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한국남자배구가 부활의 기지개를 켰다.
박기원 감독이 이끄는 한국남자배구대표팀은 현재 베트남 빈푹주 빈옌에서 열리고 있는 '제3회 AVC컵 남자배구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이 대회에 출전하는 12명의 엔트리를 보면 세터 황동일(대한항공)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은 모두 대학선수들이다.
박기원 감독은 "올림픽 예선전을 치르면서 대표팀의 선수층이 얇은 현실이 무척 힘들었다. 앞으로 대표팀의 선수층을 두텁게 하는 것은 물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과 2016년 리우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 젊은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한국남자배구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한국 배구의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현재 대학배구의 경쟁력 약화도 지적되고 있다.
90년대는 한국남자배구가 세계의 강호들을 상대로 선전을 했던 시절이다. 당시 실업리그였던 '백구의 대제전'에서 실업팀들은 물론 대학팀의 분전도 볼거리였다. 한국대학배구가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해는 1991년이었다.
한양대에는 대학 최고의 거포이자 한국 남자배구를 대표했던 공격수인 하종화(현 현대캐피탈 감독)가 버티고 있었다. 하종화와 함께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배구를 해온 장신 센터 윤종일도 팀의 기둥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만능 플레이어' 강성형도 한양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들이 활약한 한양대는 '삼손' 이상렬이 이끌고 있던 금성(현 LIG손해보험)을 제압하고 '백구의 대제전 제8회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했다. 대학팀 최초로 국내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종화와 윤종일 그리고 강성형은 대표팀 주전 선수로도 활약했다. 당시 세대교체에 있었던 남자배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 티켓을 획득해 올림픽 무대에 섰다. 대학배구의 전성기는 계속 이어졌다. 한양대의 '영원한 라이벌'인 성균관대는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임도헌(현 삼성화재 코치)을 배출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과감하게 강타를 구사한 임도헌은 가공할만한 공격력 못지않게 수비력까지 갖췄다. 여기에 장신세터 진창욱과 '블로킹'의 달인 박종찬, 그리고 '비운의 센터'인 고 김병선은 모두 태극마크를 달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갈색폭격기' 신진식(현 홍익대 감독)이다. 188cm인 신진식은 레프트 공격수로서 신장은 그리 크지 못했지만 전광석화 같은 C퀵과 중앙 후위공격으로 명성을 떨쳤다.
남자배구 최고의 한일전 중 하나는 1996년에 열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예선전'이다. 올림픽으로 가는 단 한 장의 티켓을 놓고 한국과 일본은 최종전에서 맞붙었다. 이 때 대표팀 주전 선수 6명 중 3명이 대학선수들이었다.
레프트에는 성균관대의 신진식과 인하대의 박희상, 그리고 중앙에는 경기대의 박선출이 코트에 들어섰다. 이들 중 신진식은 일본의 슈퍼스타인 나카가이치 유이치와 불꽃 튀기는 득점 경쟁을 펼친 끝에 승리의 주역이 됐다.
신진식 홍익대 감독은 "당시 공격수들은 기본적으로 수비를 할 수 있었다. 특히 레프트 공격수들은 후위에 물러서면 서브리시브를 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최근 대학선수들은 기본기가 부족한 점이 가장 아쉽다. 서브리시브와 수비는 배구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레프트에 포진된 선수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서브리시브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2005년부터 프로리그가 출범하면서 대학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기 어려워졌다. 10년 전만해도 어린 선수들은 월드리그 같은 국제대회 경험을 쌓으면서 경쟁력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점점 사라졌고 가장 중요한 기본기마저 실종됐다.
박기원 감독은 "대회 결과를 떠나 어린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다. 이번 대회에서 모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국배구의 발전을 위해 대학배구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오는 것은 실로 절실하다.
[사진 = 신진식, 하종화, 전광인 (C) 엑스포츠뉴스DB]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