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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실명 위기 치료법 없어 눈물…받아들였다" (마이웨이) [전일야화]

기사입력 2020.12.15 07:00 / 기사수정 2020.12.15 10:35


[엑스포츠뉴스 김현정 기자] '마이웨이' 실명 위기에 놓인 송승환이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보였다.

14일 방송된 TV CHOSUN '스타다큐 마이웨이'는 공연 제작자와 연출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송승환의 이야기를 담았다.

송승환은 1965년 아역 성우로 데뷔했다. 드라마와 영화, 공연에 출연할 뿐 아니라 MC, 라디오 DJ,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 돌연 미국으로 떠난 그는 브로드웨이 공연들을 보며 영감을 받아 '난타'를 제작,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최고의 공연 제작자 반열에 올랐다. 2018년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을 맡았다.

송승환은 아침 일찍 연극 홍보를 위해 부지런히 라디오 녹화에 나섰다. 송승환은 "이왕이면 많은 관객이 오면 좋으니까"라며 웃어 보였다.

송승환은 "처음 데뷔한 게 KBS 1965년이다. 그때는 KBS가 남산에 있었다. 여의도로 옮겨온 뒤 많은 드라마를 촬영했다"라고 떠올렸다.


연극 '더 드레서'를 통해 9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선 송승환은 라디오에서 "이 시리즈의 취지가 한 명의 배우를 지목하고 그 배우가 택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기획이었다. 여러 작품을 찾다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극단 대표 겸 배우 역할이다. 대본을 본 순간 내 얘기 같았다. 나도 극단 대표를 하면서 배우를 하고 평생 연기 활동을 했다. 감정 이입이 잘 될 거 같은 작품이었다. 좋아하고 재밌는 일이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안 할 수도 있지만 재밌으니까 하는 것"이라며 출연 계기를 밝혔다.

카메라 밖 모습에 대해 "난 그냥 화면 속의 역할로 시청자에게 보여주면 되는 거다. 본래 사는 모습까지 다 보여 드리는 건 오히려 시청자에게 배우로서의 캐릭터의 환상을 깨는 거다. 요즘은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 자기 일상을 공개하는데 난 익숙하지 않다. 사생활이나 개인 공간은 잘 안 한 게 습관이 된 거다"라고 답했다.

시력 저하로 실명 위기에 놓였던 송승환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휴대전화 메시지를 아무리 크게 해도 안 보이니까. 앞에 있는 사람 얼굴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보이던 얼굴이 점점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많이 당황했고 두번째 한일은 아무래도 의술의 힘을 빌려야 해서 서울의 여러 대학 병원을 찾아다녔고 미국에 유명한 안과를 찾고 일본 병원을 찾았다. 눈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아다니는 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치료 방법이 없더라. 안 보여도 일하는 방법을 찾자 했다. 여러가지 기구도 개발하고 보지 못하면 들을 수 있는 IT 기술을 찾고 습득했다"라고 고백했다.

송승환은 "방법을 찾기까지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르지 않냐. 자기들이 안 보여봤어야 알지. 모르니까 이렇게 저렇게 물어보고 알아보고 했다. 딱 한 번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밤에 시원스럽게 한 번 울고 그걸로 끝이다. 그 다음부터는 편안하게 살고 있다. 집사람이 걱정 많이 해주는데 가끔 눈이 나쁘다는 걸 잊어 버린다. 내가 멀쩡해 보이니까. 눈에 반창고라도 붙이고 다녀야 하겠냐 했다. 집사람이 심청이 노릇을 열심히 한다. 가끔 뺑덕어멈이 되긴 한다. 일하는 것에 크게 지장은 없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라며 웃어 보였다.

