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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용병(5) 삼성 도약의 '선봉장'

기사입력 2005.01.26 23:06 / 기사수정 2005.01.26 23:06

김종수 기자

실업시절 정통의 강호로 불리던 옛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프로출범 2시즌동안 하위권을 전전하던 삼성 프로농구단, 문경은, 김승기, 김희선에 스트릭랜드라는 좋은용병까지 뽑아 우승까지 노려볼수있다는 주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자 '일등제일주의'를 제창하는 모기업의 자존심은 크게 상한상태였고 이번만큼은 무조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라는 특명이 내려진다. 

이에 삼성에서는 포인트가드 주희정과 뛰어난 용병 둘을 보강, 새롭게 98-99시즌에 도전한다. 이번에야말로 무엇인가를 보여줄 기세로…

98-99시즌은 용병선발이 장단신(長短身)용병으로 구분되던 때였으므로 각 구단은 장신의 용병센터 내지는 슈터형 용병의 조합체제 또는 센터와 힘있는 파워포워드형 용병체제로 나간다. 이런 조합은 토종선수들의 구성에서 선택이 엇갈렸는데 삼성은 전자에 속하는 판단을 내리고 시즌에 임했다. 당시의 삼성에 이창수, 강병수, 김택훈등 좋은 골밑자원들이 많았다는것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포경풍상(飽經風霜: 세상의 어려움을 많이 겪음)의 삼성이 과연 그 동안의 부진을 딛고 창림탄우(槍林彈雨: 창이 숲을 이루고 탄환이 비오듯 쏟아짐, 전투가 매우 격렬함을 형용함)의 프로농구판에서 힘차게 비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뭇 기대되는 98-99시즌이었다.


‘98-99시즌 최고의 센터’ 버넬 싱글턴

신장: 200cm
몸무게: 102kg
포지션: 센터
출신교: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

시즌에 참가하기 전부터 일본리그 최우수선수 2회에 농구영화의 조연경력 등으로 유명세를 탔던 선수이다. 걸출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페넌트레이션이나 아이솔레이션 등의 소화능력이 뛰어났고, 장신의 센터답지 않은 뛰어난 센스와 패싱 플레이에도 상당히 능숙했다.

게다가 간간이 던지는 3점슛의 정확도도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삼성은 이런 싱글턴의 장점을 십분 활용, 시즌 초 그를 이용한 일대일 공격으로 꽤나 많은 승수를 쌓아갈 수 있었다.

시즌 초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싱글턴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아니 삼성농구단 전체에 위기가 왔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시즌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은 98년 12월말 싱글턴 선수가 치명적인 발목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시즌 초를 워낙 힘차게 시작했던 삼성인지라 1월 중순까지는 다른 선수들로 그럭저럭 버티며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김택훈마저 부상을 당해 삼성의 포스트는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그들은 시즌 내내 힘든 경기를 치러 나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싱글턴의 대체용병으로 들어온 힐이 그럭저럭 성실한 플레이를 펼치기는 했으나 싱글턴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많은 점에서 모자라 보였다.

시즌 말미부터 돌아온 싱글턴은 언제 부상이 있었냐는 듯 펄펄 날기 시작했다. 특히 부상으로 팀 공헌도가 많이 떨어졌었던 점을 감안한 듯 자유투 하나에도 무척 신경 쓰며 진중 하게 다가서는 그의 모습은 삼성팬이 아닌 필자에게도 무척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었다.
생각해 보라. 자유투 하나를 실패했다고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반성하는 용병선수를.


명 경기 회고: 99년 3월 20일부터 벌어진 플레이오프 1회전

정규리그 상대 전적에서 밀린 대우 제우스와의 대결, 대우는 3위의 성적이었고 삼성은 6위로 힘겹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상태였었다.

그러나 삼성에는 싱글턴이 있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싱글턴은 시종일관 튼실한 플레이로 삼성의 골밑을 지키며 대우 제우스를 3-1로 제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1차전에서 44득점, 17리바운드로 괴력을 발휘한 싱글턴은 2, 3차전에서도 기복 없는 득점과 리바운드력을 뽐냈고 4차전에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30득점, 13리바운드) 시즌최고 센터다운 위력을 과시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싱글턴은 시즌 중 부상 경력에도 불구 다음시즌 재계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람보슈터' 이슈아 벤자민

신장: 190cm
몸무게: 86kg
포지션: 가드
출신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3점슛 하나 만큼은 정말 웬만한 국내 일급 슈터 못지 않았다고 기억되는 용병이다. 대개의 단신용병들이 주로 일대일에 의한 개인기에서의 능숙함이 돋보였던 반면 이 선수는 전문슈터로서의 이미지로 팬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했다. 물론 대우의 보스먼이나 윌리엄스, LG의 블런트 등등 타 팀들 역시 외곽슛에 능한 용병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뭐랄까? 벤자민의 스타일은 이들과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용병들 중 가장 동양적인 플레이를 하던 선수, 피부색깔이나 외모는 무시한 채 경기 스타일 자체만을 보노라면 기량이 뛰어난 동양의 한 선수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당시 삼성의 간판슈터였던 문경은과 역시 '용병슈터' 벤자민은 상당수 닮은꼴이 많았었다고 기억된다. 물론 테크닉이나 탄력, 그리고 스피드 같은 부분에서 문경은이 벤자민과 비교되기는 힘들겠지만 그들을 나타내는 최고무기인 3점슛에서 두 선수는 상당히 흡사한 면을 많이 보였다.

특히 조금 주춤하다 싶을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번 제대로 폭발하기 시작하면 폭죽처럼 마구잡이로 터져 나오는 3점슛은 타 팀들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들고는 했었다.


명경기회고: 99년 3월11일 창원 LG戰

정규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벌이게 된 LG와의 경기, 이날 LG는 블런트(23득점, 14리바운드)와 박훈근(14득점, 5리바운드)을 앞세워 3쿼터 중반까지 15점차의 넉넉한 리드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여기에 딴지를 걸고 넘어간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은 3쿼터에만 5개의 3점슛을 터트리는 등 총 24득점, 3점슛7개, 7리바운드의 성적으로 60-63 역전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때까지 삼성은 98-99시즌 LG전에서 1승3패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던지라 이날의 승리는 상대 전적이라는 입장에서도 그 의미가 사뭇 컷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다음날 각 스포츠신문에서는 1면에 ‘벤자민 3쿼터의 반란’ 이라는 문구를 써넣으며 그의 활약상을 비중 있게 다루었었던 기억이 난다.


<기사 메인 이미지 출처: 동맥님 뉴스클럽>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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