만 상황에 따라 서울은 박용호로 하여금 김치곤, 김진규, 아디 등과 함께 스리백을 구성케 해 경기의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한다.
잔 실수가 많고 수비 뒷공간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서울의 중앙수비지만, 이제는 박용호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런 모습이 계속 될 때 박용호를 대표팀에서 볼 가능성도 그리 작은 것은 아닐 듯하다.
정훈(전북 현대)
국내 선수 중 '수비형 미드필더'가 누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김남일과 조원희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전북의 신예 정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주와 서울과 함께 K-리그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전북. 조재진, 최태욱 등을 영입했던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동국, 김상식, 하대성, 에닝요 같은 좋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기대를 모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해처럼 조직력의 부족과 수비 불안으로 과연 좋은 성적을 거둘지에 대한 확신은 약했다. 특히, K-리그 최정상급을 자랑하는 공격진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중원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는 최강희 전북 감독의 머리를 항상 아프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K-리그 2년 차 신인 정훈의 맹활약은 전북과 최 감독의 고민을 말끔히 해소해줬다. 정훈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의 1차 저지선을 형성하면서도 왕성한 활동력과 희생적인 플레이로 수비 부담을 덜어줬다. 이는 전북의 공격진은 물론이고 미드필드 역시 좀 더 공격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원천이었다.
전북의 고참격이자 스타 플레이어인 이동국과 최태욱은 전북의 숨은 보배로서 정훈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강희 감독 역시 "루이스, 에닝요의 개인 플레이로 밸런스가 깨질 수 있다. 그것을 정훈이 두 사람 이상의 몫을 해주며 커버해준다. 포백 앞에서 적절하게 공격을 끊거나 지연시켜준다."라며 정훈의 팀 공헌도를 높이 샀다.
정훈이 스스로 롤 모델이라 밝히고 있는 조원희가 지금은 대표팀에서 가장 큰 이름이지만,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K-리그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정훈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 현(강원FC)
K-리그 막내이자 신생팀은 강원FC는 '중위권에만 들어도 성공'이라는 당초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이제는 6강 플레이오프의 희망까지도 거리낌없이 내비치고 있다. 이에 대해 시즌 초반 3경기 연속 골을 터뜨리며 '명품 조커'이자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떠오른 윤준하, 내셔널리그 득점왕출신 김영후, J리그 출신 외국인 선수 마사히로, 그리고 강원도 출신 스타 이을용과 정경호를 그 주역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유현이란 뛰어난 골키퍼의 존재 역시 무시하지 못할 '강원도의 힘'이다. 골키퍼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수준급의 선수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필드 플레이어와는 달리 보통 30대 초반부터 전성기가 찾아오는 골키퍼는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활약을 펼치기가 쉽지 않기에 그 희소성이 더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강원 같은 신생팀이 좋은 골키퍼를 보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에 최순호 강원 감독은 내셔널리그의 울산현대미포조선 감독 시절 제자였던 유현을 영입했다. 지난 시즌 내셔널리그 MVP이기도 했던 유현은 강원의 골문을 지키며 팀이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하고 있다.
비록 컵 대회 포함 13경기에 나서 20골이나 허용한 수치는 보잘 것 없지만, 경험이나 기량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강원의 수비진을 감안할 때 유현이 없었다면 올 시즌 강원의 선전은 불가능했으리란 것이 중론이다.
지난 FA컵 32강 인천 코레일전에서는 승부차기에 나서 눈부신 선방을 펼쳐 팀이 '아마추어 이변'의 제물이 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특출나지는 않지만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의 유현에게서 대전 시티즌의 레전드 골키퍼 자리를 예약한 최은성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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