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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훈 감독, "나의 축구 철학은 효율성을 내재한 합리적 축구"

기사입력 2009.09.18 02:02 / 기사수정 2009.09.18 02:02

취재편집실 기자

[엑스포츠뉴스] [풋볼코리아닷컴=최영민] 천안시청의 하재훈 감독이 내셔널리그에서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다.

축구인 하재훈. 그는 선수 시절을 거쳐 스카우터와 코치, 감독을 거치면서 ‘부천맨’으로 통할 만큼 부천SK(現 제주)와 인연이 깊다. 또한 지도자로서도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이른바 ‘공부하는 지도자’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많은 선수들이 따르는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부천 코치 시절 만났던 니폼니쉬 감독(現 러시아 톰 톰스크 감독)의 영향이 컸다.

지난 2003년, 부천에서 스카우터와 코치, 감독생활을 했던 것을 뒤로하고 그는 축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직을 맡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대표팀에 관련된 수많은 업무들을 직접 맡아왔고 월드컵, 청소년 월드컵, 유럽 축구선수권대회 등을 현지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축구에 대한 안목도 키웠다. 2007년 10월부터 2008년 중순까지는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 기술부 부장을 맡으면서 경기분석 및 대표팀 선수들의 기술 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들은 그를 다시 축구 현장으로 오게끔 만들었고, 드디어 2008년 12월 창단된 지 2년이 된 천안시청 축구단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축구색깔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풋볼코리아닷컴’에서는 하재훈 감독을 만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선수시절 이야기, 니폼니쉬 감독과의 이야기 그리고 하재훈 감독만의 축구철학은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 프로축구 초창기 당시 선수들의 프로 입단 과정을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다. 지금이야 드래프트로 선수를 선발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설명을 부탁한다.

= 내가 입단할 당시인 1987년에는 드래프트라는 제도가 없었다. 내가 입단하고 1년 뒤인 1988년도 시즌부터 드래프트 제도가 생겼을 것이다. 그 때 당시의 선수선발 방법은 코칭스텝이나 스카우터가 직접 선수들을 발굴해 팀에 합류시키는 ‘자유계약제도’였다.

◆ 조선대학교 졸업 후 1987년 유공에 입단하면서 계속해 ‘유공맨’으로 활약했다. 프로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 뭐든지 처음과 끝이 기억에 가장 남는 법 아니겠는가? 나 역시도 그렇다. 프로선수로써 첫 데뷔를 했던 경기와 부상으로 아쉽게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먼저 프로 첫 데뷔 경기 때의 일이다. 난 1987년 시즌이 개막하고 7경기 만에 출전기회를 얻었다. 70분정도 뛰었는데 정말 거짓 없이 죽도록 뛰다 나왔던 기억이 난다. 70분 정도 뛰고 정말 힘이 들어서 벤치에 못 뛰겠다고 손을 들고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때 느낀 점이 있었다. ‘아, 그동안 내가 축구를 해오면서 이만큼 열심히 했었으면…’하는 생각이었다. 이 한 경기에 쏟은 노력이 그동안 내가 축구를 해오면서 쏟았던 노력보다 적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94년 선수로써 마지막 경기를 뛰었을 때도 기억에 남는다. 경기를 뛰다 심한 부상으로 인해 실려 나갔는데 그 경기 이후 더 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은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다.

◆ 기록으로만 보면 1990년 수비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3골 4도움이라는 기록을 남기면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였는데, 본인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전성기라고 느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

= 특별히 전성기라고 느꼈던 시즌은 없었다. 전성기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팀에 합류하고 2년 뒤인 1989년 팀이 시즌 우승을 했을 때가 가장 좋았던 시즌이었던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11경기를 뛰어서 특별히 나쁜 시즌은 아니었다.

◆ 선수생활을 했던 당시, 수비라는 포지션에서 만나야 했던 상대팀 공격수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는 누구였는가?

= 글쎄… 워낙에 시간이 많이 흘러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몇 명 꼽을 수는 있겠다. 3명 정도로 꼽아보자면 첫 번째는 파워가 좋고 스피드도 있었던 당시 일화 소속의 고정운이 있었고, 역시 같은 팀 소속의 이상윤도 개인기와 스피드가 상당히 좋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현대 소속의 강재순이라는 선수도 상당한 스피드를 자랑했던 선수였다.

◆ 1994년 선수생활을 마치고 계속해 같은 팀에서 스카우터 생활을 했는데, 그 때 발굴한 선수들은 누가 있었고, 또 어느 선수에게 가장 애착이 갔는지?

= 스카우터 생활을 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당시 감독인 니폼니쉬 감독이 나에게 선수선발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이었다. 좋았던 점인 동시에 나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뽑았던 선수들이 그 때 당시 팀의 주축이었고 지금 뛰고 있는 선수들도 모두 인정을 받는 선수들로 성장해 나를 뿌듯하게 하고 있다.

내가 뽑았던 선수들을 몇 명 나열하자면 먼저 지금 나와 같이 천안시청에 있는 남기일, 이원식, 곽경근, 김한윤, 이성재, 이을용, 최거룩, 박성철 등의 선수들을 내가 직접 뽑았다. 이들 모두 나에게는 애착이 가고 소중한 선수들이지만, 이들 중 꼭 하나를 꼽자면 이성재를 꼽고 싶다. 가장 마지막에 내가 뽑은 선수라는 점이 있고 더군다나 데뷔 시즌에 신인왕도 했지 않은가?

