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장원재 칼럼니스트] 월드컵 조추첨이 끝났다. 벨기에, 러시아, 알제리와 한 조. 결전 육개월을 앞두고 우리와 그들의 인연 그리고 한 팀, 한 팀, 그들이 월드컵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조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알제리가 단 한 번 맞붙은 A매치는 중립경기였다. 1985년 12월 14일 멕시코시티에서의 일전. 1986년 월드컵 6개월을 앞두고 대회조직위원회는 4개국 초청대회를 기획했다. 개최국, 유럽(헝가리), 아시아, 아프리카 팀을 불러 팀 이동부터 선수단 경호, 경기장 안전관리 등을 총 점검하는 월드컵 조별리그의 예행연습.
본래 이 대회의 개최 예국은 콜롬비아였다. 1983년 나라살림이 파산직전에 이른 콜롬비아가 개최권을 반납하자 멕시코, 브라질, 미국, 캐나다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상대적으로 축구 역사가 뒤지는 미국과 캐나다가 일찌감치 탈락하고 브라질이 막판에 기권을 선언하면서 월드컵은 1970년 대회에 이어 16년 만에 아즈테카 문명의 본거지에서 열리게 됐다. 상대적으로 준비기간이 짧았기에, 실전처럼 치르며 대회운영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행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네 팀은 모두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었다. 친선대회였지만 월드컵 본선의 룰을 따라 이라푸아토, 몬테레이, 과달라하라, 멕시코시티 등 네 도시를 거치며 진행된 경기. 한국은 12월 8일 이라푸아토에서 헝거리에게 0-1로 패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서 0-9로 패한 뒤 처음 가진 맞대결. 두 번 째 경기는 11일 과달라하라에서 멕시코에게 1-2패. 득점자는 김종부(金鍾夫)다. 한국과 멕시코는 이 경기 1주일 전인 12월 4일, LA에서 만나 역시 멕시코가 2-1로 승리를 거뒀다. 한국의 득점자는 김주성(金鑄城). 알제리는 12월 7일 멕시코에 0-2, 11일 헝가리에 1-3으로 패한 상태였다.
알제리는 바로 직전 82 스페인 월드컵에서 2승1패를 기록하고도 억울하게 탈락한 다크호스였다. 한국은 32년 만에 월드컵으로 돌아온 미지의 팀.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고지대여서 일까, 선수들의 움직임이 정교하지 못했다. 이 경기의 흐름을 바꾼 건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선수로 들어온 한국의 14번 선수다. 이 선수는 사실 발목부상이 도져 경기 참가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탈리아 유벤투스 스카우터들이 한국 팀 한홍기(韓洪基) 단장에게 접근, 사정사정을 했다. “유럽에서 그 선수 하나 보려고 여기까지 날아왔다. 우리더러 그냥 가라는 말이냐.” “1981년부터 5년 간 그 선수를 주목했다. 하지만 아시아 선수라 실전을 참관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의 성의를 고려해 달라.”
그래서 한홍기 단장은 김정남(金正男) 감독과 협의, 최순호(崔淳鎬)를 후반전에만 투입하기로 하고 유벤투스 스카우터들의 양해를 구했다. 1981년부터 5년 동안 관심? 1981년 호주에서 열렸던 U-20 월드컵 첫 경기 한국의 상대가 이탈리아였다.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라던 예상평을 뒤엎고 한국은 두 점을 먼저 넣고 멀리 달아났다. 한 골을 허용하며 이내 역전될 분위기였지만 일대일 대결에서 최순호가 ‘조금의 서두름도 없이’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키며 3-1을 만들고 종료직전 한 골을 더 보태며 4-1로 완승했다. 이 경기 최순호의 성적표는 두 골 득점 두 골 어시스트. 나머지 두 골의 득점자는 이경남과 곽성호다.
다시 알제리 전. 최순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경기를 이끌었다. 사방으로 공을 갈라주고, 때에 따라 전방으로 올라가 고공점프를 선보이며 크로스를 중앙으로 배급하기도 했다. 김종부의 선취골도 최순호의 어시스트다. 조광래(趙廣來)의 패스를 등지고 받아 골문 왼편의 김종부에게 논스톱으로 연결한 뒤 수비 오른편을 돌아 중앙으로 돌진. 퍼스트터치가 살짝 길어지면서 공은 사각으로 굴렀는데, 알제리 수비진은 김종부와 최순호를 동시에 막느라 약간의 틈을 보였다. 김종부가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거의 각이 없는 지점에서 ‘짦고 강력한’ 슛으로 네트를 흔들었다.
