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4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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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이장수 감독의 인생 굴곡

기사입력 2008.01.26 08:53 / 기사수정 2008.01.26 08:53

홍준명 기자

[中]이장수 감독의 인생 굴곡

이장수감독은 2006년 K리그를 떠나 중국행을 선택했고 베이징궈안을 처음으로 맡아서 팀을 2위까지 올려놓았다. 이에 대해서 중국언론들은 그의 지도력에 대해 대부분은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거의 전권을 쥐어주고 구단측과 팬들의 절대적인 지원 속에서도 우승을 하지 못해서 그를 깎아내리는 시선도 분명 존재하긴 한다. 어쨌든 한국인으로서 중국팀을 지휘하는 그는 언제나 중국언론의 초점이 된다. 현재 08시즌을 준비 중인 베이징궈안의 이장수감독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 중국기사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25일 시나스포츠는 이장수감독에 대해서 몇몇 사건을 중심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고 있다. 총 2편으로 이루어진 장문의 기사이다. 다음은 기사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 삼국지에서 처세술을 배워
이장수감독은 삼국지를 즐겨 읽는다. 사실 그는 삼국지의 광팬까지는 아니지만 그는 삼국지의 각종 일화들을 참고로 팀을 운영한다. 이장수감독의 팀은 성적이 나쁠 때에도 기자들은 그를 지지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 기자가 허베이성 샹허(베이징에서 약 50km 거리)에서 이장수감독을 인터뷰 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기자는 차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장수감독은 그 기자에게 차 없이 어떻게 베이징을 가려는지 물었다. 그 기자는 신문사에서 차를 마련해주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러자 이장수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책임자에게 왜 기자에게 차량을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전화를 하겠다. 그래도 차량을 안 제공해주면 내가 차량을 마련해주겠다." 이 말을 들은 기자는 물론 매우 감동했다. 이장수감독은 기자들을 프로답게 대한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다. "중국선수들은 제갈량, 유비, 장비의 장점을 모두 모아서 대하면 일처리하기가 훨씬 나아진다."

▣ 공격축구의 신봉자 이장수감독
1992년 베이징궈안팀이 창설된 이후 팀은 한 번도 리그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공격축구를 신봉하는 이장수감독의 전술에 대해서 모두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리그 첫 라운드 경기는 샹하이션화와의 어웨이전이었다. 베이징궈안은 샹하이션화와의 어웨이전에서 13년간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으며 그가 그 기록을 깰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강화력을 자랑하는 샹하이션화를 앞두고 이장수감독은 계속적인 공격을 가했고 결국 승리했다.

리그 전반기 한 때 팀 성적은 8위까지 성적이 떨어졌었다. 당시 한 선수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때문에 이장수감독 면전에 대고 자신을 2군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축구를 그만두겠다고까지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공격축구를 하지 않으면 나도 그만 두겠다는 신념으로 팀을 끝까지 이끌었다. 리그 휴식기에 그는 공격축구 전술을 정비했고 그 후 중국의 명문팀인 샨동루넝을 6:1로 이기기까지 했으며 거의 우승까지 도달했다(최종 성적은 리그 2위).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팀은 중국리그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이 라는 점이다.

▣ 잘못된 길에서 옳은 길로 돌아온 이장수감독
지난 세기 70년대 초, 이장수감독은 한국축구계의 우수한 신예였다. 당시 한국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던 시기였는데 이장수감독을 비롯한 많은 한국청년들은 모두 서양의 문화를 좋아했었다.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나이트클럽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의 부친은 토목건축업을 하여 집안이 부유했다. 그래서 그는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으며 당시 서울의 최고급 수준인 타워호텔의 나이트클럽에 다녔었다. 훤칠하고 수려한 용모 역시 유행에 뒤쳐지지 않았으며 입는 옷은 모두 수입 명품이었다. 구두는 백구두에 몸에는 향수를 뿌렸고 가죽지갑을 들고 다니면 누구라도 "이 청년 참 잘 생겼군."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장수감독은 곧 나이트클럽의 백마탄 왕자가 되었다.

