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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삼국지] 고려대 김유진, '벽의 빛'이 보여준 60분의 이야기

기사입력 2008.11.07 09:05 / 기사수정 2008.11.07 09:05

김경주 기자



[엑스포츠뉴스=김경주 기자] 벌써 63번째인 전국 선수권 아이스하키 대회, 어느덧 예선이 모두 끝나고 6일 오후 준결승이 열렸습니다. 사실상 해체한 광운대를 제외한 4개 대학과 2개의 실업팀이 참가한 간소하고 조촐한 이 대회는 그러나 우승컵을 향한 열기만큼은 그 어느 대회보다 뜨겁습니다.

기실, 4강이라 말하기도 조금 머쓱한 그 준결승엔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 2강인 고려대와 연세대와 실업 2개 팀이 올라와 특별할 것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목동 빙상장은 여전히 쓸쓸하고 외로웠습니다. 구단 관계자, 학부형, 선수들로 구성된 관중석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이날 치러진 두 경기 중 앞서 치러진 하이원과 고려대의 경기에서 가장 기대했던 선수는 고려대의 조민호였습니다. 하이원은 전국 선수권 예선전 이후 이어진 아시아리그 중국 3연전을 치르고 돌아오자마자 또 대회를 치르는 것이었던지라 체력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고, 그런 하이원을 상대로 얼마나 뛰어난 공격력을 선보일 수 있는지가 조민호에 대한 관심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민호에 대한 관심은 이내 고려대의 다른 선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경기 내내 기자의 입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 그 '관심'은 바로 골리 김유진입니다.

매번, 아이스하키를 다루다 보면 꼭 하는 얘기 중 하나가 '골리의 중요성'입니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조차 골리가 전력의 반을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골리가 아이스하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이 날 고려대는 하이원에 3-4, 한 점차 아쉬운 패배를 당했죠.

4골이나 먹은 골리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김유진이 보여준 플레이는 그가 허용한 4골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1피리어드는 내내 하이원의 하프 코트 게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피로 누적으로 무거운 경기가 예상되었지만, 말 그대로 예상일 뿐이었죠. 부상당한 주포 이용준을 제외하고도 하이원은 쉴새 없이 고려대를 밀어붙였습니다. 허둥지둥 고려대는 하이원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했죠.

정신이 없었습니다. 보는 기자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뛰는 선수들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하이원은 봐줄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고려대 진영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전광판의 점수는 여전히 0-0, 바뀔 줄을 몰랐죠. 전광판의 숫자는 변함이 없었지만, 1피리어드가 진행되는 동안 관중석에서는 쉴새없이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탄성의 대부분은 고려대 학부모의 것이었고, 그 탄성의 대부분은 김유진의 선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플레이를 바라보는 기자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잘한다.'라는 말이 터져나왔습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의식한 것도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탄성은, 김유진의 플레이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부족한 듯 보였습니다. 작은 골문 앞을 지켜서고 있는 그가 그야말로 '벽'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기자와 함께 경기를 관전하던 한 아이스하키 관계자는 "최소 2-0이 됐을 만한 경긴데 그걸 김유진이 0-0으로 만들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이래도 쉬이 와닿지 않을 것 같아서 기록을 굳이 꺼내자면, 하이원이 고려대 전에서 기록한 슈팅은 총 48개입니다. 그 중 김유진이 허용한 골은 4골입니다. 물론 골대 밖으로 향한 슈팅도 있지만 하이원은 1피리어드에만 18개의 슈팅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김유진은 그 슈팅을 모두 막아냈죠. 아이스하키의 한 피리어드는 20분으로 치러지는데, 거의 분당 한 번씩 날아드는 슈팅을 전부 막아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벽'이 된 김유진의 분전에 다른 고려대 선수들도 힘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2피리어드와 3피리어드까지 고려대 선배인 최정식과 이승준 송치영에게 연속 세 골을 허용하며 무너지는 듯했지만 1분 사이에 두 골을 터트리며 하이원의 턱 끝까지 따라붙었고, 결국 3피리어드 9분 54초에 안현민의 골로 기울었던 전세를 다시 동률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그 동률이 쇼트 핸디드 상황에서 송치영에게 결승골을 헌납하며 무너졌고, 그 동률이 다시 맞춰지지는 못한 채로 경기는 끝이 났지만 고려대의 60분은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그 '빛'의 중심은 김유진이었죠.

경기 종료 후 고개를 숙인 채 괴로워하던 고려대 선수들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관중석에 인사를 건네던 김유진은 경기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금세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변했습니다. 올해 4학년, 실업팀과 맞붙을 수 있는 공식 경기는 이번 전국 선수권 대회가 마지막인 그는 "평소 쉽게 붙을 수 없는 실업팀과 붙었고, 그래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 한 골차로 져서 무척 아쉽다."라는 말로 힘겨웠던 60분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동계체전이 시작되는 데 그 대회는 대학 팀끼리만 붙는다. 최선을 다해 반드시 우승해 이번 대회의 아쉬움을 덜고 싶다."라며 손에 들지 못한 우승컵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올 시즌이 끝나고 나면 김유진은 고려대의 붉은 유니폼을 벗고 푸른, 혹은 검은 유니폼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가 입게 될 유니폼이 어느 색이든지 간에 그가 당장 주전으로 자리 잡기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의 자리는 골리라는 특수 포지션이고, 안양 한라와 하이원, 두 팀 모두 손호성과 엄현승이라는 훌륭한 주전 골리를 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60분의 빛'이 꺼지거나 바래지 않는다면 이 날 그에게서 보였던 높고 큰 '벽'은 '고려대'의 김유진이 보여줬던 것보다 더 견고하고 든든하게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선가 그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날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 밝고 즐거운 빛을 조금 더 많이,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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