송승환은 "형체는 알아볼 수 있다. 이제 어두워지면 많이 안 보이지만 낮에는 알아볼 순 있다. 자주 다니는 곳은 문제가 없는데 처음 가는 곳은 조심한다. 나빠지는 게 진행이 멈췄다. 병원에서도 멈춘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다음날 아침에 창문을 열고 파란 하늘이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소리가 나왔다. 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내가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워할 것 없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이왕에 닥친 일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좋은 거다"라며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집안도 여러 번 망해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고등학교 때 방송국에서 박원숙 선배와 같이 밥을 먹었다. 그때 빚 때문에 선배도 어려웠을 때다. 그런데 나보다 더 긍정적이시다. '너도 요즘 힘들다며, 난 내 인생이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지하 3층이 또 있더라' 하면서 둘이 웃었다. 웃을 수 있는 게 좋다. 그래야 극복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송승환은 "어릴 때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해 어렵게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소년 가장이 됐다.  인기 있는 드라마 '여로'의 아들 역할이어서 나도 유명해졌다"라고 회상했다.

김영옥은 "송승환을 어릴 때부터 봤는데 성실하고 똘똘했다.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다. 치매 걸리면 어떡하냐 그러니까 나는 치매에 걸린 거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한대. 왜?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옆 사람만 괴롭히는 것 아니면 요양원에서 잘 케어 받으면 되니까 본인은 모르는데 뭐가 걱정이 되냐고 하더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침체돼 있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는 걸 거다. 특별히 더 아린 손가락이 있다. 관심을 못 보여서 그렇지 내가 박수를 보낼 거다"라며 응원했다.

연극 '더 드레서' 공연 중인 송승환은 "대본을 못 보니 들어야 한다. 들으면서 암기한다. 첫 리딩 때 외워서 했다. 후배들이 저 선배 벌써 대본을 다 외웠어? 하고 첫 연습날 다 외워 왔다. 미안하기도 했다. 난 안 보여서 다 외운 건데 후배들도 나와 호흡을 맞추느라고 다 외워서 고마웠다. 리허설 때도 할일이 많다. 동선에 걸리는 게 없는지 마이크 위치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송승환은 과거 미국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1983년에 영화 '낮과 밤'을 찍으러 유럽에 갔다. 촬영 후 유럽 여행도 했다. 외국에 가기 쉽지 않을 때인데 기회가 된 거다. 뉴욕 브로드웨이도 갔는데 충격을 받았다. 한국과 뉴욕의 문화 격차가 컸다. 뮤지컬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젊어서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이런 도시에서 몇 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때 집안이 아주 최악으로 어려웠다. 밖에서는 스타라고 하는데 그때 바쁠 때 번 집들을 날리고 친구 집에 방 한 칸 얻어 살고 있었다. 심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집사람을 만났고 위로가 됐다. 많이 기대게 되면서 생각보다 결혼을 빨리 했다. 마침 아내의 가족도 미국 이민을 가 있었다. 약혼식을 하고 같이 미국에 갔다. 부모님 사업이 여러번 실패했는데 그때도 빚이 다 정리가 안 됐었다. 내가 진 빚은 아니지만 다 갚아드리고 맨손으로 미국에 갔다. 몇천 달러 안 들고 갔다"라며 힘든 시절을 언급했다.

미국에서 플리마켓도 열었다는 송승환은 "집사람과 아르바이트 해서 집세는 낼 정도였고 식료품 비는 나왔다. 조금 더 벌면 연극, 뮤지컬을 봤다. 그러다 뉴욕에 한인 방송국이 생겨 아르바이트로 DJ 생활을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뉴욕에서 영감을 받은 송승환은 '난타'의 제작자로 변신했다. 그는 "대본이 없는 연극을 한다고 하니 그게 되겠냐는 반응이 많았다. 뉴욕에서 그런 공연을 수없이 봤다. 비언어극들이 많았다. 내게는 익숙했지만 우리나라 공연 관계자에게는 낯선 거다. 그러나 이런 공연을 만들어야 세계 시장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며 '난타'를 기획한 계기를 밝혔다.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송승환은 "올림픽 총감독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 기분이 좋았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했다. 그런데 일종의 넌버벌 퍼포먼스다. 언어가 없는 쇼인데 그렇다면 '난타'를 20년간 했는데 이걸 못하겠나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내게 재밌는 일인가가 중요하다. 올림픽 개폐회식을 만드는 게 재밌는 일 같았다"라고 말했다. 

예산이 600억 밖에 되지 않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마무리했다.
  
khj3330@xportsnews.com / 사진= TV조선 마이웨이 방송화면

김현정 기자 khj3330@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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