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2.10 23:07 / 기사수정 2009.02.10 23:07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햄릿, 오델로, 리어 왕, 맥베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셰익스피어 스스로가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고, 문학을 좋아하는 학자들이 그렇게 분류했을 뿐이다. 따라서 혹자는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포함하여 총 5편을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분류되었건 간에 슬픈 이야기는 사람을 울린다.
전 세계를 살펴봐도 스포츠만 한 진리가 없다. 인간이 창안해 냈지만, 그 이상을 추구하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우수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스포츠다. 그러나 때로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포츠를 울게 한다.
가까운 예만 하더라도 2006년 WBC에서의 미국에 대한 편파 판정을 들 수 있는데, 그로 인해 미국 야구가 망신을 당한 것은 인과응보인 셈이다. 그래도 ‘스포츠는 진리다’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WBC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당연히 우승했어야 하나 초대 야구월드컵 챔피언은 그들이 그렇게 업신여겼던 아시아권 국가에서 나왔다. 그랬다. 그들은 분명 실력에서 졌다.
10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가 변방야구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당시 선수협의회에서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일부 선수들은 미국 예선 탈락시 “오늘 메이저리그는 죽었다. 오늘만큼 내가 야구선수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도 없구나!”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처럼, 그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다.
그러나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그들은 많은 비극을 경험해 왔다. 이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견주어 본다면 칼 메이스의 저주, 블랙삭스 스캔들, 메이저리그 파업, 약물 파동이 될 것이다. 앞서 터진 3대 비극은 경기 규칙과 선수 생활 등에 일대 변혁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알렉스 로드리게즈마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2000년부터 터져 나온 약물 파동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MLB야 놀자’에서는 과거 메이저리그 3대 비극이 어떤 형태로 해결되었는지를 소개함과 아울러 약물 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해결을 해야 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칼 메이스의 저주 : 언더핸드 선발투수의 실종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8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8월 16일, 폴로 그라운드(前 뉴욕 자이언츠 홈구장으로 당시 양키스가 구장이 없어서 빌려 쓰고 있었음)에서 열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뉴욕 양키스간의 3연전 첫 경기였다. 경기 전 클리블랜드는 71승 40패로 1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반 게임차 뒤진 2위를 달리고 있었고, 3위 양키스도 1게임 반차로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다.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칼 메이스, 인디언스의 톱타자는 ‘2구 삼진(월터 존슨의 공으로는 자신이 도저히 안타를 뽑아낼 수 없음을 알고 투스트라이크 노 볼에서 그냥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사건)’의 일화로 유명한 레이 채프먼이었다.
당시 채프먼은 유격수로서 매끄러운 수비를 자랑했음은 물론, 52도루를 기록할 만큼 빠른 발이 강점이었다. 또한, 성격마저 밝고 화통하여 인디언스 팬들에게나 팀 동료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수 중 하나였다. 특히, 그의 전매특허는 매우 능숙한 번트능력이었는데, 이 번트 덕분에 그가 작성한 한 시즌 최다 희생타 기록(67개)은 80여 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아홉 시즌이라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통산 희생타 부문 6위(334개)에 올라있기도 하다. 이렇듯, 팀이 필요로 할 때 욕심내지 않는 적절한 배팅과 베이스러닝 덕에 늘 환호 받던 선수였다.
‘잠수함의 메이스’라 불렸던 칼 메이스도 이에 뒤지지 않는 선수였다. 그는 각각 다른 3팀(보스턴, 뉴욕, 신시내티)에서 20승 이상을 거둔 역사상 첫 선수로서, 통산 3021.1이닝을 던져 207승 126패 231완투(29완봉) 734볼넷 862삼진 2.92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여기에 잠수함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타자들의 시야를 홀릴 만큼 불같은 강속구와 다양한 딜리버리, 악명 높은 스핏볼(Spitball : 공에 침을 발라 던지는 투구. 당시에는 부정투구가 아니었음)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채프먼이 타석에 들어서고, 메이스는 포수와 사인을 교환한 후, 그의 속구를 인사이드 높게 찔러 넣었다. 중요한 게임에서 3실점한 것에 긴장하여 의도적으로 맞추려고 한 것인지, 아님 제구가 빗나간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고, 갑자기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메이스는 배트에 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 앞으로 굴러오는 볼을 잡아서 1루로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공은 채프먼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었고, 채프먼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즉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동료는 급히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그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 새벽 4시에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말 뿐이었다.
채프먼이 사망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고통받은 선수는 다름 아닌 그에게 빈볼을 던진 칼 메이스였다. 살인수사국에 가서 살인죄로 조사를 받았으며, 많은 야구팬과 언론은 그를 비난하면서 선수생활을 그만둬야 한다며 열을 올렸다. 특히, 양키스로 오기 전에 그가 몸담았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를 아예 야구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채프먼이 죽은 지 1주 후에 메이스는 타이 콥이 버티는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0:10의 패배를 당했다.
메이스는 평생 야구계의 '살인자'로 낙인찍혔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듯 그 이후에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선수 생활을 끝낸 후 그는 밀워키와 클리블랜드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하다가 1971년 3월 4일,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명예의 전당 득표율 5%에서 보듯, 메이스의 저주는 후대뿐만이 아니라 본인에게도 큰 타격을 준 일대의 사건이었던 샘이다.
메이스 이후, 잠수함 '선발' 투수들이 많이 사라졌다. 메이저리그 초창기엔 언더핸드 피칭은 의무적일 정도로, 잠수함 투수들이 많았으나, 이 사건 이후 잠수함 투수에 대한 강박관념 탓인지, 아님 타격 기술의 발전에 따른 언더 핸드 피칭의 약점 탓인지 메이스 이후 선발투수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잠수함 투수는 거의 없었다. 1930년대에 선발투수로 활동한 잠수함 투수 엘든 오커가 130승 101패(126완투)로 비교적 호성적을 거뒀지만, 4.42의 방어율을 비롯하여 삼진(594개) : 볼넷(706개) 비율이 거의 1:2에 달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채프먼의 죽음은 야구 규정까지도 바꾸게 하였다. 채프먼이 날아오는 공을 미처 피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헐고 지저분하게 변한 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이후 항상 새 공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당시 합법적인 투구였던 스핏볼을 부정투구로 규정, 금지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헬멧의 필요성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현재의 헬멧과는 달리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즉각 시행되진 못했고, 1950년대에 들어서야 헬멧 의무 착용이 이뤄지게 되었다. 헬멧에 귀 덮개까지 달린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칼 메이스 (C)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 2부, ‘블랙삭스 스캔들’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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