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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토크] ① 브라질 축구의 화려한 역사

기사입력 2009.11.12 01:25 / 기사수정 2009.11.12 01:25

박문수 기자



"축구는 영국이 만들어졌지만 브라질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브라질이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란 사실을 쉽게 인정하며, 무의식적으로 인식된 브라질 축구의 강력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오래된 관습으로 자리매김했지요. <엑스포츠뉴스>는 매주 목요일 브라질 축구에 정통한 본지 박문수 기자를 통해 브라질 축구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연재물 '삼바 토크'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편집자주]

지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시작으로 5차례나 우승을 이룩한 브라질은 넓은 선수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축구의 상징이자 그 자체로 인식되었고 월드컵 단골손님이자 영원한 '축구 왕국'으로 불리고 있다. 이번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남미지역예선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19번의 월드컵에 모두 개근한 브라질은 2014년 월드컵이 자국 브라질에서 열린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은 20회의 월드컵에 모두 출전하는 세계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브라질 축구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강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1914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원정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 축구에 발을 내민 브라질 대표팀은 191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 강호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1920년대 '초대 월드컵 우승팀' 우루과이와 '영원한 라이벌' 아르헨티나의 강세 때문에 브라질은 남미의 3인자로 머무르고 있었다.이 때문에 그들은 1,2회 월드컵에서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축구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브라질은 레오디나스의 존재 때문에 축구 강호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1938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은 그의 맹활약 때문에 4강 진출에 성공. '브라질리언' 그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레오디나스가 결승전 출전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 결장한 점과 무솔리니가 조국 이탈리아 우승을 위해 브라질 대표팀의 경기장을 옮겼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존재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챔피언에 가까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 월드컵 개최를 꺼리는 상황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함께 월드컵 개최를 선언했다.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남미국가의 입지를 살린 브라질은 1946년 7월 26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제4회 대회에서 월드컵 개최를 확정. 브라질 축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대회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등극한 아데미르의 맹활약 속에 (결선 라운드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앞둔) 브라질은 완벽한 경기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우승후보 0순위로 부상하게 된 상태였다. 그러나 홈 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마라카나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서 1대 2로 석패. 월드컵 첫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스페인과 스웨덴을 대파하며 선전한 브라질이 후반 19분과 34분에 나온 우루과이의 쉬아피노와 가지아의 골 때문에 역전당한 뒤, 브라질 국민은 슬픔에 잠겼고 그들의 생애 첫 월드컵 제패 꿈은 무산됐다.

그럼에도, 이 대회 직후 브라질은 좋은 인재를 배출하며 다음 대회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콕시스와 푸스카스의 맹활약 때문에 세계 최고의 축구팀으로 부상한 헝가리에 덜미를 잡히며 8강행에 만족했지만 1958년 브라질은 펠레라는 축구 사상 최고의 선수를 배출. 유럽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우승한 첫 이방인이 되며 혹독한 월드컵 첫 우승을 신고한다.

17살의 소년 펠레는 우아하고 간결하면서도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룩했고 조국의 전성시대를 이끈 인물로 성장한다.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사한 브라질은 '펠레의 도우미' 가린샤의 맹활약 때문에 칠레에서 열린 1962년 월드컵도 우승. 명실상부 최고의 축구팀으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잉글랜드, 칠레, 구 체코슬로바키아를 8강과 준결승, 결승에서 완파한 브라질은 질마르, 디디, 자갈로 질마 산토스, 가린샤, 펠레로 이어지는 환상의 라인업을 선사.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터운 선수층의 골격을 마련하였다.

기대를 모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에우제비우의 포르투갈과 헝가리에 밀리며 1라운드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지만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역대 최강의 팀을 형성하며 우승에 성공. 컬러 텔레비전이 처음 중계된 전 세계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카를로스 알베르토, 자일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토스탕, 제르손, 펠레 등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집합하며 대회에 나선 브라질 대표팀은 대회 전승을 기록하며 이탈리아를 결승에서 4대 1로 완파하는 막강한 전력을 선사하며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결승 문턱에서 탈락한 브라질은 1980년대 황금의 4중주를 통해 월드컵 우승에 재도전 기회를 얻는다. 지난 2006 독일 대회에서 일본의 사령탑을 맡은 '하얀 펠레' 지코와 소크라테스, 세레소, 팔카오로 이어지는 황금라인은 멕시코 대회 이후, 월드컵과 인연이 없었던 브라질에 역대 최강의 전력을 갖춘 최고의 팀이라는 찬사를 쏟아냈지만 '무관의 제왕'이라는 오명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브라질이 축구 강호의 입지를 회복한 대회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영원한 라이벌' 아르헨티나가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순항하며 2개 대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브라질은 빛 좋은 개살구란 오명과 함께 가장 강하지만 많이 이기지 못한 팀이란 수모를 겪었지만 이 대회 우승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호마리우와 베베토를 투 톱으로 내세우며 마지뉴와 지뉴, 마우로 시우바, 카를로스 둥가로 이어지는 미드필더와 브랑코, 마르시오 산투스, 알다이르, 조르지뉴로 구성된 포 백과 클라우디우 타파렐이 든든히 지키는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죠가 분전한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꺾으며 왕좌에 복귀하며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매 경기 명승부를 펼치며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은 이 대회에 파헤이라 감독이 파격적으로 발탁한 '어린 축구 황제' 호나우두의 성장 속에 펠레에 이은 또 다른 축구 황제 탄생에 열광하게 된다.