두 번 째 골은 최순호의 득점이다. 한국 대표팀이 기록한 역대 모든 골들 가운데 필자는 이 골을 ‘미학적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골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프사이드 트렙을 뚫고 왼쪽 진영에서 중앙으로 연결된 대각선 전진패스. 최순호가 뛰어들며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이 됐다. 최순호가 공을 터치한 지점은 페널티박스 바깥이다. 알제리 골키퍼는 패스가 들어오는 걸 보고 달려나가 몸으로 막을 기세였다. 최순호는 공을 잡는 척, 멈칫하며 골키퍼의 라르비 엘 하디의 육탄방어 전진타이밍을 빼앗았다. 그리고, 멈칫 하는 몸짓과 동시에, 거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발끝으로 공을 밀어넣는 토킥 슛을 선보였다. 골문 뒤에서 보면 공을 향해 달려오던 최순호가 갑자기 멈춰서고, 최순호를 향해 달려가던 알제리 골키퍼도 같이 멈춰서는데, 공만 데굴데굴 골키퍼 왼편으로 굴러들어가는 ‘마술같은 골.’ 그렇게 한국은 첫 만남에서 알제리를 2-0으로 물리쳤다. 경기가 끝나고 한국 팀 라커룸을 찾아온 유벤투스 관계자들이 “최순호는 축구가 뭔지를 아는 선수(“He knows how to play.”)라고 평했다던가. 병역의무와 당대의 국민정서가 최순호를 속박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최초의 세리아A 플레이어는 안정환이 아니라 최순호가 되었을 터이다.
논어 안연(顔淵) 편에 나온다.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已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사마우문군자. 자왈: 군자불우불구. 왈: 불우불구, 사위지군자이호. 자왈: 내성불구, 부하우하구)
해석)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마우가 말했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안으로 살펴보아 병통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겠느냐?”
86년에 한국은 세계축구계의 변방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도 알려줄 사람도 전무했던 나라. 선수들이 직접 장비도 챙기고 공에 바람도 넣고 경기복 빨래를 하는 것을 보고 멕시코 관계자들이 경악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스스로의 준비부족을 ‘두려워하고 근심할’ 정도는 아니다. 안으로 살펴보아 병통이 없으니 이제는 태극전사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 밖에. 이제 상대가 정해졌으니 맞춤형 대비책을 준비할 시점이다.
자, 이제 뒷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당초 개최국이었던 콜롬비아는 지역예선에 참가,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주엘라 등과 한 조를 이뤄 2승2무2패 조 3위로 플레이오프로 밀려난 뒤 파라과이와 어웨이경기 0-3패, 홈경기 2-1승의 성적으로 지역에선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 한국은 본선 A조에서 아르헨티나(1-3), 불가리아(1-1), 이탈리아(2-3)와 1무2패 조 4위로 탈락.
멕시코는 B조 세 경기를 벨기에(2-1), 파라과이(1-1), 이라크(1-0)를 맞아 2승 1무로 통과한 뒤 16강전에서 불가리아를 2-0으로 물리쳤다. 8강전에서 서독과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1-4로 패하며 탈락.
헝가리는 C조에서 소련(0-6), 캐나다(2-0), 프랑스(0-3)와 1승2패, 조3위로 예선탈락. 당시는 6개조 3위팀 가운데 4개국이 와일드카드로 16강에 나가는 것이 규정이었는데 헝가리는 골득실에 밀려 다음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경기 일정을 마치고, 다른 조 3위 팀의 최종성적을 기다리려 며칠을 더 멕시코에 머무르며 초조하게 TV를 시청하던 헝가리 선수들의 모습이 화제를 모았었다. 다른 팀의 득점과 실점에 일희일비하는 선수들의 표정과 자세가 압권!
알제리는 D조에서 북아일랜드와 1-1, 브라질에 0-1로 패하며 16강 진출의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갔지만, 마지막 경기를 스페인에 0-3으로 대패하며 쓸쓸하게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사족(蛇足) 하나: 86년 멕시코 월드컵 각 조 3위팀 성적.
A조 불가리아 0승 2무 1패 승점 2 득2 실4 차-2
B조 벨기에 1승 1무 1패 승점 3 득5 실5 차 0
C조 헝가리 1승 0무 2패 승점 2 득2 실9 차-7
D조 북 아일랜드 0승 1무 2패 승점 1 득2 실6 차-4
E조 우루과이 0승 2무 1패 승점 2 득2 실7 차-5
F조 폴란드 1승 1무 1패 승점 3 득1 실3 차-2
탈락 팀은 북아일랜드와 헝가리였다. 승리는 2점, 무승부에는 1점의 승점이 부여되던 시절이다. 여담이지만, 한국이 1-1 상황에서 수비로 전환, 이탈리아와 비긴 채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면 한국은 2무1패, 3득점 5실점으로 A조 3위 와일드카드 16강행 티켓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16강 상대는 홈팀 멕시코였을 터이다.
사족(蛇足) 둘: 당시엔 국가대표 선수가 외국진출 하는 것을 ‘국부유출’, 혹은 ‘대표팀 전력 저하’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차범근, 허정무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선동렬(宣銅烈)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 진출할 무렵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단은 선수를 보낼 의사가 거의 없었다. 보다 못한 스포츠신문 야구팀장들이 모여 ‘한국야구의 세계화와 선수 본인을 위해 선동렬이 일본에 가는 것이 대의에 맞다’고 합의하고, 다음날 아침 모든 스포츠신문 1면에 ‘선동렬 일본간다, 주니치 입단 확정, 구단도 한국야구와 선수의 미래를 위해 흔쾌히 동의’라고 제목을 뽑았다. 이것이 저 유명한 ‘선동렬 지상발령(紙上發令) 사건’이다.
장원재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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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