당시 한국은 야간통행을 금지했었다. 영리한 이장수감독은 평소 관계가 돈독했던 헌병에게 담배를 주고 그 헌병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나이트클럽에 다녔었다. 그러면 당시 야간경찰들은 모두 이장수감독이 헌병에게 연행되어가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때로는 그는 야간에도 어디든 다니면서 일을 하는 쓰레기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어쨌든간에 그는 감독이 잠에서 깨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고 팀의 새벽훈련에 참여했다. 감독은 오랫동안 그런 사실을 몰랐으며 그래서 당시 그의 별명은 '신촌의 밤안개'였었다. 그런 일들을 듣긴 들었지만 증거를 못 찾았던 감독은 그를 혼내주기 위해 선수들을 운동장 20바퀴를 뛰게 했지만 이장수감독은 그럴 때마다 늘 1등을 했기에 감독은 그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이장수감독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불러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유머감각과 남자다운 기질은 선후배 누구라도 그와 친하게 지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감독은 그를 아예 주장으로 선임했다. 그 선택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주장이 되자 그는 바로 조심스러워졌고 축구에 몰두했다.

그는 대학 3학년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졸업 후 당시 한국 최고의 실업팀인 부산팀에 입단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과도한 음주를 했기에 30세 이후 그 후유증이 나타났고 어쩔 수 없이 조기에 선수생활을 접었다. 이장수감독은 지금까지도 그 점을 가장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만약 그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몇 년은 더 선수생활을 했을 것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는 동년배 선수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했다. 그래서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도 잘 알게 되었다. 이장수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담담히 말했다. "당시의 교훈은 훗날 나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걸었던 길은 너무 위험했고 자칫하면 모든 앞날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장수감독은 젊은 선수들이 과도하게 유흥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늘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젊었던 시절이 있기에 너무 막지만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젊었을 때 너무 방종에 빠지면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이다."

▣ 꿈을 추구하는 이장수감독
2007년, 경기장에서 양복을 벗어던지며 화를 내던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그는 불같은 성격의 감독이라고 여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누구든 내 팀(선수)을 다치게 하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 그러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사실 겉으로는 엄격해 보이지만 그는 농담도 잘 하며 그의 엄숙한 외모 아래에는 따뜻한 감성이 있다.

그와 친한 기자들은 그가 1남 1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기자들은 그의 딸은 봤어도 거의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의 비밀스런 아내는 보지 못했다. 사실 그는 아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공공장소에는 함께 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에게는 로맨틱한 러브스토리가 있다. 그들은 대학시절 연애를 했지만 졸업 후 서로의 직업으로 인해 헤어졌었다. 수 년 후, 그 둘은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고 함께 커피를 마셨다. 알고보니 둘 다 모두 서울에 살고 있었고 둘 다 미혼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났으며 그렇게 그녀는 이장수감독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의 연애담과 마찬가지로 축구에 대해서도 이장수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수시절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감독으로서의 최대의 희망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인생의 꿈이다. 이전에 중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간 후 그는 FC서울을 이끌고 2006년 4강에 올랐지만 결국 성남일화에게 패했다. 당시 성남의 구단주는 한국축협에서 심판을 관리하는 임원이었다. 그래서 이장수감독은 심판이 성남일화에 대해 편파판정을 했다고 여겼다. 당시 이장수감독은 "심판도 썪었고 축협도 썪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로 인해 그는 한국축협으로부터 한화 5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벌금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으로 왔다.

2007년 이장수감독은 자신의 꿈인 리그우승의 기회가 있었지만 홈에서 창춘야타이에게 지는 바람에 준우승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용병술에 대해 지적을 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다. 승리를 하려면 더욱 모험적이어야 할 때가 있다. 같은 기회가 와도 나는 마찬가지의 용병술을 썼을 것이다. 창춘에게 패한 것은 운명이었다. 후회는 없다.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집 센 이장수감독이며 또한 감성적인 이장수감독이다.

고집통, 감성적, 엄격함, 꿈을 향함, 이것은 이미 이장수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것은 그가 계속 싸워나가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장수감독같은 감독이 갈수록 많아진다면 중국축구도 더욱 매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2008년 그가 꿈을 이루기를 축원해본다. (이상, '시나스포츠')

(* 위 기사는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을 때의 일을 제외한 한국에 있을 때의 이장수감독에 대한 묘사는, 김덕기 축구전문 대기자가 작성한 '김덕기의 축구파노라마' 중 이장수감독에 대한 이야기와 99.9% 일치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시나스포츠의 기자가 그 글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기사로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http://sports.sina.com.cn/j/2008-01-25/16413442200.shtml
http://sports.sina.com.cn/j/2008-01-25/16413442201.shtml

 



홍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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