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신명철 칼럼니스트]글쓴이가 스포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북한 체육 관계자를 만난 건 1987년 2월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1년 7개월여 앞두고 북한이 공동 개최를 요구하는 등 남북이 IOC(국제올림픽위원회)를 가운데 두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올림픽은 올림픽이고 인도에서는 남북 탁구 관계자들이 스스럼없이 교류했다. 이런 분위기는 뒤에 나올 남북 단일(유일)팀 ‘코리아’를 꾸리는 데 그대로 반영된다. 아무튼 그 대회 기간 우리나라로 치면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쯤 되는 북한 탁구 관계자로부터 1975년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 인도), 1977년 버밍엄(영국) 대회에서 연속으로 여자 단식 금메달을 차지한 박영숙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큰 뉴스였고 당연히 기사화했다.
그해 11월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북한 체육 관계자들과 만났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남측의 정은순(여자 농구)과 공동 기수로 나선 박정철을 그때 처음 만났다. 한국의 김재엽이 60kg급 결승에서 앙숙 호소가와 신지(일본)를 호쾌한 허벅다리걸기 한판으로 메다꽂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결승에서 당한 누르기 한판패를 시원하게 설욕한 그 대회에서 박정철은 86kg급 은메달을 획득했다. 뒷날 탈북하게 되는 71kg급 이창수도 그때 처음 봤다. 남북한 유도 관계자들은 에센 대회 기간 김밥도 나눠 먹고 세계 유도계 정보도 교환하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정 종목에 국한된 교류였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대규모로 남북 스포츠 교류가 이뤄졌다. 북한은 이웃 나라에서 열린 대회여서 대규모 응원단을 보냈다. 대회 첫날 소프트볼 경기장에서 만난 북한 응원단을 취재해 보니 기차편으로 베이징에 왔다고 했고 평양 등 대도시 주민들이었다. 여자 응원단은 평양음악무용대학, 청진사범대학 등에 재학하고 있는 용모가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와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온 여성 응원단도 이와 비슷하게 구성됐다.
대회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북한 유도 관계자들이 한국 관계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장소는 아운촌(亞運村, 아시아경기대회를 위해 지은 선수촌으로 대회가 끝난 뒤 주거용 아파트로 활용하고 있다) 근처 류경식당이었다. 선수 임원 심판 기자 등 남북 유도 관계자 50여 명이 어울렸다. 잉어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 본 게 그 자리에서였다. 식당 종업원은 대동강 잉어라고 주장했는데. 이 대회에서 한국은 71kg급 정훈, 78kg급 김병주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북한은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금메달리스트인 황재길이 유일하게 우승했다.
이 대회는 남북 스포츠 교류에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대회 직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통일축구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대회 개최가 확정된 뒤 각 언론사에서는 누가 평양 방문단에 합류하느냐가 관심사였다. 글쓴이는 서열(?)에 밀려 평양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10월 11일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벌어진 평양 경기에 이어 23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 경기를 취재하면서 평양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서울에 온 북한 선수단에는 베이징에서 교류했던 북한 중앙통신 이 모 논설위원이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사로 치면 국장급이었다. 그날 데스크의 지시 내용은 이 모 논설위원의 관전평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베이징에서 미리 얼굴을 익혀 놓았으니 부장의 지시를 제대로 해낼 것으로 생각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이 모 논설위원이 경기 전날 한국 기자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일부 내용이 기사화됐는데 이게 내부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모양이었다. 입조심해야 한다면서 이 모 논설위원이 내놓은 묘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터이니 그걸 받아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북한 기자 관전평의 제목이 ‘남측, 속도전에서 앞섰다’였다.
남북 스포츠 교류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와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계기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1년 초 남북은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그때 글쓴이는 판문점과 서울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을 번갈아 출입하면서 단일팀 구성 과정을 취재하고 있었다.
2월 27일 탁구 남북 단일팀 ‘코리아’를 꾸리기 위한 실무자 회의가 판문점에서 열렸다. 모든 대화가 술술 풀렸고 단체전 멤버와 남녀 복식 조, 혼합복식 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가장 큰 숙제였다. 그런데 회의 시작 20여 분 만에 남북대화사무국에 있는 팩시밀리로 명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혼합복식 리근상(북)-홍순화(남, 이 혼합복식 조는 세계 정상급의 남녀 수비 전문 선수를 묶어 놓았다는 점에서 세계 탁구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8강전에서 탈락했다), 유남규-현정화(이상 남) 김성희-리분희(이상 북) 등 1년 이상 함께 훈련한 팀의 출전 오더를 짜듯이 막힘없이 명단이 나왔다.
여자 단체전 멤버는 현정화-홍차옥(이상 남), 리분희-류순복(이상 북)으로 구성됐고 4월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국을 3-2로 꺾고 우승했다. 단체전은 남북의 비율을 맞추고 복식은 남북 혼성을 기본으로 했으나 유-현 조, 김-리 조처럼 남-남, 북-북을 묶어 놓기도 했다. 유-현 조는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 혼합복식 금메달 조였고 김-리 조는 그 무렵 북한의 간판 혼합복식 조였다. 탁구로 호흡을 맞춘 김-리 조는 뒤에 결혼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단일팀 구성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남북 탁구 관계자들이 앞서 나온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화와 1990년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교류하며 상대 선수들의 특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글쓴이는 쿠알라룸프르에서 만난 리근상에게서 김성희가 지도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리분희와 어쩌면 잘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이 얘기는 기사화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 교류가 숨통을 틀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떠오른 지난 기억들이다. 그리고 꼭 하나 덧붙이고 싶은 기억이 있다. 1991년에는 청소년 축구도 남북 단일팀 ‘코리아’를 만들었다. 그해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20 월드컵의 전신)에서 8강의 빛나는 성적을 거둔 선수들은 먼저 평양으로 가 그곳에서 환영 행사를 하고 남측 선수들은 판문점을 거쳐 돌아왔다. 글쓴이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는 사무실 북쪽 문까지 마중을 나갔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걸어 내려오는 대부분 선수들의 눈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평양에서 출발해 개성을 거쳐 판문점까지 따라와 배웅한 북측 선수들과 남측 선수들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며 헤어지는 아쉬움에 눈물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다. 남북 선수들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프로 축구 유공과 평가전, 자체 훈련 등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애인 사진을 보여 주기도 하며 다정하게 지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남북 청년들은 그때 그렇게 헤어졌고 이제 4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됐다. 현정화와 리분희의 이별 장면은 사진으로라도 남아 있지만 이들에게는 사진도 없다.
신명철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영화 '코리아' 제작보고회. 왼쪽이 현정화 감독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