호나우두의 등장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현란한 드리블과 광속의 가속력과 유연한 순발력, 폭풍 같은 득점력은 브라질과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199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가치를 입증. 98년 프랑스에서 벌어질 '전 대회 최고의 포워드' 호마리우와 펼칠 매직 쇼에 축구 팬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브라질의 월드컵 연속 우승을 저지했다. 대회 직전, '간판 포워드' 호마리우는 부상 때문에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 주니뉴 파울리스타도 자취를 감췄다. 이 때문에 호나우두는 호마리우가 아닌 베베투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고 브라질은 프랑스에 결승에서 0대 3으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호나우두는 대회 MVP를 차지하며 개인의 명예는 지켰지만 결승 직전 일어난 발작과 무리한 출전 강행으로 대표되는 브라질의 여러 악재는 그들의 진군을 막으며 대회 직후, 그들을  2인자로 전락시킨다.

이후, 부상 때문에 그라운드와 작별한 호나우두는 힘든 재활을 이겨내며 복귀에 성공한다. 호나우두가 아웃된 상태에서 브라질은 암흑기에 도래했고 히바우두를 중심으로 다양한 공격진 개편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 그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접전 끝에 2002 한일 월드컵 남미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베네수엘라와의 예선 18라운드에서 3대 0으로 승리를 거두며 극적인 본선 진출에 성공한 브라질은 신예 호나우디뉴와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선택한 파격적인 선수들을 이끌고 통산 5번째 월드컵 우승에 성공한다.

기존의 브라질이 4-4-2전술을 기본 골격으로 다양한 응용을 통해 경기에 나선 것과 달리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디뉴를 공격 삼각 편대로 기용하며 좌우 풀백인 호베르투 카를로스와 카푸에게 윙백의 역할을 지시한 스콜라리는 클레베르손과 질베르투 실바에게 보다 수비적인 미드필더의 역할을 지시하며 루시우, 호케 주니오르, 에드미우손에게 3백의 역할을 주문했다. 즉, 4-4-2의 브라질을 3-4-3의 브라질로 변화시키는 파격적인 전술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술은 카푸와 카를로스의 공격적인 능력을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하였고 3 R로 불리는 호나우두, 호나우디뉴, 히바우두의 삼각 편대는 서로 장단점을 올바르게 파악하며 공격진을 이끌며 예선 초반부터 막강한 공격력을 선사했다. 제 호베르투와 에메르손이 빠진 중원은 '신예 스타' 클레베르손과 질베르투 실바가 완벽히 메우며 성공했다.

2002년 왕좌 탈환에 성공한 브라질은 아드리아누, 카카, 호비뉴, 루이장, 주앙, 시시뉴, 디에구 등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배출하며 세대교체에 성공한다. 이는 유럽 무대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활약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너무나도 완벽한 23명의 선수 명단 때문에 브라질의 2006 독일 월드컵 우승을 의심하는 이가 없는 초유의 사태를 야기한다. 1994년 수비적인 전술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파헤이라의 지도력 또한 브라질의 강력함을 대변했다. 또한, 기술고문으로 임명된 마리오 자갈로 감독의 존재도 역대 최강의 브라질임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호나우두의 부상과 아드리아누의 슬럼프, 호나우디뉴의 피로 누적, 카카의 등 부상이란 악재가 겹치며 대회 5위에 머무르며 준준결승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잠재적 약점으로 지적된 지나친 공격력 강화는 중원 압박의 약화와 공수 양면의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노쇠한 카푸와 카를로스를 지나치게 신뢰한 점도 문제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후보로 나선 시시뉴, 호비뉴, 질베르투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을 감안할 때, 수비력을 바탕으로 1994년 월드컵을 제패했던 파헤이라가 공격력을 바탕으로 구사한 비효율적 전술 운영이 악재였음을 나타냈다.

대회에 나선 브라질은 시종일관 4-2-2-2라는 극단적인 공격 전술로 상대에 맞섰으며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는 4-2-3-1이라는 전술로 프랑스의 중원과 맞서고자 했으나 파헤이라가 기용한 주니뉴 페르남부카누는 지단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이후, 브라질은 1994 미국 월드컵 우승 주역인 카를로스 둥가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으며 안정된 팀으로 변한 둥가의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팀으로써 비상했다. 이 때문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대두하고 있다.

브라질 대표팀의 스쿼드는 화려함 그 자체다.

원년대회를 시작으로 이번 남아공대회까지 우승후보로 불리며 세계축구의 축으로 성장한 팀은 브라질뿐이다. 그들은 지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조국의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선사한 펠레를 필두로 레오디나스. 가린샤, 자갈로, 지코, 소크라테스,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두, 호나우디뉴, 카카 그리고 최근에 배출한 알레산드레 파투까지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하며 특급 선수 공작 소로 불리고 있다.

1950년 이후 꾸준한 성적을 바탕으로 월드컵 최다 우승국과 최고의 팀으로 자리 잡은 그들은 특별한 부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함과 완벽함을 선사하며 내로라하는 강호들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아우라를 지닌 팀으로 인식되어왔다. 자국 안팎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브라질이란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선수들의 노력 속에서 그들은 매 대회 우승이란 타이틀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는 만큼 그들의 삼바축구는 영원할 것이다.

[예고] ▶ 삼바토크 2회는 브라질의 11월 A 매치 경기 잉글랜드, 오만전 분석이 이어집니다.

[사진=1970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팀 브라질, 펠레, 호나우두 ⓒ 피파 공식 홈페이지 캡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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