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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논어와 스포츠] 선수에게 습(習)이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13.04.05 15:22 / 기사수정 2013.04.05 20:07

김덕중 기자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시간이 날때마다 쉬지 않고 반복해서 몸에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문장이다. 당연히 <논어>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체육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가. ‘자왈’은 공자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학(學)이라는 글자는 아이가 양 손으로 책을 펴들고 있는 모양이다. 운동선수와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학(學)이다. 특정이론이나 실기를 영상자료나 강의를 통해 배우거나 혹은 누군가의 시범을 통해 몸으로 배우거나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테크닉과 정보를 접하는 것이 모두 학(學)이다. 근본적인 기술만이 아니고 호흡법, 주법(走法), 팔과 다리의 각도 등 세밀한 부분을 배우는 것도 역시 학(學)이다. 선수나 지도자나 배움이 깊어지면 어떤 경지에 다다르는가. 역시 공자님 말씀에서 답을 찾아보자. 학즉불고(學則不固)다. ‘혹은 배운 사람은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내가 배운 테크닉과 이론이 최고가 아니라 얼마든지 더 낳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유연하고 열린 태도로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배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중요한 과제는 그 다음이다. 습(習)을 해야 학(學)을 통해 배운 기술이 비로소 온전하게 내 것이 된다. 주자(朱子)는 습(習)을 새가 자주 날개짓을 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보았는데 이는 배운 것을 온 몸으로 익혀 체화(體化)하는 것을 말한다. 1967년 체코에서 벌어졌던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MVP 박신자(朴信子: 1941∼)는 현역 시절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않고 등 뒤로 패스를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연습을 거듭하다 보면 농구코트의 모든 부분이 내 피부처럼 느껴진다. 피부의 어디가 가렵고 어디가 뜨거운 지를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팀 선수들과 상대 팀 선수들이 코트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아니까, 패스를 할 수 있다.”

9살 입단이라는 세계최연소 입단기록 보유자이자 한국바둑 전관왕 3회, 통산타이틀 획득 158회, 세계최초의 국제기전인 잉창지배(應昌期盃) 초대챔피언(1989)등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둑황제 조훈현(曺薰鉉: 1953∼)도 습(習)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다. 20대 초중반이 전성기인 바둑계에서, 조훈현은 40을 훌쩍 넘어서까지 세계 정상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비결은? “일본 유학시절(1963∼1972), 나는 나이도 어린데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바둑책 공부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반복해서 읽다보니, 수 천 페이지 정석대백과가 다 외워졌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오늘은 794번 정석을 써보자, 내일은 1204번을 쓰자 생각하면 머릿속에 형광등 켜지듯이 기보가 그려졌다. 나이가 드니 예전처럼 선명하게 기보를 그릴 수 없게 되더라. 그런데 이 수가 맞나 저 수가 맞나 머리가 망설이는 사이 손이 혼자 나가서 돌을 집더라. 그리고 자기 혼자 제자리에 착점을 하고 오는 것이었다.”

어깨를 다쳐 실직하고 주정뱅이가 되었던 아버지가 근육단련용 특수기구를 제작해 아들을 야구선수로 키운다는 일본의 야구만화 <거인의 별>(1968: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태풍을 쳐라>)에도 습(習)과 관련한 내용이 있다. 방안에서 변화구 그립을 연습하던 아들이 공을 놓친다. 공은 술에 취해 잠자던 아버지 쪽으로 튕겨간다. 잠결에 공을 잡은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왼쪽으로 몸을 틀고 송구동작을 취한다. 아들은 ‘아버지는 역시 타고난 3루수야’라며 감탄한다. 부자지간의 불화가 야구를 통해 해소되는 명장면이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도 외야수로 전향하면서 습(習)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포지션을 옮겨서 수비력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건 내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평생을 내야수로만 뛰던 나에게 외야로 날아오는 타구의 크기와 방향을 가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낙하지점을 빨리 찾는 것이 내가 파악한 외야수비의 핵심이었는데, 그 기본을 못하겠더라. 그래서, 소리로 타구방향을 가늠하는 연습을 했다. 공을 보지 않고,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에 집중하고 그 소리를 따라 이동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매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 년을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타격소리만 듣고도 타구방향과 빠르기를 판단할 수 있었다.’