곽경근을 뽑았을 때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당시 니폼니쉬 감독이 드래프트를 앞두고 공격수를 뽑으라는 지시를 했었다. 그 때 당시 곽경근은 일본 J2리그에서 활약했었는데 그가 드래프트에 신청을 한 것이다. 나는 재빨리 곽경근을 만나 “일본에서 돈도 한국보다 많이 받는 것으로 아는데 왜 드래프트를 신청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서 K리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일본 2부리그에서는 국가대표팀에 저의 존재를 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곽경근의 굳은 결의나 자세, 그리고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곤 바로 드래프트에서 그를 뽑았다. 그리고 그는 팀에서는 물론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성장했다.

◆ 유공과 부천SK를 말할 때 니폼니쉬 감독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니폼니쉬가 팀에 있을 때 선수 및 코칭스텝에게 어떤 점들을 강조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다.

= 니폼니쉬 감독은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 부천에 소속되어 있던 선수와 코칭스텝 모두에게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남아있다. 그는 우리에게 축구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발상이 생기게끔 만들어준 지도자이며, 포메이션이나 각각의 포메이션에 따른 동선 등을 지금까지 배워왔던 축구와 다른 시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신 분이다.

니폼니쉬 감독이 가시고 연이어 터키 출신의 트라판 감독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 역시도 유명한 감독이었고 열정도 있는 감독이었다. 선수나 코칭스텝에게 잔정도 부릴줄 아는 그런 감독이었다. 하지만, 축구장에 서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축구장에서는 자기의 주관이 너무나도 뚜렷하기 때문에 전임 니품니쉬 감독에게 무한한 신뢰를 느꼈던 우리로서는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끔 만들었다. 쉬운 예로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그 이후 부임한 본프레레 감독에게서는 신뢰감을 못 느꼈던 것을 들 수 있겠다.

◆ 스카우터, 코치를 거쳐 트라판 감독 해임 이후 감독대행에 까지 오른다. 그동안 쭉 지도자 생활을 해오면서 가지고 있던 축구철학은 어떤 것인가?

= 나의 지도자생활에 있어 노하우는 없다. 그리고 감독도 선수와 마찬가지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선수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합의점을 도출해야만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축구철학을 말로 풀자면 효율성을 내제한 합리적인 축구다. 여기에는 선수들의 기술적인면에 따라줘야 하고 재미있는 축구를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분명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나의 이상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결과물을 이뤄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2005년 말부터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직을 맡으며 많은 일들을 해왔던 것으로 안다. 2006년 월드컵 때도 직접 유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팀들의 경기를 보았을 텐데 이 때 K리그의 코칭스텝으로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 우선 본프레레 감독을 해임했다.(웃음)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을 맡았던 아드보카트 감독의 선임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천안시청에 오기 전에는 현 대표팀 감독인 허정무 감독 선임에도 관여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한 일들을 나열해보자면 훈련 프로그램 DVD제작, 축구이론총서 제작, 메이저급 축구대회(월드컵, 유럽선수권대회, 20세이하 청소년월드컵 등)를 모두 현장에서 관전하며 축구에 대한 안목을 넓혔던 일들이 있다. 또한 현장에서 못했던 이론적인 것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원도 다녔고 겸임교수를 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 2008년 말, 다시 지도자로써 복귀한 곳이 프로가 아닌 내셔널리그다. 특별히 내셔널리그 팀을 맡게 된 이유라도 있는지?

= 5년 동안 현장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 능력을 검증받을만한 곳이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내셔널리그 천안시청에서 감독을 선임한다는 소식이 왔고 도전을 했던 것이다. 솔직히 5년이라는 시간을 현장과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잘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팀에 합류했다. 막상 팀에 오니 짧은 시간 안에 팀을 정비해야 했고, 훈련을 시켜야 해서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초반에는 누구나 그렇듯 참 어려운 일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선수들의 모든 시야가 나에게로 집중 되어있다는 것 이었다. 그만큼 선수들이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쭉 노력해온 결과 천안시청만의 축구에 대한 마인드는 어느 정도 잡혀가고 있다고 본다. 특히 천안만의 강점인 축구 인프라나 시설, 축구에 대한 열기는 K리그 어느 팀에서도 느끼지 못할 만큼 대단하다. 그것이 내셔널리그에 있어도 전혀 K리그 팀들이 부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 하재훈 감독 부임 후 천안시청 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선수들을 하나로 만든 본인만의 비결이 있다면?

= 비결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우선 나는 선수들에게 열려있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훈련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선수들에 대한 투명성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수들과 나 사이에는 수평적 사고방식이 존재하며 같은 문제에 대해서 다 같이  고민한다는 점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써 아직 젊은 나이의 하재훈 감독이 갖고 있는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 지난 2008년 내셔널리그의 캐치프레이즈는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열쇠’였다. 나 역시도 지금 내가 내셔널리그에 있는 것이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현재 세운 목표를 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 목표를 넘으면 더 큰 목표가 기다리고 있고, 난 그 목표를 향해 또 나아갈 것이다.

최영민(ymchoi@footballcorea.com) /사진제공=내셔널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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