박지성 일기에 나오는, 초중고 시절의 맨발 훈련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발등의 모든 부분에 적어도 공이 일 만 번은 닿아야 발과 공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코치선생님의 가르침을 수도자처럼 묵묵히 반복실천해서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 인고의 기록.

그렇다.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단기간 내에 가능할는지도 모르지만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틈이 날 때마다 연습하고,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몸을 길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배우고 익힘, 즉 학습(學習)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왜 기쁨의 원천인가.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공자의 믿음이었다. 학습은, 자기혁신과 진취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래서 학습이다. 끊임없는 연습이다. 공자에게든 체육인에게든, 자기발전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족(蛇足)

하나, 박신자는 1964년 제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때 이미 베스트 5에 뽑혔던 세계적인 선수였다. 이때 이미 은퇴를 고려했으나, 협회의 만류로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1967년 대회 때 한국팀의 최장신은 176cm의 박신자. 다른 팀은 평균신장이 190cm 언저리였다. 한국은 체코, 동독, 유고를 연파했고 결승에서 소련에게 졌다.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가 나온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는데, 오히려 소련팀 코칭스텝이 ‘박신자의 수상은 당연한 일’이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박신자는 1999년 동양인 최초로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둘, 지금이야 아무 일도 아니지만, 1967년엔 공산국가를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뉴스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당시 중국 신화사통신 기자가 외환은행에 통장을 개설했는데,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인이 대한민국에서 사상최초로 개설한 은행구좌’라는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1967년 당시 우리 대표팀은 유사시 비상탈출 계획을 세우고 도상훈련까지 마친 뒤 체코슬로바키아로 입국했다. 선수단은 무사히 돌아왔으나 취재 중이던 조선일보 기자는 실종되어 오늘날까지 소식을 모른다. 프라하는 중세의 아름다움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로 도심 자체가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1985)의 촬영장소였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번안 제목은 프라하의 봄)>(1989)에는 소련의 압제에 맞선 1968년 프라하 거리시위 장면이 나오는데, 로케이션 장소는 체코가 아니었다.

셋, 한국여자농구는 1979년 제8회 선수권대회에서 다시 한 번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이 대회는 소련, 중국, 쿠바 등 공산권이 불참한 반쪽짜리 대회였다. 중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목에 건 1984 LA올림픽 역시 소련 및 동유럽 국가가 참가하지 않은 대회. 1967년 세계선수권 준우승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9년 대회의 개최지는 서울. 이 대회에 맞춰 개관한 잠실체육관이 주경기장이었고, 장충체육관이 보조경기장이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에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경기장이다. 대한민국엔 이 건물을 지을만한 기술이 없었기에 완공을 위해선 ‘선진국’ 필리핀의 기술진의 도움을 빌려야 했다. 장충체육관 건립 이전엔, 이 자리에 있던 육군체육관이 노천이나마 국내에서 유일하게 ‘마루바닥’이 깔린 시설이었다. 사정이 이래서야 세계대회를 앞두고 훈련성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았을 터. 협회가 고육지책으로 짜낸 묘안이 용산 미군부대 안의 군 체육관을 빌리는 일이었고, 그 결과 몇 쌍의 여자 농구선수-미군 장교 커플이 탄생했다.

넷, 조훈현이 차지한 잉창지배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세계최초의 국제기전은 아니다. 응씨배 창설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일본 기원은 ‘첫’ 국제기전의 상징성을 감안하여 서둘러 후지쯔배 바둑대회를 입안하고 개최했다. 잉창지배는 4년에 한 번 열리는데, 2013년 3월의 제7회 대회 결승 진출자는 한국의 소년기사 박정환 9단과 중국의 신예기사 판팅위다. 한국은 이전의 여섯 번 대회 가운데 다섯 번을 우승했다. 조훈현(1회), 서봉수(2회), 유창혁(3회), 이창호(4회), 최철한(6회)이 역대 우승자의 면면이다.



장원재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 만화 '거인의 별' 커버, 이종범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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